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원사)] [목차] == 개요 == [[원나라]]의 인물. 잘라이르부 출신으로 [[여몽전쟁]] 후반부의 몽골군 총사령관이었던 [[자랄타이]]의 아들이었다. == 생애 == 지원 17년([[1280년]]), 훈신 자랄타이의 아들로서 소용대장군 동경로총관부 [[다루가치]]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나간 후 청렴하고 근면했기에 지원 18년([[1281년]]) 교초 60정(錠)을 받는 한편 소의대장군 개원등로선위사로 승진했으며, 곧 요동선위사로 관직이 바뀌었다. 지원 22년([[1285년]]) 세조 [[쿠빌라이 칸]](제5대)을 알현했는데 오래도록 위로를 받았다. 당시 황제가 타추에게 >"[[칭기스 칸|태조]]께서 그대의 아버지 자랄타이에게 명령한 성지를, 그대는 외울 수 있겠는가?" 라고 묻기도 했다. 타추가 대답함에 예를 범하지 않자 옥 허리띠와 활·화살을 하사했고, 용호위상장군 동경등로행중서성우승에 임명했으며, 또 요동도선위사에 임명했다. 타추는 [[나얀]] 등 [[동방 3왕가]]가 요동에서 모반하는 정황을 탐지하고 말을 달려 쿠빌라이 칸에게 알리도록 했으며, 명령을 받고 칸의 서자인 아야치(愛也赤)와 함께 군사 10,000명를 거느리고 대비했다. 나얀이 [[여진족|여직]] 수달달의 관민과도 손을 잡자 타추는 마침내 처자식을 떠나 휘하의 12기와 함께 건주(建州)로 향했다. 타추는 나얀의 당여인 타사바투르(太撒拔都兒)와 교전했으며 아야치를 습격하려는 테케(帖哥)와 초르치(抄兒赤)를 물리쳤다. 추격하는 병력 1,000여 명에 대응해 불과 수십 명의 인원만으로 황자를 호위했으며, [[요하]]를 넘어 퇴각했다. 이번에는 역으로 나얀군에서 공격해오자 타추가 적장인 테구다이(帖古歹)에게 화살을 쐈다. 화살이 테구다이의 입으로 들어가 뒷목을 뚫고 나와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공격해오던 반란군 병사들이 모두 후퇴했다. 마침내 의주(懿州)를 점령했는데 의주 백성들이 모두 향을 피우고 절하면서 타추의 공을 칭송했다. 그러나 타추는 >"오늘 일은 위로는 황제의 큰 복에 힘입은 것이고, 아래로는 장사들의 힘 덕분인 것인데, 내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今日之事, 上賴皇帝洪福, 下賴將士之力, 吾何功焉.] 라고 말하며 겸손해했다. 요서 비산(羆山) 북쪽 소룡박(小龍泊)에서 반적의 우두머리인 사독림태(史禿林台)와 노전(盧全) 등이 항복서를 보내놓고는 제때 나타나지 않자 장수들을 보내 일당인 왕새가(王賽哥) 등과 함께 사로잡았다. 곡질아(曲迭兒) 대왕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으며, 약탈하려는 장수들을 엄격하게 제지했다. 첨원 한조(漢爪), 감사 탈탈태(脫脫台)와 나얀 잔당을 추격해 금산에서 싸워 이겼다.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황금과 주기(珠璣), 비단옷, 활과 화살, 그리고 마구를 하사받았다. 지원 28년([[1291년]]) 명주의 호부를 받고 몽골군 [[만호]]로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카다안]]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타추는 병사를 이끌며 건주에 가서 싸웠다. 카다안이 [[카다안의 침입|고려에 침입]]하자 추격해 토벌했다. 거듭 공을 세우니 쿠빌라이 칸의 총애가 더 커졌는데, [[진주]]로 장식된 옷을 하사받았고, 관직은 영록대부 [[요양행성|요양등처행중서성]] 평장정사 겸 몽골군 만호에 이르렀다. == 가족관계 == 자랄타이의 손자이자, 타추의 아들이었던 답란첩목아(答蘭帖木兒)는 중정대부 요양행성 참지정사를 지냈다. [[분류:원나라의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