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파일:external/yuru2club.com/720.jpg]] || 이름 || 츠루오카 카즈토(鶴岡 一人)[* '''카즌도''' 라고도 읽는다.] || || 생몰 || [[1916년]] [[7월 27일]] ~ [[2000년]] [[3월 7일]] || || 국적 || [[일본]] || || 출신지 || [[히로시마현]] [[구레시]][* [[후지무라 후미오]]와 동갑내기에 동향 출신. 학창시절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 || 포지션 || [[3루수]], [[2루수]], [[1루수]], [[외야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경력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1939~1952) || || 지도자 경력 || '''난카이 호크스 감독(1946~1968)''' || [목차] == 개요 ==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야구 지도자, 해설가. 프로 입문부터 감독 경력을 전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 에서 보낸 인물로, 별명은 [[오야붕]](두목), 돈 츠루오카[* [[대부]]의 주인공인 [[비토 콜레오네|돈 콜레오네]]에서 따온 것.], 미스터 호크스. 1944년 결혼하여 처가의 성을 따라 한때 '야마모토 카즈토' 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도 있으나, 1958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재혼하면서 1959년 다시 본래의 성인 츠루오카로 돌아왔다. == 선수 시절 == [[파일:external/beak.softbankhawks.co.jp/pht_player_05_02.jpg|width=250]] [[히로시마]] 상업학교 시절 [[유격수]]와 4번타자로 맹활약하며 학교를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 제패로 이끌었고, 우승학교에 주는 특전으로 [[미국]]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호세이 대학 시절에도 츠루오카는 [[3루수]]로 화려한 수비와 빼어난 타격을 자랑했다. 1939년 대학 졸업 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 그 해 홈런 10개를 치며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이듬해 곧바로 군에 징집되어 5년간 복무하였다. 종전 후 1946년 난카이에 복귀,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며 1946년 시즌 타점왕을 수상하는 등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1952년 시즌을 끝으로 츠루오카는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8시즌간 통산 성적은 '''790안타, 61홈런, 467타점, 143도루, 타율 0.295.''' == 감독 시절 == [[파일:external/www.zakzak.co.jp/bbl1203110827001-p3.jpg|width=350]] 1953년 부터 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1968년 까지 선수 겸 감독시절 포함 무려 23시즌 동안 난카이를 지휘하였다. 연습생이던 [[노무라 카츠야]]를 주전 [[포수]]로 성장시키고 그 외 오카모토 이사미, 히로세 요시노리 등의 무명 선수를 스타로 등극시키는 등 선수 지도능력이 탁월했으며 그 외 아마시절 부터 유망주였던 [[카게야마 카즈오]], [[오사와 케이지]], 아나부키 요시오 등과 외국인 투수 [[조 스탠카]]를 적절히 활용하며 팀을 1959년, 1964년 일본시리즈 제패로 이끌었다. 리그 우승 경력도 11회나 된다. 또한 마이니치 신문 기자 출신인 오와리 히사츠구를 구단 전속 기록원으로 채용, 당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에서도 유래가 없던 '''데이터 야구'''를 도입한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츠루오카의 제자였던 [[노무라 카츠야]]의 ID 야구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23년 난카이 감독생활 동안 팀이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1967년 단 1시즌(4위) 뿐'''이었고,[* 단일리그 마지막 해인 1949년 4위를 기록한 바 있으나 이 해엔 8팀이 참가해서 1~4위까지 A클래스였다. 이 해 성적은 135전 67승 67패 1무로 딱 5할 승률을 찍었다.][* 츠루오카가 감독을 맡은 시즌 중 유일하게 5할 승률을 기록하지 못한 해가 이 해다. 당시 성적은 133전 64승 66패 3무. 승률은 0.492였다.] 그 외 시즌은 거의 리그 우승 내지는 2위로 이끌 정도로 명감독이었다. 1965년을 끝으로 난카이 감독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츠루오카는 그 해 시즌 종료 후 예정대로 구단에 사의를 표명했고 곧바로 [[도쿄 오리온즈]]와 [[산케이 아톰즈]] 양 구단으로 부터 차기 감독직을 제안하는 러브콜이 도착했으나, 츠루오카의 후임 감독인 [[카게야마 카즈오]]가 취임 4일 만에 급사[* 38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에 오른 카게야마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매일 밤 [[브랜디]]에 수면제를 복용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급성 부신피질 기능부전 이란 듣도보도 못한 병으로 급사하였다.]하는 사태가 터지면서 난카이의 분위기는 풍비박산났고 결국 구단과 선수단의 복귀 요청을 받은 츠루오카는 이를 승낙하면서 양 구단의 제의를 사양하고 다시 난카이 감독으로 복귀하여 3시즌을 더 지휘하였다. 