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방글라데시의 도시]] ||<-3> {{{#FFF {{{+1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height=15]] {{{-3 {{{#red '''[[방글라데시|{{{#red 방글라데시}}}]]의 도시'''}}}}}} [br]{{{#red '''চট্টগ্রাম'''}}}}}}}}}[br]{{{#red 치타공 | Chittagong}}} || ||<-3><#FFF> [include(틀:지도,장소=Chittagong,너비=100%,높이=100%)] || ||<-2> '''{{{#FFF 국가}}}''' ||<#FFF>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30]] [[방글라데시]] || ||<-2> '''{{{#FFF 지역}}}''' ||<#FFF> [[치타공 주]] || ||<-2> '''{{{#FFF 면적}}}''' ||<#FFF> 168km² || ||<-2> '''{{{#FFF 인구}}}''' ||<#FFF> 2,592,000명(2011) || ||<-2> '''{{{#FFF 광역인구}}}''' ||<#FFF> 9,543,000명 || ||<-2> '''{{{#FFF 인구밀도}}}''' ||<#FFF> 15,325명/km² || [[파일:방글라 치타공.jpg|width=510]] [[파일:치타공 방글라.jpg|width=510]] [목차] == 개요 == * [[영어]] : Chittagong[* [[2018년]]부터 아래 벵골어 발음을 살린 'Chattogram'이라는 표기도 쓰이고 있다.] * [[벵골어]] : চট্টগ্রাম (쩟또그람) [youtube(P4tYpRWNoR8)]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주)|치타공 주]]의 주도이다.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이다. 인구대국 방글라데시의 제2도시인 만큼, [[인구]]가 [[서울특별시]]급으로 많은 9백만에 이른다. [[갯벌]]이 많은 치타공의 [[환경]]덕분에 주요산업으로 선박해체가 발달해있다. 대형선박들은 해체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낀 슬러지나 폐유등이 새어나와 극심한 환경오염이 발생하고[* 특히 대형 유조선을 해체하는 사진을 보면 위성사진에서도 보일 정도로 시커먼 바다를 볼 수 있다.] 선박 해체작업 자체가 워낙 위험한 일이라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환경오염을 이유로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그 전에 환경오염 방지책이나 기술자들의 위험수당 같은 각종 비용을 감안하면 아예 불가능한 사업이라 폐 선박을 스스로 처리하는 대신 선박 자체를 헐값[* 1$에 판매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회계와 세금때문인데, 기업의 자산을 무상으로 증여하거나 하면 탈세 및 돈세탁 등등의 혐의가 없는지 매우 복잡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에 판매해 넘기고, 넘겨받은 개발도상국의 기업은 그걸 해체하여 얻은 부품이나 자재를 판매하여 수익을 내는 구조다. 전세계 수많은 대형선박들이 치타공으로 와서 해체되며 여기서 나온 폐자재들은 방글라데시에선 주요한 [[철]] 공급원이다. 또한 단순히 철뿐만 아니라 해체한 [[선박]]의 재활용 가능한 모든 부분을 재사용한다(선박의 싱크대부터 전구, 파이프까지 모조리 가져온다. 공산품을 수입하는 입장에선 이런 내장재 하나하나가 귀하기 때문이다). 치타공의 위성사진을 보면 위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남쪽 카르나풀리 강 하구 쪽에 샤아마나트 국제공항이 있다. == 역사 == 지명은 [[아랍어]]로 [[델타]]를 의미하는 '샷트' 혹은 현지 차트 계급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부터 [[항구]]가 있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서 동방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7세기]] 이후 [[아랍인]]들이 자주 왕래하였고, [[1154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바스라]]와의 교류가 잦은 항구라고 기록하였다. [[수피]] [[선교사]]들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1340년]] [[델리술탄왕조]]에게 점령되어 그 주요 항구가 되었다. [[1345년]] [[이븐 바투타]], [[15세기]] 초 [[정화]]가 방문하였다. 한편 일대에는 많은 [[이란인]]들이 정착, [[페르시아어]]가 [[공용어]]로 통하기도 하였다. [[1528년]] 벵갈 술탄은 [[포르투갈]]이 치타공에 상관을 설치하도록 허가하였다. 얼마 후인 [[1531년]] [[미얀마]]의 아라칸족의 아라칸 왕국이 치타공을 점령하였다.[* 일찍이 1512년과 1516년에 시도해 보았으나 아직 [[벵골 술탄국]]이 전성기일 때라서 진압당하고 역으로 마웅도 지방 등 나프 강 일대를 헌납하고 공물까지 왕창 뜯긴 뒤 [[절치부심]]하여 군사력을 기르고 벵골 술탄국이 약해진 틈을 타 포르투갈 [[콩키스타도르]]와 해적들과 연합해 [[삼세판|1531년 세번 째 시도 끝에]] [[칠전팔기|드디어 치타공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급의 무역항을 얻게 된다.]] --[[중꺽마]]의 표본--] [[권력]]의 공백을 틈타 [[포르투갈인]]들은 치타공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1602년]] 샌드위프 섬을 점령하였고 [[1615년]] 인근 해역에서 네덜란드-아라칸 함대를 격파하였다. 다만 이후 아라칸 인들이 도시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던 [[1666년]] [[무굴 제국]]의 벵골 총독 샤이스타 칸이 288척의 함대로 항구를 봉쇄하고 6500의 병력으로 도시를 공격하는 수륙 양면 작전으로 3일만에 아라칸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이후 샤이스타 칸은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고 도시를 [[이슬라마바드]]로 명명하였다. [[1686년]]과 [[1689년]] [[영국 해군]]이 점령을 시도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무굴제국]]기에 안데르 성채와 많은 [[모스크]]가 세워졌고, 조선업과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1793년]] 기어코 영국령이 된 후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1823년]] 영국-버마 전쟁 때에 버마군이 도시를 위협하였고, [[1857]]년에는 [[세포이 항쟁]]과 연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1865년]] [[다카(방글라데시)|다카]]와의 [[철도]]가 놓였고, [[인도]]-[[버마]] 무역의 주요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태평양 전쟁]]기에 도시는 [[영국]]의 대일본 거점이었고, [[1942년]] [[봄]] 일본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1943년]]에는 [[기근]]을 겪었고,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독립]] 후 [[파키스탄]] 시기에는 [[카라치]]에 비해 저조한 투자가 벵골인들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였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도시]]는 주요 격전지였고, 저항군은 항구에 정박한 외국 선박들을 통해 독립 선언을 알렸다. 전후 [[소련 해군]]이 기뢰를 제거하고 항구를 정상화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이 작업은 1년이 소요되었다. 지아우르 라흐만 대통령은 치타공의 발전을 지휘하였으나 [[1981년]] 그곳에서 일어난 [[쿠데타]] 시도로 암살되었다. [[1991년]] [[사이클론]]이 불이닥쳐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 정부]]가 복구를 도왔다. 현재도 치타공은 벵골 수출 [[경제]]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