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캄보디아)] [include(틀:동남아시아의 역사)] [Include(틀:캄보디아의 역사)] ||[youtube(gDzetT1yo8U)]|| || 캄보디아의 역사. || [[캄보디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목차] == 선사 시대 == 바탐방의 랑 스페안(Laang Spean) 동굴에서 출토된 석기 유물 분석에 따르면 캄보디아에는 적어도 71,000년 전(BP)부터 인류 또는 고인류가 살고 있었다. 기원전 1,300년쯤부터 남은 유물에는 [[신석기 시대]]의 흔적이 보이고, 삼롱 센(Samrong Sen)의 마제석기 유물 및 청동기 유물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에 만들어졌다. 품 스나이(Phum Snay) 고분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캄보디아에 청동기 정주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서에 기원후 1세기부터 6세기 부남(扶南)이라는 나라가 캄보디아 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고학에 따르면 부남은 서로는 인도, 동북으로는 홍강 델타 지역과 교역을 해왔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 고대: [[부남]], [[진랍]], [[크메르 왕국]] == '''역사적으로 정말 굴곡이 많은 나라이다.'''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2,000년 전 [[부남]](រភ្នំ, 푸난, 扶南)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프놈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고, 상업으로 잘 나갔으나 비교적 내륙 쪽에서 시작된 [[진랍]](ចេនឡា, 쩐라, 眞臘) 왕국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이후 부남을 밀어냈으며, 이때부터 확실한 크메르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8세기 쩬라는 내륙의 육진랍(陸眞臘)과 바닷가의 수진랍(水眞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수진랍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게 시달리곤 했으며, 아예 자바에게 복속되기도 했다. 그러다 9세기에 자야바르만 2세(ជ័យវរ្ម័នទី២)가 자바로부터 독립한 후 육진랍까지 통합해 9세기 앙코르 왕조 크메르 왕국이 세워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6px-Map-of-southeast-asia_900_CE.pn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40859d2938c2b72cefa40caefa0d9e0.jpg|width=894]] 이렇게 세워진 크메르 왕국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호령하는 왕국이었고, 특히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 및 자야바르만 7세(1181~1218)의 치세가 황금기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정복전쟁을 거듭하여 현재의 태국, 라오스, 베트남 남쪽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넓혔다. 캄보디아의 대명사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들도 이 시기 세워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는데 금과 보석으로 도배를 했다는 중국 사신 주달관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자야바르만 7세는 영토 곳곳에 역참과 병원을 짓는 등 인프라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사찰들을 지으면서 13세기에 국력이 좀 약화되는 듯 하다가, 왕위 쟁탈전이 심해졌고, 동시에 [[태국]](씨암)에서 일어난 아유타야 왕국이 1351년에 크메르 제국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면서 점차 쇠락했다. 2년 후에는 크메르 황실의 지원을 받던 파 응움 왕이 위성국가인 [[라오스]](란쌍)을 자립시켰으며, 제국이 기울어 가게 되자 잘 가꾸어진 관개 시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자연 속에 묻혀졌다. 이런 식으로 지금의 캄보디아는 코친차이나, 타이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상실했다. 결정적으로 1431년 태국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가 대파되어 역병이 들끓는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함으로써 크메르 제국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후 폐도(廢都)가 된 앙코르는 밀림 속에서 관리가 안 된 채로 처박혔고, 주변 토착민들이나 아는 곳이 되었다가 후대 프랑스인 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중세: 후기 크메르 왕국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Khmer+empire+at+war+with+Thai.jpg]]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크메르 왕국]]은 16세기까진 여전히 강국으로서 란상왕국, 아유타야, 베트남 레왕조 등과 동등했으나, 같은 시기 내부에서부터 썩어가면서 캄보디아는 '''암흑시대로 일컬어질 정도로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서양 학계에서는 아예 후기 크메르 시기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앙코르 천도 후 크메르는 몇 군데를 거쳐서 짝독목(현재 수도인 [[프놈펜]])까지 천도했다. 이중에 그나마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가 프놈펜 서북부의 껌뽕짬 성에 있는 우동이라는 도시이다. 앙코르나 웬만한 관광코스를 다 둘러보고 어딘가 좀 더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설상가상으로 침공하러 온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두 장군을 역관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조공을 보내느라 국고가 바닥이 나버렸다. 1593년에 미얀마의 따웅우 왕조가 아유타야를 침략하자, 오히려 아유타야는 화풀이 겸 세력 과시를 위해 크메르를 침략했다. 