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2> [[파일:콘스탄티나.jpg|width=100%]] || || '''이름''' ||콘스탄티나[br](영어:Constantina,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ίνα)|| || '''출생''' ||[[560년]]경|| || '''사망''' ||[[605년]]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아버지''' ||[[티베리우스 2세]]|| || '''어머니'''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 '''남편''' ||[[마우리키우스]]|| || '''자녀''' ||[[테오도시우스(마우리키우스의 아들)|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페트루스, 파울루스, 유스틴, 유스티니안, 아나스타시아, 테오티스타, 클레오파트라||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황후. == 생애 == 560년경 [[티베리우스 2세]]와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당시엔 이노(Ino)로 불림)의 장녀로 출생했다. 574년 12월 7일 정신병을 앓아서 국정을 맡기 어려운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해 제국을 이끌던 황후 [[아일리아 소피아]]의 지명으로 아버지가 카이사르에 지명되면서, 그녀는 여동생 차리토와 함께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리아 소피아 황후가 중간에서 막아섰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와 결혼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아우구스타 자리를 최대한 이어가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내 이노와 두 딸이 있던 티베리우스는 거절했다. 이에 화가 난 소피아는 이노와 그의 두 딸이 황궁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노와 두 딸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 거주했던 집에 정착했다. 그러나 소피아의 박대가 갈수록 심해지자, 이노는 딸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다프누디움으로 돌아갔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 2세 황제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리티키우스를 티베리우스에게 보내 이노와 이혼하는 대신 자신이나 딸 아라비아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거부하고 이노를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해 황후로 삼았다. 결국 소피아는 티베리우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날 자신이 살해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의 동생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궁정을 빼앗고 별궁에 유폐시켰다. 이리하여 아나스타시아는 황후로 인정받아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았고, 콘스탄티나도 공주가 되었다. 582년 8월, 티베리우스 2세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후계자로 [[마우리키우스]]를 지명하고[* 사실 티베리우스 2세는 [[게르마누스]]를 황제 후보로 선호했지만, 게르마누스가 거절해서 마우리키우스로 관심을 돌렸다.] 딸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켰다. 티베리우스 2세는 임종 전날 연설문을 준비했지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그걸 읽기엔 힘이 들었기에 제국의 수석 사법관 사크리 팔라티가 대신 읽어줬다. 그 연설은 마우리키우스가 제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언제나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훌륭한 통치를 해 나의 선택을 빛나게 하라."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는 사망했고 마우리키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테오도시우스(마우리키우스의 아들)|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페트루스, 파울루스, 유스틴, 유스티니안, 아나스타시아, 테오티스타, 클레오파트라 등 5남 3녀를 낳았다. 602년 11월, 다뉴브 강 이북의 숙영지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마우리키우스의 명령에 불만을 터트린 장병들이 [[포카스]]를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반란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황궁을 떠나 마르마라 해의 아시아 해안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남편과 다섯 아들은 포카스가 보낸 추격병에게 붙잡혔고, 그들은 모조리 참살되어 햅도몬에 효수되었다. 콘스탄티나 황후와 세 황녀는 수녀원에 감금되었다. 605년, 콘스탄티나는 게르마누스 장군과 접촉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세 딸과 함께 칼케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수원장 게오르기우스 케드레누스는 콘스탄티나의 머리가 효수되었고 시신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졌다고 기록했다. [[분류:동로마 황후]] [[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 [[분류:560년 출생]] [[분류:60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