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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5d85c ''' 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e5d85c 베니스 영화제}}}]] ''' }}} || ||<-5> [[파일:goldenlion.png|width=180]] || ||<-5> [[베니스 국제 영화제/황금사자상|{{{#E5D85C '''황금사자상'''}}}]] || || ''' 제15회[br] ([[1954년]]) ''' || {{{+1 → }}} || ''' 제16회[br] ([[1955년]]) ''' || {{{+1 → }}} || ''' 제17회[br] ([[1956년]]) ''' || || 레나토 카스텔라니[br] ([[로미오와 줄리엣]]) || {{{+1 → }}} ||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br] (오데트)''' || {{{+1 → }}} || 수상작 없음[* 심사위원들이 이치카와 곤 감독의 <버마의 하프>와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 감독의 <마요르 가> 사이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해 1956년 황금사자상은 공석이 되었다.] || ||<-5> || ||<-10>
{{{#efd88f ''' {{{+2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 }}}[br]'''{{{#efd88f Carl Theodor Dreyer}}}''' || ||<-2>[[파일:Carl-Theodor-Dreyer.png|width=100%]]|| || '''{{{#white 본명}}}''' ||Carl Theodor Dreyer (칼 티오도어 드라이어)|| || '''{{{#white 국적}}}''' ||[[덴마크]]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27]]|| || '''{{{#white 출생}}}''' ||[[1889년]] [[2월 3일]]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27]] [[덴마크]] [[코펜하겐]]|| || '''{{{#white 사망}}}''' ||[[1968년]] [[3월 20일]]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27]] 덴마크 코펜하겐|| || '''{{{#white 직업}}}''' ||[[감독]]|| || '''{{{#white 영화 데뷔}}}''' ||1919년, '재판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수난]]>, <뱀파이어>, <오데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영화감독이다. == 소개 == 덴마크인 지주와 스웨덴인 가정부 사이의 숨겨진 사생아였던 드레이어는 태어나서부터 위탁가정과 고아원을 전전했다. 2살이 되기 전 마침내 어느 식자공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양부의 이름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덴마크에서는 시니어, 주니어로 구분하지 않으므로 완전히 같은 이름이다. 입양 이전 코펜하겐에 등록된 이름은 칼 닐센(Karl Nielsen)이었다.] 한편 또 한 번 임신 중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성냥머리를 한가득 삼켜 낙태를 시도했으나 유황중독으로 사망했다. 부검을 통해 자살이 아님이 밝혀지자 교회묘지에 매장될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양부모의 가정 교육은 비종교적이었다. 양부와의 관계는 좋았으나 양모를 견딜 수 없었다. 양부모는 드레이어에게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친모가 입양 당시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고 죽어 버렸으니 그에게 아무 권리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는 외롭고 무뚝뚝하며 울분에 찬 소년이었으나 그가 전학한 사립학교의 급우들은 그에 대해 지적이며 가시 돋친, 역설적인 재치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1904년 졸업시험을 치른 후 그는 양부모를 떠났고 다시는 그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훗날 양모가 사망했을 때, 그에게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 이름조차 듣기를 거부했다.] 드레이어는 학교를 졸업한 뒤 신문 기자가 되어 활동했으나, 곧 영화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노르디스크 필름]]에 입사하여 편집자 등을 거쳐 1919년 <재판장>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1925년 그가 만든 <집안의 주인>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들은 드레이어에게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오게 된다. 제작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잔 다르크]] 중 한 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드레이어가 선택한 것은 잔 다르크였다. 주연 배우를 찾는 데 고난을 겪던 드레이어는 우연히 들어간 극장에서 연극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를 보게 되고, 그녀를 주연으로 낙점한다. 그렇게 드레이어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화려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들게 된다.[* 프랑스의 유명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도 제작에 참여했으며, 그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오늘날 평가받는 것에 비해 그닥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드레이어는 4년 동안 신작을 만들지 못했다. 1932년 그는 니콜라스 드 군즈버그라는 귀족에게 투자를 받아 부분 유성 영화인 <뱀파이어>를 만든다. 이 이후 극단적인 과작의 경력이 시작된다. 1943년 덴마크가 나치 점령하에 있던 시절, 드레이어는 약 10년만에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여 <분노의 날>을 내놓는다. 이 작품부터 황량한 롱테이크, 음울한 주제, 종교적 테마 등으로 대표되는 드레이어의 후기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2년 후 드레이어는 <두 사람>이라는 영화를 스웨덴에서 찍었는데, 훗날 그는 이 작품을 부정했다. 드레이어의 전성기는 전쟁 이후에 찾아온다. 시네마테크의 활성화로 고전, 특히 무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자 그의 영화도 덩달아 재평가받았고 1955년 <오데트>[* 덴마크어로 '말(word)'라는 뜻이다.]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정점을 찍었다. 드레이어는 1964년 <게르트루드>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드레이어는 자신의 후기 양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는데 대다수 롱테이크는 5분이 넘을 정도이고, 배우들은 극도로 절제된 연기를 선보인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이유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당히 상반되는 평을 받았으며 일부에게는 야유까지 받을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호불호가 좀 갈리는 편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호평받는 편이다. 2022년에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실시한 위대한 영화 투표]]에선 48위를 차지했다.] 그는 이후에 예수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를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작품은 드레이어 최초의 컬러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 기타 == 자신의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때문인지 작중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해 동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등과 함께 초기 페미니스트 영화감독으로 언급되곤 한다. 비록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이유로 여성주의 평론계에서도 상당히 각광받는 편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주류적 형식과는 거리를 둔 편이다. 초기작에서의 실험적 몽타주 기법, 극단적 클로즈업이나 후기작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롱테이크 등등이 대표적인 편이며, 경력 동안 전반적으로 180도 법칙을 거부한 것도 특징으로 지적된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고루 거장으로 추앙받았으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또한 드레이어의 작품[* 특히 <게르트루드>]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동향 출신인 [[라스 폰 트리에]]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 드레이어가 생전에 입던 양복을 구해서 입고 다녔다는 썰이 있다.] 여담으로 [[야마모토 유타카]]도 드레이어의 팬인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어의 <오데트>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스튜디오 [[Ordet]]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 작품 == * <재판장> (1919) * <마녀> (1920) * <사탄의 책> (1921) * <서로 사랑하라> (1922) * <옛날 옛적에> (1922) * <미카엘> (1924) * <집안의 주인> (1925) * <글롬달의 신부> (1926) * <[[잔 다르크의 수난]]> (1928) * <뱀파이어> (1932) * <분노의 날> (1943) * <두 사람> (1945) * <오데트> (1955) * <게르트루드> (1962) [[분류:1889년 출생]][[분류:1919년 데뷔]][[분류:1968년 사망]][[분류:덴마크의 그래픽 디자이너]][[분류:덴마크 남배우]][[분류:덴마크의 남성 기자]][[분류:덴마크의 남성 방송인]][[분류:덴마크의 남성 작가]][[분류:덴마크의 다큐멘터리 감독]][[분류:덴마크의 다큐멘터리 작가]][[분류:덴마크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분류:덴마크의 다큐멘터리 편집자]][[분류:덴마크의 미술 감독]][[분류:덴마크의 방송 작가]][[분류:덴마크의 영화 각본가]][[분류:덴마크의 영화 감독]][[분류:덴마크의 영화 제작자]][[분류:덴마크의 영화 편집자]][[분류:스웨덴계 덴마크인]][[분류:코펜하겐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