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미우리 자이언츠/간략(코칭스태프))] ---- [include(틀:일반사단법인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역대 이사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카와이 마사히로 코치.jpg|width=100%]]}}} || ||<-2> '''{{{#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 78}}}''' || ||<-2> '''{{{#ffffff {{{+2 카와이 마사히로}}} [br] 川相昌弘 | Masahiro Kawai}}}''' || || '''{{{#fff 생년월일}}}''' ||[[1964년]] [[9월 27일]] ([age(1964-09-27)]세) || || '''{{{#fff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fff 출신지}}}'''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미나미구(오카야마)|미나미구]] || || '''{{{#fff 포지션}}}''' ||'''[[유격수]]''', [[3루수]], [[2루수]], [[외야수]] || || '''{{{#fff 투타}}}''' ||[[우투우타]] || || '''{{{#fff 체격}}}''' ||176cm, 75kg || || '''{{{#fff 프로 입단}}}''' ||1982년 드래프트 4위 || || '''{{{#fff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3~2003)''' [br] [[주니치 드래곤즈]] (2004~2006) || || '''{{{#fff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07~2009) [br]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 (2010)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 (2011~2012)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수석코치 (2013~2015)[* 이 시기에 2014년~2015년의 일부 경기 한정으로 결장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을 대신하여 감독대행으로 지휘를 맡았으며, 2015년 시즌 도중에 내야수비·주루코치였던 [[스구로 히로노리]]를 대신하여(스구로는 벤치 담당으로 전환) 3루 베이스 코치를 맡기도 했다.]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 (2016~2017)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 (2018)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팜 총감독 (2022)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합코치 (2023)[br]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야수비코치 (2024~)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야수비코치. 선수 시절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60번(1984~1988) - 0번(1989~1999) - 6번(2000~2003),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는 같은 [[유격수]]인 [[우노 마사루]]가 달았던 7번을 2006년 은퇴 때까지 사용했다. 카와이의 은퇴후엔 [[이병규(1974)|이병규]]가 7번을 이어받았다. == 선수 시절 == ||
[[파일:카와이 마사히로 번트.jpg]] ||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가장 이상적인 [[테이블 세터|2번 타자]]로 유명했으며, 별명은 '''[[번트]]의 장인.''' 별명답게 팀내에서는 주로 1번 타자가 출루하면 번트를 쳐 자신이 아웃되더라도 1루에 있는 1번타자를 2루로 출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교진군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1번타자 [[시노즈카 카즈노리]]나 오가타 코이치[* 緒方 耕一. 2015~201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을 역임한 [[오가타 고이치]](緒方孝市)와는 이름만 비슷한 별개의 인물이다. 1990, 1993년 센트럴리그 도루왕을 수상했다.]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카와이가 2번타자로 나와서 번트로 선두타자를 진루시키는 방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인지 23년간의 긴 현역 생활을 보내면서 '''통산 타율 .266(4512타수 1199안타), 43홈런 322타점, 47도루[* 홈런이야 수비형 [[유격수]]였다는 플레이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쳐도 [[테이블 세터]]로써는 도루 수가 꽤나 적었다. 선수 생활 동안 2자릿수 도루를 1번도 기록한 적이 없으며 도루자도 36회로 통산 도루성공률 역시 56.6%에 불과하다. 다만 홈런은 풀타임 0홈런 시즌도 있어서 그랬지 1990년에 규정타석을 살짝 넘기고도 9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의외의 장타력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에 불과한 비교적 초라한 타격 성적을 기록했지만 출중한 수비력, 작전 수행력을 앞장세워서 1990년대 중후반까지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1991년 시즌에는 66희생타로 당시 희생타 일본기록을 세웠으며[* 이후 2001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미야모토 신야]]가 67희생타로 일본 신기록 겸 1917년 [[레이 채프먼]]이 기록한 [[메이저리그]] 최다 희생타와 타이 기록을 세웠다.] 2003년에는 통산 512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며 '''통산 희생타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전까지의 세계 기록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에디 콜린스]]가 기록한 511희생타였다.] 1999년 이후 강타자 [[니오카 토모히로]]에게 주전 [[유격수]]를 넘기고 주로 [[대수비]]로 나왔지만, 간혹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방식으로 희생타 수를 늘렸다. 이후 요미우리 구단과의 불화로 인해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였고, 최종적으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총 53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희생타 기록 이외에도 수비에도 능하여, [[골든글러브(일본프로야구)|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무려 6차례나 수상하였다.