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신 타이거스 1라운드 지명선수)] ||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width=70]][br]'''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5년 일본시리즈|{{{#fefe01 1985}}}]]'''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igers_Kido.jpg|width=100%]]}}} || ||<-2> '''{{{+2 키도 카츠히코}}} [br]木戸 克彦 | Katsuhiko Kido''' || ||<|2> '''출생''' ||[[1961년]] [[2월 1일]] ([age(1961-02-01)]세) || ||[[오사카부]] [[사카이시]] [[니시구(사카이)|니시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학력''' ||[[PL학원고등학교]] - [[호세이대학]] || || '''신체''' ||178cm, 91kg || || '''투타''' ||[[우투우타]] || || '''포지션''' ||[[포수]] || || '''프로입단'''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 ||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83~1996)''' || ||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1군 배터리코치 (1997~1998, 2001~2002, 2008[* 이 시즌에 한해 작전코치도 겸임했다.]) [br] [[한신 타이거스]] 1군 불펜코치 (2000) [br] [[한신 타이거스]] 2군 배터리코치 (1999) [br]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03~2005) [br][[한신 타이거스]] 1군 수석코치 (2009~2011)|| [목차] [clearfix] == 개요 == 전 [[한신 타이거스]] 야구선수 및 지도자로, 한신의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의 주전 포수였다. == 프로 입단 전 == 오사카부 사카이시 출신으로 소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이미 중학교 때는 지역에서 이름난 유망주였다. 이후 지역 야구명문인 [[PL학원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고, 3학년 때인 1978년엔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선발 고교야구 대회]](춘계 대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하계 대회)에 연달아 출전하여 춘계 대회에선 준준결승 진출, 하계 대회에선 결승에서 대회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를 쳐내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후 [[호세이대학]]으로 진학하여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76경기 출전, 274타수 84안타, 타율 .307, 5홈런, 33타점을 기록하였으며 베스트나인 5회 수상을 달성했다. 3, 4학년 땐 미일 대학 선수권대회 일본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대학 졸업 시즌이었던 19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고[* 드래프트 동기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 [[사이토 마사키]],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말 한 번 잘못 뱉었다가 [[리버스 스윕]]의 도화선 역할을 해버린 킨테츠 투수 가토 테츠로, 고시엔 스타 야쿠르트 투수 아라키 다이스케가 있다.], 한신에선 대학 선배이기도 한 [[타부치 코이치]]가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 세이부에서 넘어온 선수 중에는 '''[[마유미 아키노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유미는 시즌 30홈런을 기록하는 등 공포의 1번 타자로 맹활약했다.] 후 결번이 되어 있던 등번호 22번을 달게 되었다. == 한신 타이거스 시절 == 데뷔 시즌인 1983년엔 [[요통]]으로 인한 재활 때문에 불과 8시합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이듬해인 1984년에도 26시합 출장에 그치며 2군과 [[불펜 포수]]를 전전했지만, 당시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던 시바타 타케시[* 1963~1978년까지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포수]] 및 [[외야수]]로 뛰었던 선수로 현역 시절엔 통산 209시합 출장에 그친 평범한 백업 선수였으나 선수 말기부터 오랜 경험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한신을 비롯한 여러 구단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1996년엔 시즌 말에 도중해임된 [[후지타 타이라]]를 대신해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의 엄격한 지도 아래 점차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985년, 7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한 [[요시다 요시오]]는 키도를 주전 [[포수]] 겸 8번타자로 발탁했고, 그 해 [[규정타석]]엔 미달했지만 '''103시합 13홈런 32타점 타율 .241/OPS .732'''를 기록하며 [[사노 노리요시]], [[히라타 카츠오]]의 뒤를 잇는 [[하위타선]]의 중심으로 출중한 타격을 보여줬고[* 당시 한신 타선은 1번에 30홈런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가 버티고 있었고, [[백스크린 3연발]]의 주역 [[랜디 바스]] - [[카케후 마사유키]] - [[오카다 아키노부]]가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했다. 