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세계의 섬들)] [include(틀:프랑스의 행정 구역)] ||<-2> {{{#fff {{{+2 '''Île de Clipperton'''}}}[br]클리퍼턴 섬}}} || ||<-2> [[파일:Localisation_de_l'ile_de_Clipperton.png|width=100%]] || || 국가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30]] [[프랑스]] || || 면적 ||6㎢ || || 시간대 ||UTC-8|| || 홈페이지 ||[[http://www.outre-mer.gouv.fr/polynesie-francaise-lile-de-clipperton|[[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5]]]] || ||<-2> [include(틀:지도, 장소=Clipperton Island, 너비=100%, 높이=400)] || [목차] [clearfix] == 개요 == * [[영어]]: Clipperton Island * [[프랑스어]]: Île de Clipperton(일 드 클리페르통) * [[스페인어]]: Isla de la Pasión(이슬라 데 라 파시온) [[태평양]]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이자 [[섬]]이다. [[멕시코]] 서부 해안에서 1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6km². 가장 가까운 프랑스 영토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50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인도|상주 인구는 없다]]. == 역사 == [[영국인]] [[해적]] 존 클리퍼턴(John Clipperton)이 [[18세기]] 초에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의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1711년]]에 [[프랑스인]] 항해사 마르탱 드 샤시롱(Martin de Chassiron)과 미셸 뒤 보카주(Michel Du Bocage)가 이 섬을 발견하여 라파시옹 섬(le de la Passion)이라 이름 붙인 기록이 있고, 존 클리퍼턴의 기록은 연도가 명확하지 않아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836년]]에는 [[스페인 해군]]이 독자적으로 이 섬을 발견하기도 했다. [[1725년]]에는 보카주가 다시 이 섬을 찾아 몇 개월간 살면서 독자적으로 과학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섬이 너무 좁고 고립되어 있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모두 영유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그러던 이 섬이 관심을 받은 것은 이 섬에서 [[구아노]]가 발견되면서이다. [[미국]]은 [[1856년]]에 자국 주변의 구아노가 매장된 섬을 자국령으로 편입하는 법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미국 기업이 이 섬에 상륙하여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는 클리퍼턴 섬에서 [[멕시코인]]이 [[1848년]]에 활동했고 또한 주변 해역이 자국 해역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질세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도 [[나폴레옹 3세]]가 [[1858년]]에 클리퍼턴 섬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일부로 편입한다는 칙령을 내렸고 이를 [[하와이 왕국]]에 통보했다. 멕시코는 그 이후 [[멕시코 제2제국|혼란기]]에 접어들어 클리퍼턴 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미국 기업은 실제로 상륙하여 구아노를 채굴하기도 했는데, [[1897년]]에 프랑스가 [[프랑스 해군|해군]]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는 미국에 항의했고, 이에 대해 미국은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없다며 영토 분쟁에서 빠졌다. 멕시코는 [[19세기]] 말에 다시 영유권을 주장하고 [[멕시코군]]을 보내 클리퍼턴 섬을 점령했으며 이에 프랑스는 반발하였다. 아무튼 섬을 실효지배하게 된 멕시코는 영국에 구아노 채굴권을 양도했고, 이에 따라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클리퍼턴 섬에서 구아노를 채굴했다. 이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는 멕시코 [[아카풀코 데 후아레스]]에서 공급되었는데,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멕시코 본토의 지원이 끊겨 사실상 무인도에 고립된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클리퍼턴 섬에는 약 1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영국 선박들은 노동자들을 데리고 철수하였고, [[1914년]] 6월 미국의 배가 이 곳에 들러서 섬을 떠날 것을 제안했으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영국 회사 직원만 떠나고 멕시코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섬에 남아 섬에는 14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 6명의 아이 등 26명이 남았다. 남은 주민들은 지원받은 식량이 떨어지자 [[게]], [[새]], [[물고기]], [[코코넛]] 등에 식량을 의존하면서 영양 부족과 의료 시설의 부재 때문에 병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코코넛을 여자와 아이들에게 양보했기에 [[괴혈병]]에 취약했던 남자들이 대부분 죽고 4명의 [[군인]]들이 남았는데, [[1916년]] [[10월 5일]] 지도자였던 장교가 지나가는 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같이 배를 타고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등대지기]]였던 빅토리아노 알바레스(Victoriano Álvarez)가 15명의 여성 및 아이들과 남은 유일한 남자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소총]] 한 자루만 남기고 모든 무기를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는 섬의 왕을 자처하며 13살 미성년자와 모든 성인 여자들을 [[성노예]]로 삼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살인|죽이는]] 패악질을 1년 가까이 저질렀는데, 결국 [[1917년]] [[7월 18일]] [[강간]] 피해자인 티르사 렌돈(Tirza Rendon)과 장교의 아내인 알리시아 아르나우드(Alicia Arnaud)가 [[망치]]와 [[도끼]]로 그를 살해했다. 그가 살해되고 몇 시간 후 지나가던 미국의 군함 [[요크타운]]이 찾아와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육지로 데려갔는데 4명의 성인 여성과 7명의 아이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고. 한편 프랑스와 멕시코는 [[1909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중재 결과는 [[1931년]]에야 나왔는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영유권을 전 세계에 공표하는 작업을 맨 처음 시작한 국가가 프랑스라는 근거를 들어 해당 영토를 프랑스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이 사례는 [[국제법]]에서 [[무주지]]를 영토로 편입할 때 해당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해야 하는 [[관례]]를 확립했다. 프랑스는 이 섬을 [[1931년]]에 다시 차지했지만 얼미 못가 [[프랑스 침공]]으로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다시 클리퍼턴 섬은 버려졌다. [[1944년]]엔 미국이 잠시 이 섬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반환했다. 전쟁 이후 프랑스가 전통적인 [[핵실험]] 장소였던 [[프랑스령 알제리]]를 독립으로 잃게 되자 이곳을 대체 핵실험장으로 고려했지만 기상조건이 너무 열악해 포기했다. [[1981년]]에는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정부의 합의로 프랑스 정부가 이 섬을 사들였으며, 그 뒤로는 줄곧 프랑스 정부가 소유하는 땅이다. [[2007년]]까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일부였지만 그 이후로는 프랑스 해외 영토 장관(Ministre des Outre-mer)이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 [[분류:프랑스의 섬]][[분류:프랑스의 행정구역]][[분류:무인도]][[분류:속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