그러나 속부터 썩어 온 크메르군은 아유타야에 변변한 대응조차 못한 채 점차 무너졌고, 사실상 아유타야의 속국 취급을 받았다. 그러자 크메르의 지배층은 '이이제이' 수법을 이용해 [[필리핀]]의 [[스페인인]]이나 [[마카오]]의 [[포르투갈인]] [[용병]]을 고용해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신묘한 코끼리술로 전멸하고 만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무역으로 먹고살긴 했으며, 내륙의 수도 프놈펜보단 바닷가의 [[호치민시|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1620년에 베트남 레왕조로부터 구원군을 불러다가 아유타야를 몰아내도록 했으나, 남한테 도움만 받는 습관이 독이 되어 왕정은 베트남에게 간섭만 당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태국과 더불어 캄보디아 전토를 집어삼키려 든 베트남까지 끌어들이는 꼴만 되고 말았다.''' 17세기부터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응우옌 씨]]가 [[참파]]를 병탄하고 추가적인 세력확장을 위해 캄보디아에 쳐들어왔다. 마침 캄보디아의 내분과 캄보디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의 협조가 겹치면서 응우옌 씨는 코친차이나를 점령했다. 지금의 [[호치민시]](구 사이공)를 비롯한 베트남 남부가 원래는 캄보디아의 남부 땅이었다. 더불어 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 서남부 해안지대까지 빼앗는다. 그리고 태국도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엄리업 지역을 뜯어갔다. 마침 캄보디아가 혼란에 빠지자 1772년엔 프놈펜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거의 속국 수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태국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속국도 되었으며, 더 나아가 베트남에 의하여 꼭두각시 여왕인 [[앙 메이]]가 세워져 심지어 진서성(鎭西城:쩐떠이성), 프놈펜은 진서부(鎭西府:쩐떠이부)라는 이름을 들고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인의 봉기와 합쳐서 태국이 베트남을 몰아내고 다시 캄보디아를 속국처럼 만들었다. 결국 캄보디아는 태국에는 1년, 베트남에는 3년에 한번씩 조공을 하는 속국~~셔틀~~이 되어 완전히 종속되었으며 '''더 나아가 태국과 베트남은 메콩강(구룡강)을 경계로 캄보디아를 분할하자고 꾸미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가뜩이나 철천지 원수인 [[태국]]과 [[베트남]] 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것. 특히 남부 베트남에서는 원주민이었으나 월족에게 밀려나 버렸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중국 남부의 [[광둥성]]에서 기원한 월족이 남하하면서 참파와 크메르인을 밀어내고 개척해오는 역사다. 서쪽과 북쪽은 태국이, 동쪽과 남쪽은 베트남이 호시탐탐 노리고 국력이 발달치 못하였으며 캄보디아 내부의 결속은 친태파와 친월파의 왕위계승 싸움으로 혼란하여 양국이 내정을 간섭하다 못해 걸핏하면 충돌하고 땅까지 삥뜯었으니 이러한 정세가 이어졌다면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에 분할되어 멸망, 아예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참파]]나 19세기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와 독일의 속령이 된 [[폴란드]]처럼 지도에서 사라져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 근현대: 프랑스 식민 시기와 독립 == 그런데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반대로 태국&베트남 입장에서는 천재지변. '''바로 프랑스의 동남아 침략 및 식민지 건설'''.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자진하여''' 프랑스에 보호를 청하게 된다. 캄보디아 국왕은 1853년 [[프랑스]]의 보호를 요청하는데 말이 보호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요청은 태국에 의해 좌절되었다가, 1863년 다시 보호를 요청해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옆나라 [[태국]]에게서 시엠렙 땅을 좀 뜯어서 캄보디아에게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베트남으로부터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뺏어서 캄보디아에 돌려주었다. '''[[저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프랑스의 개입으로 캄보디아는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절반 가량의 영토를 되찾았다]]'''. 물론 프랑스가 캄보디아 영토를 불려준 것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서 였고, 프랑스는 캄보디아인들 자체는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면서 친불 [[베트남인]] 부역자에게 통치를 맡기기도 하였다. 식민 통치가 통치이니만큼 마냥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캄보디아라는 국가 정체성을 보전할 수 있었던 건 확실하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동네였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당국이 실망해서 캄보디아보다는 좀 더 삥뜯을 거리가 많은 [[베트남]] 개발에 더 집중하면서 캄보디아엔 별다른 개발도, 투자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철도]]가 좀 깔린다거나 길이 좀 생기는 수준에 그쳐 전 국민 중 95%가 빈농으로 남았다. 