[include(틀:신라왕릉)] || {{{#fbe673 '''탈해왕릉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경주시의 관광)] ---- [include(틀:탈해 이사금)] ---- }}} ||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174호}}}''' || || {{{+1 {{{#fff '''경주 탈해왕릉'''}}}}}} {{{-1 {{{#fff 慶州 脫解王陵}}}}}}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경주)|동천동]] 산 17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 || || '''{{{#fff 면적}}}''' || 37,993㎡ || || '''{{{#fff 지정연도}}}''' || [[1969년]] [[8월 27일]] || || '''{{{#fff 제작시기}}}''' || [[신라]]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 너비=36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주 탈해왕릉.jpg|width=100%]]}}} || [목차] == 개요 == [[파일:탈해왕릉.jpg]] 脫解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경주)|동천동]]에 위치한 [[신라]] 제4대 국왕 [[탈해 이사금]] 석탈해의 능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 상세 ==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경주 시가지 북동쪽의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높이 4.4m, 지름 15.7m의 상당히 큰 봉분으로 된 원형봉토분이다. 바로 옆에는 조선 시대에 탈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 숭신전이 있는데, 석탈해는 [[석씨]](昔) 왕가의 [[시조]]로서 조선시대에 여러 신라 왕들 중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대우와 관리를 받은 것이다. 이 숭신전을 [[오릉]]에 있는 박씨의 사당 [[숭덕전]]과 [[대릉원]] 남쪽의 김씨의 사당 숭혜전과 함께 경주 3전이라고 한다.[[http://www.gyeongju.go.kr/news/page.do?mnu_uid=1342&parm_bod_uid=130397&step=258|#]] 석탈해의 유해는 [[삼국사기]]에서는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 탈해왕조에 의하면 본래 소천구(䟽川丘)라는 곳에 장사지냈는데 신라 중기, 탈해의 계시를 받은 [[문무왕]]이 탈해왕릉을 열어서 유골을 수습해, 유골을 담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고 제사지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탈해왕릉이 진짜 석탈해의 왕릉이라고 비정한 것은 신라 때부터 쭉 내려온 게 아니라 신라 이후 수백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문중이 비정한 것으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정부에서 예우 차원으로 옛 신라 왕실 가문들에게 제향을 올릴 왕들의 능묘가 있으면 조상님들 모시는데 보태 쓰라고 토지를 하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경주 지역에 "~왕릉"이라고 불리는 고분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중들도 나름대로 삼국사기 등 남아있는 옛 기록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무열왕릉]] 등 일부 정보가 확실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산 동쪽이다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 쪽에 가서 보이는 왕릉 같은 큰 무덤이 있으면 때려맞추는 정도였다. 그나마 왕릉의 위치가 어느 산 동쪽 북쪽 이 정도라도 쓰여진 건 [[법흥왕]] 이후 왕들이지 그 이전 초기 왕들은 그 정도 힌트도 없다.] 분명히 석탈해는 신라 초기의 왕인데 탈해왕릉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여서 여기가 진짜로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수준[* 고분의 양식을 봐선 신라 후기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이지만 조선시대 비정 이래 수백년간 제사를 해온 석씨 문중과도 얽혀있는 등 [[어른의 사정]]으로 지금도 탈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양식상의 모순에 대해 신라 후기에 오래된 무덤이 북천의 범람으로 훼손된 것을[* 마찬가지로 동천동에 있는 [[헌덕왕릉]]도 북천의 범람으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수리하면서 그 때 신라 후기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바로 옆에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과 관련된 표암봉(瓢嵒峰)이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탈해 이사금, version=235)] [[분류:탈해 이사금]][[분류:신라왕릉]][[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경상북도의 무덤]][[분류:경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