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1377-004-91503CB6.jpg|width=100%]]}}} || || 왼쪽부터 [[앙리 지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샤를 드골]], [[윈스턴 처칠]] || [목차] [clearfix] == 개요 == '''Casablanca Conference''' 1943년 1월 14일에서 1월 26일까지 이어진 회담으로, 당시 [[미합중국]] [[미국 대통령|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영국 총리|총리]] [[윈스턴 처칠]], 그리고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 [[앙리 지로]] 등이 전쟁의 다음 단계를 검토하고 전략을 논의하고자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위치한 앙파 호텔에서 개최된 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다. 암호명은 SYMBOL.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도 초대받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생지옥--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의 소련이 승기를 잡았을 시점으로 독일의 6군에게 항복 권고를 보내던 때였다.] == 논의 사항 == ===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 === 이 회담에서 처음으로 '이 전쟁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통해서만 종결시킨다.'는 방침이 등장하였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 자체는 [[남북전쟁]] 시기 북군의 사령관이던 [[율리시스 그랜트]]가 처음 사용했는데, 유럽 내에서는 싸우다가 적당히 ~~쇼부~~ 협상을 통해 강화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은 널리 퍼진 용어가 아니었다.[* 당장 20년 전의 [[제1차 세계 대전]]만 하더라도 국력이 한계에 몰린 [[독일 제국]]이 [[협상국]] 측에 강화를 '제의'하면서 종전이 이루어진 것이지 항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즉 조건부 항복이었던 셈이다. 해외 식민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각종 무기개발 및 보유금지라는 사실상 고자가 되는 조건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독일 본토는 온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은 너무 굴욕적이기만 하고 각종 패널티를 안겨주기만 할뿐 독일이 가진 국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 덕분에 독일은 20년만에 다시 판을 키워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육군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베르사유 조약을 보고 '20년 짜리 휴전 조약'이라고 한탄한 것이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외교 실무 담당자들이 처음 무조건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외교관들은 '이러면 추축국 국민들의 단결은 엄청나게 강해질 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님?'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역시 [[아돌프 히틀러]]만 제거된다면 독일 측과도 손을 잡고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했다. 하지만 1차대전의 어정쩡한 종전이 2차대전을 불러왔고, 어정쩡한 종전은 결국 또다른 전쟁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는 루스벨트의 입장은 단호했고[* 덧붙여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혼자 독일과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내빼는 상황을 우려했는데 만약 무조건 항복이 연합국 모두의 강령으로 채택되면 이런 상황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결국 연합국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종전의 조건으로 결정한다. ~~애초에 [[무기대여법|물주]]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뭘 어쩔 수가 없었다.~~ === [[자유 프랑스]] 내 지도자 문제 === 자유 프랑스의 양대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과 앙리 지로 사이 가운데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문제 역시 연합군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모두 회담장으로 초빙하였지만 갈등은 여전하였고, 두 사람은 처칠과 루스벨트 앞에서도 으르렁(...)거렸다.[* 이런 분열상이 드러나는게 우려됐던 루스벨트는 강제로 두 사람에게 화해의 악수(...)를 시켰고 기자들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했지만 [[https://en.m.wikipedia.org/wiki/Casablanca_Conference#/media/File:Degaulle-freefrench.png|딱 봐도 어색한 게 드러난다]].] 사실 루스벨트는 외골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드골 대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지로를 선호하여, 그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시도했으나 처칠의 반대[* 처칠 역시도 드골을 엄청 싫어했고, 전쟁 기간 내내 드골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어쨌든 처칠은 2차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프랑스의 지도자로는 드골이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드골에게 힘을 보태주었다.]에 부딪혔고, 게다가 지로의 정치적 수완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못해서 결국 종전 무렵이 되면 자연스럽게 드골에게 힘이 집중된다. 덧붙여서 본토를 [[프랑스 침공|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회담 기간 내내 들러리 신세였고, 중요한 군사 문제를 다루는 회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당한다. === 그 외 === * 소련 측이 요구한 유럽 내 제2전선 문제도 논의되었다. 미국이 곧바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북부에 상륙 작전을 실시할 것을 선호한 반면, 영국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먼저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세력을 분산시킬 것을 주장했다. 계속된 논의 끝에 결국은 영국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시칠리아 전투|시칠리아 침공]]이 북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정리되는 대로 실시되기로 계획된다. * 유럽 전선에서 영국의 입장이 대폭 수용된 대가로 영국은 미국에게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선]]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국 함대가 태평양에 돌아온건 1944년 말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해공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 * 북아프리카 일대의 전후 독립에 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도출된 결과물은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포기할 마음이 없던 프랑스의 강경책으로 인하여 전후 북아프리카 일대는 [[알제리 전쟁|아수라장]]이 된다. * 이후 [[국민혁명군]] 참모장 겸 중국 주둔 미군의 총사령관이 된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준장 시절에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가했다. [[분류:1943년/사건사고]][[분류:제2차 세계 대전/회담]][분류:FDR 행정부]][[분류:윈스턴 처칠]][[분류:샤를 드골]][[분류:모로코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