교육 수준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귀족]]들은 그래도 여러 고급 교육을 받았지만, [[평민]]들은 단순한 [[불교]] 교육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1930년대]]까지도 캄보디아는 국민의 95% 가량이 가난한 [[농부]]나 [[어부]]인 나라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캄보디아는 [[고무]]와 [[옥수수]] 재배지가 되었으나, 이마저도 '''[[대공황]] 이후 또 망했다'''. 또한, 아직 [[캄보디아 국왕|군주]]가 남아 있어 완전히 나라가 망했다기에도 애매하였고, 교육 수준도 심히 낮았던 캄보디아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편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캄보디아 사람들이 '조용하고 평화롭던' 프랑스 통치시절을 그리워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관심을 별로 가지지 않았다보니 착취 또한 덜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가 있으며, 식민지 때 상당기간 동안 어떠한 전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위와 같은 조용한 평화가 오히려 캄보디아의 진보를 가로막아 비극적인 역사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인지 프랑스는 물론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지식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았으나, 도시의 엘리트 중심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 모두를 일본이 점령했기 때문에 캄보디아도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가 일본이 [[1945년]]에 패망하면서 철수하였고, 이어 1953년에 캄보디아 왕국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캄보디아]] 및 [[캄보디아 왕국(괴뢰국)]] 참조. == [[캄보디아 제1왕국|캄보디아 왕국 (1953~1970)]]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캄보디아 제1왕국)] == [[크메르 공화국]] (1970~1975)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크메르 공화국)] == [[크메르 루주]]의 지배 (1975~1979) == [include(틀:폴 포트)]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민주 캄푸치아)] == 베트남 통치와 캄보디아 내전 (1979~1993) == [[파일:캄푸치아 인민공화국 국기.svg|width=200]]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국기 (1979~1989) [[파일:캄보디아국 국기.svg|width=200]] [[캄보디아국]] 국기 (1989~199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Cambodia_under_UNTAC.svg.png]] UN 통치기구 "[[UNTAC]]" 기 (1992~1993). [[유엔|UN]]기의 색상에 UN 로고 대신 캄보디아의 국토 형상과 크메르어 국명을 넣었다. 19세기에 수십년간 베트남에게 가혹한 민족말살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있어서 베트남에 대한 감정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감정과 별도로 1940년대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나타난 공산주의자들은 먼저 형성된 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지도와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크메르 루주와 북베트남은 같은 공산주의 정권으로서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해 싸우는 혈맹이었고, 북베트남은 크메르 루주 덕분에 캄보디아를 우회한 경로를 적극 활용하여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베트남 공산당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캄보디아보다 훨씬 인구와 국력이 강했던 베트남은, 과거 프랑스 제국주의에게 빼았겼던 캄보디아가 원래 자기들의 땅(식민지)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친 베트남 공산정권은 자연스레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다시 종속시키려 했다. 베트남은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를 아우르는 공산주의 연방을 형성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은 스스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지도국을 자처하며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지배하려 했다. 이에 크메르 루주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위기감과 반감이 커져갔다. 베트남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인 1974년부터 북베트남과 크메르 루주의 갈등은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이미 역사적 앙금과 이에 따른 국경 문제가 첨예했던 상황에서 크메르 루주는 과거 베트남이 빼앗아간 고토를 돌려달라고 주장했고, 이에 양국간 국경 분쟁과 국지전이 발생했다. 아직 베트남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던 터라 당시 북베트남은 크메르 루주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국경 영토를 크메르 루주에 양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6년 베트남 완전 통일이 완료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베트남은 노골적으로 캄보디아에서 영향을 확대해 나가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단 친중 성향의 크메르 루주 지도부를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베트남은 소련 외교부에 친중계 크메르 루주 지도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지배하기 위해서 베트남 공산당 요인이 직접 캄보디아와 라오스 정권에 참여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에 참여했던 크메르 루주 군을 캄보디아로 돌려보내 크메르 루주에서 베트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에서 귀국한 대원들을 모두 숙청했다. 