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유도 선수, rd1=김정행)] ||
'''김정행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ed1c24 [[롯데 자이언츠|{{{#ed1c2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 || 이석규[br](1984) || {{{+1 →}}} || '''{{{#ed1c24 김정행[br](1985~1988)}}}''' || {{{+1 →}}} || 전용권[br](1989~1991) || }}} || ||<-2> [[파일:attachment/kimjunghaeng.jpg|width=100%]] || ||<-2> '''{{{+2 카나이 마사유키}}}[br]金井正幸''' || || '''한국명''' ||김정행 (金正幸) || ||<|2> '''출생''' ||[[1952년]] [[5월 15일]] ([age(1952-05-15)]세) || ||[[일본]]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학력'''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입단''' ||1973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 ||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74~1982) [br] [[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 (1982~1984) [br] [[롯데 자이언츠]] (1985~1988) || [목차] [Clearfix] == 개요 == 주니치 드래곤즈, 롯데 오리온즈,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동한 일본 태생의 프로 야구 선수다. 한국어 이름은 김정행(金正幸).[* 참고로 [[김정행]] 문서에는 동명이인인 유도선수(전 [[용인대학교]] 총장)가 나온다(...).] 우완 오버핸드이자 182cm의 장신으로 직구는 한결같이 140km대를 마크하고 변화구는 커브, 슬라이더, 슈트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제구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 선수 경력 == === 일본프로야구 시절 === 구마모토공고 졸업 후 [[사회인야구]] 왕자제지 카스가이 팀을 거쳐 1973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 시합인 1974년 10월 14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데뷔했다. 이후 주로 원 포인트 및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하다가 1982년 시즌중에 야스기 쇼지(安木 祥二)와의 트레이드로 롯데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잠시나마 마무리투수를 하기도 했지만 위기관리능력부재([[방화범(야구)|방화]])로 다시 이듬해부터 중간계투로 보직이동을 했다. 150을 상회하는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그 능력을 잘 살리지 못한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 주니치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선배 [[호시노 센이치]]가 뒤에 주니치 감독을 맡기 전 해설가로 활동할 때 김정행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10년 동안 프로물을 먹었는데도 처음 입단때와 조금도 변한게 없는 투수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 [[롯데 자이언츠]] === 그러다 1984년 시즌 종료 후에 [[재일 한국-조선인|재일 한국인]] 신분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는데, 오랜 일본야구 경험을 안고 뛰어든 한국프로야구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구위를 보여주었지만 일본에서 중간계투로만 뛰어오다 보니 선발로 나선 한국에서 스테미너의 문제를 보여왔다.[* 지금도 선발로 200이닝을 던지면 많이 던지는 축에 속하지만 당시의 한국의 에이스들은 그정도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김정행은 4년동안 한결같이 100이닝 정도밖에 소화를 못했기 때문이다.] 1986년 6월 5일, 김정행은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당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8대 0으로 이기면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김정행은 사사구를 4개나 내줬지만 삼진 5개를 같이 잡았다. 투구수는 106구.[* 빙그레의 [[배성서]] 감독의 변명은 이랬다고 한다.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치지. 계속 볼만 던져 대니 칠 수가 있어? 볼넷만 8개잖아."''' 하지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60600209205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6-06&officeId=00020&pageNo=5&printNo=19901&publishType=00020|당시 동아일보 기사]]나 [[한국야구위원회|KBO]] 레코드북에 따르면 사사구 4개만 허용했다고 나온다. 그만큼 볼질이 심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그런데 같은 날 열린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불가리아전에서 우리나라가 [[김종부]]의 동점골로 1대 1로 비겨 16강행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각 신문이 온통 그 기사로 도배를 하는 바람에 김정행의 노히트노런은 아예 기사도 없이 제목으로만 간단히 처리당하는 비운을 겪고 만다. 김정행의 노하우를 높이 산 롯데는 [[1987년]]부터 플레잉코치로 기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 당시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과 '''사이가 너무 나빠서''' 안타깝게 무산되고 말았다.[* 김정행은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가 보여준 열성적인(혹은 과잉) 아들 관리에 대해서도 "저 사람(최윤식 씨)은 코치도 아니면서 왜 연습장에 들어와 있는거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 == 은퇴 후 == 롯데를 거쳐간 [[재일 한국-조선인|재일교포]] 투수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히는 김정행은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롯데가 코치영입을 검토했으나 1990년 [[장명부]]를 롯데 투수코치로 선임하게 되면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영입 검토만 그렇게 많이 해놓고''' 다른 사람 선임하는 건 도대체 무슨 센스인 걸까.~~ == 연도별 성적 == ||<-15> {{{#ffffff 역대 기록}}}[* [[KBO 리그|KBO]]에서의 성적만 기입.]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 1985 ||<|4> [[롯데 자이언츠|롯데]] || 19 || 115⅓ || 7 || 5 || 0 || - || 2.73 || 103 || 6 || 54 || 4 || 55 || 1.36 || || 1986 || 20 || 118 || 7 || 7 || 0 || - || 2.90 || 94 || 5 || 61 || 7 || 51 || 1.31 || || 1987 || 17 || 102 || 6 || 5 || 0 || - || 3.62 || 95 || 3 || 41 || 1 || 46 || 1.33 || || 1988 || 15 || 94 || 8 || 4 || 0 || - || 3.64 || 82 || 3 || 50 || 3 || 29 || 1.40 || ||<-2> '''[[KBO 리그|{{{#0275d8 KBO}}}]] 통산''' [br] (4시즌) || 71 || 429⅓ || 28 || 21 || 0 || - || 3.19 || 374 || 17 || 206 || 15 || 181 || 1.35 ||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NPB)]] * [[야구 관련 인물(KBO)]]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1952년 출생]][[분류:타마나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의 노히트 노런 달성자]][[분류:롯데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인물]][[분류:1988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