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이라크 쿠르나.jpg|width=700]]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아담]]의 나무' (인지의 나무).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파일:쿠르나 이라크.jpg|width=700]] 무슬림, 유대인 순례객 모두가 찾는 에즈라 영묘 [목차] == 개요 == [[아랍어]] {{{+1 القرنة }}} [[영어]] Al-Qurnah [[이라크]] 남부의 도시. [[바스라]]에서 서북쪽으로 40km, [[나시리야]]에서 동쪽으로 90km, [[아마라]]에서 동남쪽으로 80km 떨어져 있다. 인구 13만의 중소 도시지만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샤트 알 아랍 (아르반드 루드)으로 합류하는 요충지에 입지하였고, [[에덴동산]]의 위치로 비정되기도 한다. 또한 서남쪽 유프라테스 남안에는 이라크 최대의 유전인 서쿠르나 유전, 동북쪽 티그리스 동안에는 세계 최대의 석유 밀집지 중 하나인 마즈눈 유전[* 아랍어로 마즈눈은 미쳤다는 뜻인데, 그만큼 석유가 밀집되어 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미쳤다리--]이 위치한 자원의 보고이다. 따라서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군의 주요 공세지 중 하나였고, 양측 합쳐 5만이 넘는 전사자를 낼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었다. 본래 일대는 거대한 습지가 있었으나 90년대 이후 수량이 줄며 절반 이상 사라졌다. == 역사 == [[파일:쿠르나 이라크 1.jpg|width=700]] 20세기 초엽, 티그리스 강에서 바라본 에즈라 영묘 역사적으로도 고대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도시를 세울 정도로 유서가 깊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에덴동산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하며, 한 고목을 [[선악과]]가 열린 '아담의 나무' (شجرة آدم)라 여겨 신성시한다. 다만 최근 기존 나무가 죽자 대체하는 나무를 심었다 한다. 북쪽 25km 알 우자이르의 티그리스 동안에는 [[구약]]의 저자 중 하나인 [[유대교]] 성인이자 이슬람 일각에서도 예언자라 여겨 추앙하는 [[에즈라]] 영묘가 있다. === '쿠르나 참사' === 근대 [[오스만 제국]] 시절 이라크 남부는 자치 지역이었고, 여러 부족들이 할거했다. 그러던 1855년 [[모술]] 부근의 아시리아 유적인 두르 샤르킨 (코르사바드) 유적을 발굴한 후 유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려던 프랑스 선박이 쿠르나를 지나다 셰이크 아부 사드의 현지 해적이 공격해 대부분 침몰시키는 일이 있었다. 쿠르나 참사라 불리는 이 일로 유물 중 10%만이 [[루브르 박물관]]에 인계될 수 있었다 한다.[* 그후 1970년대 일본 발굴단이 가라앉은 유물의 회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기도 하였다.] === 굴곡의 현대사 === 20세기 쿠르나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차 대전]]기인 1914년 12월 영국군이 6일 간의 전투 끝에 점령하였고, 상술한 이란-이라크 전쟁 시에 이란군이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으나 도시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도중 마즈눈 유전이 크게 훼손되었다. 1977년에는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위에르달이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간의 인구 이동을 증명하겠다며 쿠르나에서 갈대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으나 불안한 주변 정세로 [[지부티]]로 선회해야 했다.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에 협력한 습지 아랍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4대강 사업-- 여러 보를 세워 습지를 마르게 하였고, [[이라크 전쟁]] 후 다시 습지화에 나섰으나 옛 규모의 절반 가량만이 회복되었다. 2005년 5월 민병대가 쿠르나 점령을 시도했으나 다국적군에게 격퇴되었다. 2010년대 들어 이라크 정부가 서쿠르나 유전의 개발에 적극 나서며 향후 도시의 성장이 전망된다. [[분류:이라크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