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정치인]][[분류:청나라의 유학자]][[분류:북양정부의 정치인]][[분류:1858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포산시 출신 인물]] [include(틀:청사고)]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Kang-youwei2-large.jpg|width=100%]]}}} || || 정체 ||康有爲 || || 한국식 한자 발음 ||강유위|| || 간체 ||康有为 || || 영문 ||Kāng Yǒuwéi[* [[한어병음]]으로 you로 적히는 음절은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에서 '유'로 적게 규정돼 있는데, 이는 해당 음절을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 yu로 적는 것의 영향이다. 한어병음 you의 실제 음가는 '여우'나 '요우' 정도에 가깝다.] || || 출생 ||1858년 3월 19일 [[청나라|청]] [[광둥성]] 남해현(南海縣) 단조(丹灶) 소촌(蘇村) || || 사망 ||1927년 3월 31일 [[중화민국]] 교오상부 [* 현 [[산둥성]] [[칭다오|칭다오시]]] [br] ^^향년 69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청나라|청]]말[[중화민국|민]]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입헌군주제|입헌군주론자]]로서 [[복벽]]운동을 펼쳤다. 한국식 독음은 [[강유위]]다. == 생애 == 1858년에 광동성 남해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지역의 명망있는 학자인 주차기로부터 21세까지 성리학, 양명학을 공부하였다. 주차기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 요평을 만난 것을 계기로 [[공양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과정을 지켜보면서 개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리학의 문제점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1883년부터 한 마을에서 전족을 폐지하는 시도를 한다. 고향에 사숙 만목초당을 열고 여기서 [[량치차오]] 등 제자를 배출하였고, 1895년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 개혁을 위한 상소를 꾸준히 올렸고 이로인해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결국 1897년 [[독일 제국]]의 [[키아우초우]] 점령 사건 등으로 청나라의 주권에 상당한 위협이 가해지게 되자,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직접 캉유웨이를 정권에 적극 등용하면서 개혁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이다. 캉유웨이는 행정제도의 개편, 군사력 증강, 과거 제도의 혁명과 북경 대학을 포함한 신 교육 기관들을 도입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의 사상적인 면, 즉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과 같은 공교주의에 치우친 측면으로 인해 조야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했고 1898년 7월 [[광서제]]가 [[서태후]]의 재가 없이 수구파 대신을 숙청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서 1898년 9월 21일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들이 일으킨 [[무술정변]]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광서제는 유폐되고,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와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고 평등주의를 기저로 한 이상을 제창하는 대동서를 작성한다. 대동서의 주장들은 다소 파격적이었는데, 민주적으로 임명된 중앙정부와, 자치하는 지방 정부를 포함한 행정제도 개혁, 성평등을 강화하고, 일종의 사회주의에 가까운 경제제도를 주장했다. 하지만 천년에 걸쳐 백인과 황인이 아닌 유색인종들을 점진적으로 우월한 인종으로 교체해야 한다며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1903년부터 캉유웨이는 일본에서 화교들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는 회사를 창립한다. 하지만 보황회 등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성장한 혁명파와 대립을 하게 된다. 1913년에 중국으로 돌아오나, 이미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어 그의 입지는 확실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1914년 [[위안스카이]]의 제제 운동에 반대하며 [[선통제]]를 복위시키려는 복벽운동을 일으켰으나 당시 중국은 이미 혁명파와 군벌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의 공교주의 사상 또한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16년 위안스카이에게서 [[호국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량치차오를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1917년 [[장훈복벽]]에 참여하여 선통제 복위를 또 다시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말년에는 중국 문화 보존활동에 힘쓰다가 1927년 [[칭다오]]에서 사망한다. == 저서 ==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1891) 《춘추동씨학(春秋董氏學)》(1987)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1898) 《논어주(論語注)》(1902) 《맹자미(孟子微)》(1901) 《대동서(大同書)》(1902) == 사후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시(靑島市)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했다. --[[부관참시|죽고 나서 40여년 후에 참수형을 당한 셈.]]-- 이후 행적이 불명해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 여담 == [[유학자]]이자 반동적 복벽파이긴 했지만 의외로 [[반자본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와 기술주의[* 적극적인 기술 발전을 지지하는 사상. 그는 기술 발전이 인민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 것이며,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대 개념으로는 [[반기술주의]]가 있다.]를 지지한 인물이였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와 철학, 정치 시스템을 지지한 [[보수주의]]자이자, 동시에 자본주의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해 [[유교 사회주의|유교적 이상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지지한 독특한 인물이였다. 유교와 개화를 타협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박은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산청군]]에 있는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3413800510000|배산서원]]에는 캉유웨이의 친필을 새긴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21503&ccbaKdcd=31&ccbaAsno=00510000&ccbaCtcd=38|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배산서원을 다시 세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418|진암 이병헌]]이 그의 공교운동을 도입하려 하면서 잠시나마 이곳이 국내 공교운동의 지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