(1989~1991, 1993~1994, 1996) 그것도 1980~90년대에 [[노무라 켄지로]], [[이케야마 타카히로]], [[이시이 타쿠로]] 등 공수를 겸비한 거물 유격수들 사이에서 타낸 상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단짝 2루수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와의 [[키스톤 콤비]]는 지금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상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고 있다. 상술했듯 타격에선 크게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햇으나, 딱 한 번 전경기 출장+규정타석 3할 타율(.302 0홈런[* [[10.8 결전]]에서 백스크린을 맟추는 타구를 날렸는데, 이 타구가 홈런이 아닌 3루타로 판정되면서 결국 이 시즌엔 무홈런에 그쳤다.] 33타점 OPS .733)을 기록한 1994년엔 팀의 우승 버프([[10.8 결전]]이 있던 해였다)도 적절히 받으며 커리어 유일의 유격수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 지도자 경력 == 은퇴 후, 2007 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수비코치를 맡았다가 2011년부터 자신의 친정팀 요미우리의 코치, 그것도 2군 감독으로 돌아왔다. 2003년에 한 번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고 2004년에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와는 등을 돌렸던 상태였다. 사실 2003년에도 현역 계속의 의지가 있었으나 팀 편성상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인간관계를 동원한 집요한 설득으로 "그래, 이것도 팀을 위한 길"이라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막상 결심하자마자 은퇴를 결심하게 한 하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만 떠넘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프런트의 행태에 반발하여 은퇴를 번복하고 주니치로 이적해서 3년을 더 뛰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이미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기로 한 순간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는 물건너가고]][* 요미우리 퇴단 이 후 다른 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감독이 된 케이스는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 심정적으로는 거의 요미우리하고 등을 돌린 상태였으나 결국 하라 감독도 다시 감독자리에 복귀했고 세월이 지난 동안 서로 앙금은 풀린 듯하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1군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오프에 하라 감독이 용퇴하자 감독직 승격이 점쳐졌으나,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은퇴 후 감독에 취임하면서 1군 감독설을 카더라로 돌아갔다. 이후 2016~2017년에 3군 감독, 2018년에 2군 감독을 역임했다가 시즌 후 구단에서 퇴단해 2019~2021년엔 야구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22년 이해부터 신설된 팜 총감독으로 부임하며 4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팜 총감독은 2~3군의 총괄 책임자와 비슷한 직책으로써 직접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닌, 코치와는 별도로 선수들에게 조언과 지도를 하는 직책이며 이 때문에 등번호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2023년부턴 [[쿠와타 마스미]]에게 팜 총감독을 넘겨주고 1군 종합코치로 전임하며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종합코치 전임과 함께 이전 요미우리 코치로 재임할 때 썼던 78번을 다시 등번호로 쓰게 되었다. == 기타 ==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OB선수로 나오는데 번트쪽 특능이 초특능이다. 그만큼 번트를 잘 댔던 선수. [[우노 마사루]]에 비견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노안]]이다.[* 둘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한솥밥을 먹게 된다.] 선수시절부터 동료들에게 이걸로 인해 별명이 많이 붙었으며 카와이 마사히로를 주제로 한 만화에서도 대놓고 노안으로 나올 정도다. 둘째 아들인 '''카와이 타쿠야'''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야구선수의 길을 걸었으며 2014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육성선수]] 2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1군 데뷔를 이루지 못하고 2~3군에만 머무르다가 2017년 방출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사회인야구|사회인야구]]팀 에이젝에 입단하였다가 은퇴 후 동사의 여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추가로 [[오비린대학]]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 야구부 후배로 현재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뛰고 있는 [[사사키 치하야]]가 있다.]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근면성실한 성격, 작은 체구에 순박해 보이는 외모였기 때문에 순둥이 이미지가 강했지만 의외로 [[벤치 클리어링]] 때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벤클에 가담하는 의외의 일면도 있었다. 벤클 도중에 뛰어들다가 공중 회전킥을 시전한 적도 있을 정도(...)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NPB)]]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64년 출생]][[분류:미나미구(오카야마) 출신 인물]][[분류:1983년 데뷔]][[분류:2006년 은퇴]][[분류:주니치 드래곤즈/은퇴, 이적]][[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우투우타]][[분류:내야수]][[분류:외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