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br](Quintus Curtius Rufus)|| ||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 '''직업''' ||역사가|| [목차] [clearfix] == 개요 == 서기 1세기 [[로마 제국]]의 역사가. == 생애 == 고대 역사 기록 중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대해 언급한 어떠한 글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전반적인 생애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로마 제국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사람은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검투사]]의 아들이었다고 단언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주저하면서 거짓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성년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재무관을 맡았다. 어느 날 한낮에 아드라미티움 마을의 드문 회랑을 홀로 걷고 있을 때, 인간보다 큰 여인의 형성을 봤고,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 >"루푸스, 당신은 언젠가 이 지방에 총독으로 올 사람입니다." > >그는 이 말에 희망을 품고 로마로 돌아가서 친구들의 아낌없는 지원과 자신의 능력으로 관직을 얻었고, 유능한 후보자들과 경쟁하여 총독 직을 얻었다. 그의 출신에 의혹을 품은 자들이 많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가 "내가 보기에는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그 자신의 조상인 것 같다"라며 투표하면서 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 대한 음란한 아첨, 아랫 사람에 대한 오만, 동급 사이의 오만함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집정관]]의 높은 직위, 승리의 영예를 얻었고, 마침내 아프리카의 속주를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어서 운명을 성취했다. 실제로 로마 집정관 목록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치하에서 서기 43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집정관]]을 지낸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있었다. 하지만 이 인물이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와 동일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저서의 문체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으로 인한 제국 치하의 평화를 축복하는 글귀 등으로 봤을 때, 그는 서기 1세기 중후반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Historiae Alexandri Magni) ==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해 쓴 전기가 현존하는 유일한 라틴인 작가다. 그가 집필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중세 시대에 매우 인기가 있어 123권의 필사본이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처음 2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즉위와 페르시아의 사령관 로도스의 멤논의 죽음 사이의 사건들을 다뤘다고 한다.]은 소실되었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저서는 기원전 333년 봄 마케도니아군이 프리기아를 행진할 때부터 시작하며,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금박 석관에 안장하고 마케도니아로 가져가다가 도중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탈취되어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는 것으로 끝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아리스토불루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종군한 군인 출신 역사가 클리타르코스, 티마게네스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과장하거나 실제 지리와 맞지 않은 기록 등 부분적인 오류가 있긴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행적을 잘 다뤘다는 평을 받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책에서 탁월한 젊은 정복자이자 편집증적인 독재자로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가 알렉산드로스의 광기를 지적하면서 간접적으로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의 폭정을 비판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에는 빠진 일화도 있어서, 후대 연구가들에게 흥미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분류:로마 제국의 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