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메로베우스 왕조 국왕)] ||<-3><#483d8b> '''{{{#FFF 파리 프랑크인의 왕[br]파리-오를레앙 프랑크인의 왕}}}''' [br] {{{+2 {{{#FFF '''Childebert I | 킬데베르 1세'''}}}}}} || ||<-3> [[파일:킬데베르 1세.jpg|width=100%]] || ||<|2><#483d8b> '''{{{#FFF 제호}}}''' ||<#483d8b> '''[[한국어|{{{#FFF 한국어}}}]]''' ||킬데베르 1세 || ||<#483d8b> '''[[프랑스어|{{{#FFF 프랑스어}}}]]''' ||Childebert I || ||<-2><#483d8b> '''{{{#FFF 생몰 년도}}}''' ||496년경 ~ 558년 12월 13일 || ||<|4><-2><#483d8b> '''{{{#FFF 재위 기간}}}''' ||파리 프랑크인의 왕 || ||<#fff>511년 ~ 524년 || ||파리-오를레앙 프랑크인의 왕 || ||<#fff>524년 ~ 55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리(프랑스)|파리]]-[[오를레앙]]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의 삼남으로, 아버지 사후 형제들과 함께 왕국을 분할하여 파리를 다스렸다가 [[클로도미르]]가 사망한 뒤 그의 영지인 오를레앙을 병합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을 격파하고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도 세력을 뻗쳤다. == 행적 == 496년경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군주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 왕비 사이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남자 형제로 잉고메르(494년 출생.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 [[클로도미르]](495년 출생), [[클로타르 1세]](497년 출생)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클로틸데(500년 출생)가 있었다. 51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두 형제와 이복형제 [[테우데리크 1세]]와 함께 나라를 4분할했다. 그는 파리를 가졌고, 클로타르 1세는 수아송, 클로도미르는 오를레앙을 가졌으며, 테우데리크 1세는 랭스를 가졌다. 523년, 형제 클로도미르, 클로타르 1세와 함께 부르군트를 공격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부모를 처참하게 죽였던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를 처벌함으로써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어하는 클로틸데의 부추김을 받았다고 한다.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토이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왕위에서 물러난 뒤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지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베체롱체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파일:두 조카를 살해하는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jpg]]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들은 어머니 곤테우크에게 양육되다가 곤테우크가 클로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클로틸데는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성 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에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 후 부르군트 왕국과의 전쟁을 지속하던 그는 531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리크]]에게 시집갔던 누이 클로틸데로부터 남편이 자신을 학대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클로틸데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서 [[아리우스파]]인 남편에게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다며, 그 증거로 피 묻은 손수건을 보냈다. 이에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고트 왕국으로 쳐들어가 나르본에서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그는 나르본에서 보물을 대거 거둬들인 뒤 여동생과 함께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뒤 아버지가 묻힌 생 드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532년, 그는 부르군트 왕국으로 쳐들어가 오툉에서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포위했다. 534년, 클로타르 1세와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와 함께 고도마르 3세를 처단하고 부르군트 왕국 전체를 병합했다. 이후 클로타르 1세와 함께 랭스의 테우데베르 1세를 몰아내고 그 땅을 양분하려 했지만, 테우데베르 1세가 거액의 뇌물을 찔러주자 그만뒀다. 536-537년 클로타르 1세와 함께 프로방스를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결국 클로타르 1세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동원하자, 투르의 수녀원에 있던 어머니 클로틸데는 이를 막고자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클로틸데가 [[하느님]]에게 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하자 폭풍이 몰아쳤고, 결국 킬데베르는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후 클로타르 1세와 화해한 그는 클로타르 1세와 함께 서고트 왕국이 점유한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가 팜플로나를 함락하고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사라고사 공략은 실패했지만, 성 빈센트의 유물을 가지고 돌아와서 성인을 기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나중에 생 제르맹 수도원에 통합되었다. 545년 어머니 [[클로틸데]]가 죽자, 클로타르 1세와 함께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된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했다. 558년 12월 23일 숨을 거두었고, 파리 인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아내 울타고타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고 두 딸 크로도베르게와 크로데신데를 두었다. 이에 클로타르 1세가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분류:프랑크인의 왕]][[분류:메로베우스 가문]][[분류:496년 출생]][[분류:558년 사망]][[분류:마른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