크메르 루주 내부에서는 베트남과의 역사적 악감정에 따른 강경파와 양국의 국력차가 현저했기에 굴욕적이지만 베트남과 종속관계를 어느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온건파가 있었고, 이에 양국간 수차례 회담이 오가면서 동시에 국경지대 국지전도 이어졌다. 하지만 1977년 6월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비무장 지대를 만들자는 캄보디아의 제안을 베트남이 거부하면서 회담은 결렬되었고, 크메르 루주 내에서 강경파가 다시 득세했고, 캄보디아군은 다시 베트남의 국경지대에서 도발을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급격히 친중으로 기울었다. 이에 캄보디아의 요청을 받은 중국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갈등을 중재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이 나서자 오히려 베트남이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베트남은 1977년 12월 캄보디아를 전격 침공, 수도 프놈펜 38km지점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베트남의 무력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에 베트남은 이쯤 했으면 캄보디아가 알아서 굴복할 것이라 여기고 1978년 1월 철군했다. 하지만 베트남이 자진 철군하자 크메르 루주는 오히려 베트남 물리쳤다고 선전하였으며, 침략자 베트남은 미국 제국주의 승냥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맹비난하며 국내 여론을 결집시켰다. 양국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1978년 12월 22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은 약15만의 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남동 지역에서 서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해나갔으며 17일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과거 식민지배를 당했던 베트남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 정권의 막장 짓거리에 시달렸기에 베트남군을 환영해주기도 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태국]]의 국경 지대로 도주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과 소련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베트남의 무력 침공으로 세워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베트남, 소련 등 일부 공산국가들을 제외하면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불법정권'으로 간주되었고 국제사회의 원조도 끊어졌다. 한편 태국 국경 지대에서 크메르 루주는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다른 나라들과 합의하여 타이 국경지대를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게릴라전을 하였다. 국제 사회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기에 크메르 루주는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캄보디아의 '유일 합법정권'으로 간주되었지만 태국 국경지대를 벗어나 괴뢰국을 전복시킬 힘은 없었다. [[파일:external/www.aboutasiatravel.com/mines-ordinance.jpg]] 캄보디아의 지뢰와 불발탄 현황. 동북부의 진한 빨간색 점이 지뢰 지대이다. 덤으로 오른쪽 아래의 빨갛고 노란 곳은 미군이 폭격을 하여 언제 불발탄이 터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 이 시절 크메르 루주는 방어를 위해서 태국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 대규모로 [[지뢰]]를 매설했고,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타이 국경과 가까운 반떼이멘쩨이, 웃더멘쩨이 지역에는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지뢰가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너무 많고 캄보디아의 경제상황도 막장이라 지금도 지뢰 제거는 요원한 상황이다. 지뢰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한 유적지도 많다. 2015년 기준 대부분의 민가지역과 유적지는 지뢰가 제거되어 일상생활과 관광에는 문제가 없다. 이 덕분(?)인지 캄보디아의 지뢰 및 불발탄 처리 기술은 국력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하도 많은 지뢰를 찾다 보니 그만큼 노하우도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은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세운 뒤,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한 헹삼린이나 [[훈 센]]이 지도자가 되었다. 앞에 설명했듯 크메르 루주는 일단 게릴라전을 벌였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15만여 명의 [[베트남군]]을 주둔시켰으며, 캄보디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한편 베트남이 친중 성향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전복시키자 분노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중월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고문관]]을 파견하거나 베트남인을 이주시키곤 했다. 