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2>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겐츠켄1.jpg|width=100%]]}}}|||| ||<#666> {{{#FFF 이름}}} ||<(>'''Karl Edmund August Genzken'''[br] 카를 에드문트 아우구스트 겐츠켄|| ||<#666> {{{#FFF 출생}}} ||<(>[[1885년]] [[6월 8일]], [[독일 제국|독일국]] 홀스타인주 프레츠 || ||<#666> {{{#FFF 사망}}} ||<(>[[1957년]] [[10월 10일]], [[서독|독일]] 함부르크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나치 독일]]의 군의관이다. == 초기 행적 == 홀스타인 주의 프레츠에서 태어난 겐츠켄은 고등학교졸업 후 튜빙겐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91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해군에서 군의장교로 근무한 그는 잠수함 의무국에서 종군하며 빌헬름스하펜에서 근무 후 종전이 되자 고향인 프레츠로 돌아와 [[1934년]]까지 의사로 일했다. == [[나치당]] 입당 == [[1926년]] [[7월 7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겐츠켄은 [[1933년]] [[11월 5일]]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4년]]에 국방성 부속 예비사관으로 베를린 병원에서 1년간 근무한 후 [[1937년]] [[2월 1일]]에 친위대 해골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 [[생체실험]] == [[테오도어 아이케]]가 친위대 해골부대 겸 강제수용소 총감으로 취임하자 겐츠켄은 의사장이 되었다. 겐츠켄이 담당한 임무는 수용소 인원의 치료로, 명목상으론 의료행위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론 의약품을 빼돌려 사복을 채우고 유전질환 치료라는 이유로 수용소에서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1939년]] 가을부터 [[1940년]]까지 해골사단 위생부에서 일한 겐츠켄은 패전까지 [[무장친위대]] 위생부장관 겸 강제수용소 인체실험 책임자였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장티푸스 치료실험으로 [[1943년]]에 친위대 중장 및 무장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 전후 재판과 최후 == || [[파일:겐츠켄2.jpg|width=100%]] || || 재판에 회부된 겐츠켄 || 겐츠켄은 전후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1947년]] [[8월 20일]]에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54년]] [[4월 17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석방된 후 3년 후인 [[1957년]]에 사망하였다. [[분류:1885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의 의사]][[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