그렇다고 하위타선이 만만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6번 [[사노 노리요시]]가 13홈런 60타점, 7번 [[히라타 카츠오]]가 7홈런에 53타점을 기록하며 투수들의 멘탈을 터뜨리기 충분했다.], 주전 포수로써 투수진을 이끌며 팀의 21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 및 [[1985년 일본시리즈|첫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끈 공로로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988년엔 개인 최다인 121경기에 출장하여 6홈런 38타점 타율 .254/OPS .672를 기록했고, 데뷔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규정타석]]을 채웠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1989년에 [[쿄진|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하라 타츠노리]]와 홈에서 충돌하여 왼발 뒷꿈치 골절 및 깨진 안경 파편에 얼굴을 긁히는 전치 4주의 큰 부상을 당하면서 93시합 출장에 그쳤고, 이 시즌부터 어깨 부상까지 겹쳐 하락세가 찾아옴과 동시에 출장 기회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1990년에 102시합에 출장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이후 [[세키카와 코이치]], 야마다 카츠히코 등 신예 포수들에게 밀려나며 백업으로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고 결국 1996년을 끝으로 함께 1985년의 우승을 이끌었던 [[투수]] [[나카니시 키요오키]][* 1985년 우승 당시의 [[마무리 투수]]로 1984-96시즌까지 한신에서만 뛰면서 통산 477등판 63승 74패 75세이브 ERA 4.21, 1985년 구원왕 수상 등의 실적을 기록했다. 은퇴 후 한신에서 2004-15시즌까지 투수코치를 역임하며 [[JFK(한신)|JFK]]를 구축하는 성과도 보였으나, 지나친 [[투수]] [[혹사]]로 [[불펜]]들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고 [[후지나미 신타로]]의 몰락에 기여했다는 악평도 받고 있다. 다만 이는 [[후지나미 신타로]] 본인의 워크에식 문제라든가, [[와다 유타카]] 전 감독이 데뷔 초창기인 2013~2015년에 과도하게 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와 함께 1996년 10월 9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한신 코시엔 구장|코시엔]] 최종전에서 은퇴 경기를 진행하며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이 경기에서 [[시오타니 카즈히코]][* 시오타니는 이 만루포가 본인의 프로 첫 홈런이었다.]와 [[신죠 츠요시]]가 [[한만두]]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 통산 965경기 출전, 타율 .230 출루율 .305 장타율 .345 OPS .650, 51홈런 226타점을 기록했다. == 은퇴 이후 == 은퇴 이후로는 한신 코칭스탭을 맡기도 했으나 2011년을 끝으로 사임하고, 이후엔 일본 여자 야구 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 기타 == 아내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일본항공 123편]]에 탑승 예정이었으나, 탑승 직전에 예약을 변경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한편 그 사고기의 앞 항공편[* [[후쿠오카 공항|후쿠오카]]발 [[하네다 공항|하네다]]행 JAL 366편]에는 키도 본인을 포함해 [[한신 타이거스]] 1군 선수단이 탑승했고[* 당시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한신이 시합을 했고, 다음 시리즈는 [[고라쿠엔 구장]] [[전통의 일전]]이었다. 한신 선수단은 [[죽음의 원정]]길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반대로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가 123편을 타고 오사카로 돌아가다가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위의 사진과 같이 등번호는 22였다. 한 때는 [[타부치 코이치]]나 키도 본인처럼 포수들의 번호로 유명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후지카와 큐지]]나 [[오승환]][* 오승환은 자신이 [[삼성 라이온즈|삼성]]에서 달던 21을 달 수 있었으나 본인이 21번 주인 [[이와타 미노루]]에게 실례라 생각해 거절했다.] 처럼 [[마무리 투수]] 등번호로 더 유명해졌다. [[분류:1961년 출생]][[분류:니시구(사카이) 출신 인물]][[분류:한신 타이거스/은퇴, 이적]][[분류:PL학원고등학교 출신]][[분류:호세이대학 출신]][[분류:1983년 데뷔]][[분류:1996년 은퇴]][[분류:원클럽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