이에 시아누크 전 국왕은 아들 라나리드와 1981년에 '민족통일전선(FUNCINPEC, 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조직(Front uni national pour un Cambodge indépendant, neutre, pacifique et coopératif)의 불어 약자)'을, 손 산(1911~2000) 전 총리는 1979년에 반베트남/반공성향 조직 '크메르인민국가해방전선(KPNLF, Khmer People's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각각 결성해 괴뢰정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제재당한 베트남은 동구권 붕괴와 캄보디아의 자치능력 형성을 이유로 결국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1989년 4월 30일에 국호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서 '크메르국'으로 바꾸고 FUNCINPEC, 크메르 루주, KPNLF 3개 조직의 논의 하에 제한적인 체제전환을 시도했다. 결국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또한 캄보디아 인민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인민당은 현재의 캄보디아 인민당은 동구권의 공산당 후신 정당들과는 달리, 특별히 지향하는 이념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1992년에 UN에 의한 '유엔 과도통치기구(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UNTAC))'라는 과도 통치를 거쳐 [[1993년]] 9월 왕정이 복고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던 나라중 유일하게 1992년 이후에 무너져, 2020년 현재 기준으로는 가장 최근에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나라다. 1993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첫 총선에서는 왕정주의적 정당인 훈신펙(គណបក្សហ៊្វុនស៊ិនប៉ិច)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캄보디아 인민당이 뒤를 이었다. 훈신펙의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제1총리, 인민당의 훈 센이 제2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쿠데타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란했으며 양 계파 사이 충돌이 일어났다. 1997년 [[훈센]]과 노로돔 라나리드 총리 사이 무력충돌 사태가 일어나 결국 라나리드는 축출되었다. == 캄보디아 왕국 (1993~현재) == 1998년, 크메르 루주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캄보디아 서북부의 한적한 마을 안롱벵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어서 지도자였던 [[키우 삼판]]과 이엥 사리가 훈 센 정부에 항복하였고 따목만이 크메르 루주 지도자로 남았었으나, 이 역시 다음해인 99년 항복하여 크메르 루주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재구성되어 망명중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맞아들여 정식 [[국왕]]으로 모시는 대신 실권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하는 형태로 [[왕정복고]]했다. 현재는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UN의 도움에 힘입어 ECCC라는 간판을 걸고 08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http://www.eccc.gov.kh/en/|#]] 크메르 루주 재판 및 처리에 대한 건 [[크메르 루주]] 문서를 참고할 것. 한편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1977년 폴 포트에 반대해 캄보디아를 탈출한 후 베트남 괴뢰 정권의 지도자로 있던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 센]] 총리가 1997년부터 집권을 시작했다. 그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독재자란 평이 우세하다만 어쨌든 캄보디아 국내에선 경제도 살아나고 정치도 옛날보단 아주 안정된지라 지지받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2009년 그는 캄보디아를 독재정권이라 부르면 [[너 고소|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으며, 또한 부자세습을 추진하고 있다. ~~독재 맞네~~ 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가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68196|2012년 10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노로돔 시아모니]]가 뒤를 이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3&aid=0003410538|#]]캄보디아 전범재판소(ECCC) 대법원이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킬링필드’를 집단학살로 인정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1979년 붕괴한 지 40여년 만이다. 2021년에 캄보디아에서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도입할려고 하자 논란을 빚고 있고,[[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2210364|#]] 6월에는 수질 오염을 비판하던 '마더 네이처 캄보디아' 소속의 청년 환경운동가들이 왕실 모독죄로 검찰에 기소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32&aid=0003081293|#]] 캄보디아 집권당이 훈센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을 차기 총리 후보로 승인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2803635|#]] 2023년 8월 22일 훈 센이 사임하고 [[훈 마넷]]이 차기 총리가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송서)] [include(틀:양서)] [include(틀:수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북사)]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캄보디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