덧붙여 츠루오카는 난카이로 복귀하기 전 어느 구단으로 이적하려 했는지에 대해 침묵을 지켰으나, 1985년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가 사망했을 당시 취재진에게 "그 분(나가타)의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라고 언급하며 오리온즈 감독에 취임할 예정이었음을 밝혔다. 1968년 시즌을 끝으로 츠루오카는 감독직을 사퇴하고 난카이를 떠났으며, [[한신 타이거스]], [[킨테츠 버팔로즈]] 등 다른 팀의 뜨거운 러브콜을 거부한 채 영원한 난카이의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감독으로서 '''1773승 1140패 81무승부 승률 0.609'''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2019년 현재까지 일본야구 사상 감독으로서의 통산 승리 수 1위이며(2위 [[미하라 오사무]] 1687승), 1000승 이상 감독 중 유일하게 승률 6할이 넘는 감독이기도 하다(2위 [[미즈하라 시게루]] 0.585). 한편으로 츠루오카는 제자인 [[노무라 카츠야]]와 불화설이 돈 적이 있다. 노무라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츠루오카가 그를 칭찬한 적은 단 두 번[* 노무라가 입단 3년차이던 1956년 하와이 전지훈련 때 기자들에게 "노무라를 쓸만한 선수로 키운 것이 성과" 라고 밝힌 것과, 이듬해인 1957년 캐리어 첫 홈런왕을 달성한 노무라에게 "자네 잘 했어" 라고 격려한 것.]일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고 1965년 양대 리그 분리 후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삼관왕]]을 달성한 노무라에게 한 마디의 칭찬도 없었을 정도 였으며, 노무라는 츠루오카가 2000년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조문은 커녕 화환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노무라는 츠루오카를 [[스승님]]으로서 존경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밝혔고 장례식에 오지 않은 것도 두 번째 아내인 사치요가 난카이의 코치, 선수들을 상대로 전횡과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어 이를 조정하기 위해 장례식에 올 수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노무라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다른 팀 선수들의 칭찬은 잘 한 반면 같은 팀 제자들에겐 호평이 인색했다. == 이후 == 1969년 부터 죽기 전까지 [[NHK]]와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유소년 야구 육성과 국제간 교류에 진력을 쏟으며 야구계 발전에 큰 힘을 보태었다. 감독 재임중이던 1965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으며, 1991년엔 야구 발전의 공로를 치하하여 프로야구인 으로는 최초로 훈 4등급 욱일장 훈장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0년 3월 7일 지병으로 인해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며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 [[김성근]]과의 인연 == 츠루오카가 난카이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1961년, 난카이의 동계훈련 캠프에 사회인 야구 출신의 19세 청년이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가네바야시 세이콘'''. 그렇다. 여러분이 익히 아는 [[김성근]]이다. 당시 김성근은 연습생으로 잠깐 츠루오카의 지도를 받았는데, 지금보다 좌완 투수가 희귀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인상적인 면은 없었는지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특이한 건 김성근 본인은 난카이 입단이 좌절된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본인의 유일한 '''프로 경력''' 이라면 '''프로 경력'''임에도 말이다. 덧붙여 이 때 [[김성근]]은 같은 [[교토]] 출신이자 당시 난카이 소속 투수로 뛰던 [[김영덕]]과 연을 맺었는데, 이 연줄이 나중에 [[KBO 리그]] 지도자 경력으로 이어질 줄은 그땐 전혀 몰랐을 것이다.[* [[OB 베어스]] 초대 감독으로 내정된 [[김영덕]]이 구단 지시에 의해 [[김성근]]을 투수 코치로 받아 들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김영덕]]과 [[김성근]]은 이상하리만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불편한 관계가 후에 [[김영덕]]이 성적부진으로 OB 베어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이것도 [[김성근]]이 자기 자리를 [[김영덕]]이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후인 1984년 시즌 중 OB와 삼성 간의 피튀기는 신경전, 그리고 후기 리그 최후반에 [[삼성 라이온즈|삼성]]이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져주기 게임이란 추태를 부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 바 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어떻게든 [[한국시리즈]] 제패를 원했던 삼성이 꽤나 상대하기 골치아픈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길 원치 않아서 그나마 만만한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고른 거지만.] [각주] [[분류:1916년 출생]][[분류:2000년 사망]][[분류:구레시 출신 인물]][[분류:우투우타]][[분류:외야수]][[분류:내야수]][[분류:1939년 데뷔]][[분류:1952년 은퇴]][[분류: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야구]][[분류:일본야구전당 헌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