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튀르키예의 행정구역)] [[분류:튀르키예의 행정구역]] [[파일:퀴타히아 터키 2.jpg]]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운 성채와 구도심 [[파일:터키 쿼타히야 1.jpg]] 둠르프나르 대학 [[파일:터키 아이자노이 1.webp]] 인근 관광지인 아이자노이 유적의 제우스 신전 [목차] == 개요 == {{{+1 Kütahya }}}[* 튀르키예어 표기법 시안의 "ş, v, y의 '시, 우, 이'는 뒤따르는 모음과 결합할 때 합쳐서 1음절로 적는다"는 규칙에 따라 '퀴타흐야'라고 적는다. 실제 발음도 /cyˈtahja/로 '퀴타흐야'에 더 가깝다.] [[튀르키예]] 중서부의 도시. [[에스키셰히르]]에서 서남쪽으로 50km, [[우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부르사]]에서 동남쪽으로 8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25만명으로, 튀르키예에서 29번째로 큰 도시이자 퀴타히야 도의 주도이다. 고대에는 라틴어로 코티에움(Cotyaeum) 혹은 그리스어로 코티에온(Κοτύαιον)이라 불렸고,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 베이국]]들 중 하나인 [[게르미얀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어진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가장 중요한 속주 중 하나였던 아나돌루 에얄레트의 주도가 되며 번영하였고, [[쉴레이만 1세]]의 4남 바예지트 황자가 1553-58년 산작베이 (총독)를 지내기도 했다. 1833년 [[메흐메트 알리]]가 일시 점령했으나 조정과의 협상 후 물러났다. 전통적으로 [[이즈니크]] 타일과 함께 쌍벽을 이룬 도자 산업이 발달하였고, 19세기 말에 이미 12만 인구를 자랑하였다. 다만 8천이 넘었던 기독교도 인구는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튀르키예-그리스 인구 교환]]으로 소멸되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시에는 격전 끝에 1921년 7월 그리스 군이 점령했으나 이듬해 8월 둠루프나르 전투 후 튀르키예군이 수복하였다. 포르수크 강과 산지의 사이에 동서로 길게 뻗은 시가지의 중서부 구도심에는 성채, 울루 자미, 고고 박물관을 비롯한 14-19세기 옛 건축물이 많다. 서남쪽 30km 지점 차브다르히사르에는 제우스 신전으로 유명한 아이자노이 유적이 있다. 서북쪽 8km 지점에는 쿼타히야 둠르프나르 대학교가 있고, 동남쪽 [[아피온카라히사르]] 방면으로 30km 가면 자페르 공항이 나온다. 시가지 북부에는 공단이 있는데, 도자 산업 외에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 정제업 등이 이루어진다. 해발 970m에 위치하여 기후는 서늘하다. 여름에도 35도 이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 갤러리 == [[파일:쿼타히야 터키.jpg]] 퀴타히아 칼레시 [[파일:아이자노이 터키.jpg]] [[파일:터키 아이자노이 2.webp]] [[파일:아이자노이 터키 1.jpg]] 아이자노이 유적 |width=800]] [[분류:튀르키예의 도시]][[분류:튀르키예의 옛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