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37호 ||<|2> ← || '''138호''' ||<|2> → || 139호 || || [[십장생#s-1.1|십장생도]] || '''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 || [[삼국지연의도]]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8호}}}]]''' || ||<-2> {{{#fff {{{+1 '''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br]{{{-1 親臨光化門內勤政殿庭試時圖}}}}}}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역사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br]([[신문로]] 2가 2-1, [[서울역사박물관]]) || || '''{{{#fff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기록화 / 궁궐도 || || '''{{{#fff 수량 / 면적}}}''' || 병풍 한틀(8幅) || || '''{{{#fff 지정연도}}}''' || [[2001년]] [[12월 31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조선 후기]]([[19세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친림광호문내근정전정시시도.jpg|width=100%]]}}} || || {{{#gold ''' 〈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21&ccbaKdcd=21&ccbaAsno=013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1747년(영조 23년) 9월 19일에 [[영조]]가 [[경복궁 근정전]] 터에 직접 가서 정시 문과 생을 뽑고 시를 지은 일화를 그린 그림이다. 2001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받았다. == 상세 ==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 약 273년 간 빈 공간으로 있었다. 다시 짓기에는 재정도 많이 들 뿐 더러, 풍수 상 문제가 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왕들이 무작정 경복궁 터를 버려둔 것은 아니었고 조금씩 관리는 했다. 경복궁 터를 가장 많이 활용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경복궁 근정전|근정전]] 터에서 여러 국가적 행사들을 많이 치렀다. 그 중에는 정시라는 [[과거]] 시험을 연 것도 있었다. 영조가 그때 근정전 터에 방문하여 합격생을 선발하고 "창업중흥만세법(創業中興萬世法)", "용준호거한양성(龍蹲虎踞漢陽城)"이라는 시를 읊은 뒤 입시한 신하들에게 시에 화답하라고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309019_002|#]] 저 그림은 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총 8폭을 [[병풍]] 하나로 합친 [[그림]]인데, 맨 오른쪽 폭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나머지 폭에는 글이 쓰여있다. 글의 내용은 저때 참석하여 영조의 시에 화답한 관리들의 시 및 인적사항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부분).jpg|width=100%]]}}} || || {{{#gold ''' 〈친림광화문내근정전정시시도〉의 그림 부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22&ccbaKdcd=21&ccbaAsno=013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그림 속 모습은 다음과 같다. [[북악산]] 아래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그 밑에는 [[기단]] 위에 흰 천막이 쳐져 있고 붉은 의자가 놓인 근정전 터가 있다. 붉은 의자는 임금이 앉는 의자로, 영조가 저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조 본인은 그림 속에 없지만, 왕은 원래 어진 말고는 그리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이었다. 근정전 터 아래로는 마당에 쳐진 간이 천막과 드문드문 관리하는 이들이 머무는 건물이 보이며 군데군데 소나무가 있다. 제일 아래에는 돌로 만든 담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1칸 짜리 문 3개가 띄엄띄엄 있다. 영조 시기 기록에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이 간혹 보이는데, 오늘날같은 육중한 궁성문이 아니고 저 문을 일컫는 것이다. [[분류:조선의 회화]][[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서울역사박물관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