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6>|| ||<-6>|| ||<-6><:>{{{#ffffff {{{+4 '''Klaipėda'''}}}[br]클라이페다 }}}|| ||<-2>|| [[파일:클라이페다 시 문장.gif|width=55%]] || ||<-2>|| 시장 || ||<-1><:>{{{#FFFFFF '''국가'''}}}||<-5>[[리투아니아]]|| ||<-1><:>{{{#FFFFFF '''주'''}}}||<-5>[[클라이페다 주]]|| ||<-1><:>{{{#FFFFFF '''면적'''}}}||<-5>98km²|| ||<-1><:>{{{#FFFFFF '''인구'''}}}||<-5>150,590명[* 통계인구, 2022년 기준.]|| ||<-1><:>{{{#FFFFFF '''인구밀도'''}}}||<-5>91,500/km²|| ||<-1><:>{{{#FFFFFF '''시간대'''}}}||<-4>UTC+02:00([[서머타임]] 적용)|| ||<-6><:>[[https://www.klaipeda.lt/|클라이페다 행정 사이트]]|| ||<-6>{{{#!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Klaipėda,너비=100%,높이=300px)]}}}|| [목차] [clearfix] == 개요 == [[리투아니아]]의 [[도시]]. 리투아니아 서쪽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리투아니아가 보유한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15만명([[2020년]])으로 리투아니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자 [[발트 3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2017년]] 기준 [[시민]]의 87%는 [[리투아니아인]], 10%는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동슬라브]] 민족이다. [[쿠로니아 모래톱|쿠로니아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 언어별 표기 == || [[리투아니아어]] || Klaipėda || || [[독일어]] || Memel(메멜) || == 역사 == 도시 자체는 [[12세기]] 무렵에 [[발트족]]이 건설하였고 도시의 [[항구]]는 [[1252년]] [[튜튼 기사단]]이 건설하였다. 당시의 이름은 독일명 '메멜부르크(Memelburg)'였다. 메멜부르크가 있던 '''소(小)리투아니아(Mažoji Lietuva)''''[* [[독일어]]로는 Kleinlitauen.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주의 대충 동쪽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리투아니아인#s-3.3|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 독일인]]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을 때, [[가톨릭]]을 주로 믿는 다른 리투아니아인과 달리 [[루터교회]]를 믿게 되었고, 아예 [[독일인]]으로 동화되어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을 버리게 된 경우도 많았다.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는 소리투아니아 지역과 독립 국가였다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나머지 리투아니아 지역을 가르는 [[국경]]은 500년 넘게 바뀌지 않았으며 둘은 완전히 다른 [[역사]]를 걸어오게 되었다. [[1919년]]까지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령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로이센의 [[임시수도]]였다. [[독일 제국]] 최동단 도시였기에 [[독일 국가]]의 가사에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마스에서 '''메멜''')로 나온다. 독일 제국 시절에는 클라이페다 시 자체는 인구 중 70%가 독일계였지만, 주변 지역은 리투아니아인이 더 많았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프랑스 [[총독]]이 관리하는 [[국제연맹]]령 '[[메멜란트]]'가[* 혹은 클라이페다 지역이라고도 한다]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소리투아니아 지역 전체가 국제연맹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해당 지역은 [[독일]]의 뿌리와 같은 지역이라 아무리 패전국이라 해도 그곳을 넘기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졌고 애초에 소리투아니아인들이 주류도 아니라 [[명분]]이 부족했다. 대신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의 지지로 [[벨기에]]처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작은 [[땅]]을 받아낸다'는 식으로 네만 [[강]] 북쪽의 땅을 뜯어낼 수 있었다. 이 지역이 바로 메멜란트가 된다.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지지한 이유는 과거에 한 [[국가]]를 이뤘던 동지의식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두 나라는 당시에 동지의식은 온데간데 없이 [[빌뉴스]]의 소유권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과거 두 나라가 연합]]했을 당시에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던 도시임을 생각하면...] 먼저 리투아니아에게 네만 강을 통해 발트해로 나아갈 수로를 준 뒤에 '''리투아니아의 영유권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1923년]]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으로 빠져나가자 리투아니아 [[정부]]의 사주를 받은 봉기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어]]와 [[독일어]]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치 지역이었으나, [[1930년대]] 나치당이 독일에서 [[인기]]를 끌면서 클라이페다에 사는 독일계 주민들도 나치당에 동조하게 되었고, 이들이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정부는 나치당원들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재판하였다. 그러나 [[1939년]] [[나치 독일]]이 [[최후통첩]]을 보내며 반환을 요구하자 독일에 반환하여 다시 독일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인]]들이 동프로이센을 탈출하며 이곳도 텅 비어버렸고 소련군이 진입하였다. 이 지역은 [[러시아 SFSR]] 영토가 된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르게 다시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클라이페다(Klaipėda)'라는 이름이 되었다.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은 [[종교]] 차이로 인해 대부분 현대 독일로 이주해서 독일인에 동화되었다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리투아니아가 재독립을 달성해 현재와 같은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도시가 되었다. 2차 대전 전에는 5만 명을 넘은 적이 없는 소도시였으나, [[리투아니아 SSR]] 시절에 [[소련]]의 [[부동항]]이자 군항으로 발전해 인구가 증가하여 [[독립]] 직후([[1992년]])에는 한때 20만명을 돌파했다가 이후 감소하였다. [[1991년]]에 클라이페다 [[대학교]]가 창설됐다. == 경제 == 리투아니아 유일의 항구 도시답게 액화천연가스 [[터미널]]이 있다. [[쿠로니아 석호]]에 있는 누가라 섬 북쪽에 부유식 저장 재기화 설비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현대중공업]]이 설치하였다. 운영은 [[노르웨이]] 업체 레이그 회에그 엘엔지(Leigh Höegh LNG) 사가 하고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리투아니아가 가스관을 통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면서, 액화천연가스 터미널로만 [[천연가스]]를 수입하게 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 언어 == [[202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클라이페다 시민들의 [[모어]]는 리투아니아어 73.79%, [[러시아어]] 19.83%, [[폴란드어]] 0.14%로 조사되었다. == 기타 == 현재는 리투아니아 현지인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 리조트로 개발되는 중이며,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와의 국경 근처 [[쿠로니아 모래톱]] 위의 니다(Nida)라는 [[마을]]에는 독일의 유명 소설가 [[토마스 만]]이 [[1929년]]부터 수년간 기거한 [[집]]에 세워진 기념관도 있다.[* 이 당시 니다는 [[독일국]]([[동프로이센]])과의 국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령이었다.] [[분류:리투아니아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