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 '''{{{#fff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한국과학기술원 총장)] [include(틀:역대 대우학원 이사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764, #003764 20%, #003764 80%, #003764);"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fff 대한민국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br]{{{#fff {{{+1 최형섭}}}[br]崔亨燮 | Choe Hyung-seop}}}'''}}}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666.jpg|width=100%]]}}} || ||<|2> '''출생''' ||[[1920년]] [[11월 2일]]||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br](現 [[경상남도]] [[진주시]]) || ||<|2> '''사망''' ||[[2004년]] [[5월 29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 || '''본관''' ||[[해주 최씨]] || || '''호''' ||송곡(松谷) || ||<|2> '''재임기간'''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 || ||[[1971년]] [[6월 15일]] ~ [[1978년]] [[12월 2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이순란 || || '''학력''' ||[[대전고등학교|대전고등보통학교]] {{{-2 (졸업)}}}[br][[와세다대학]] {{{-2 (채광야금학과 / 학사)}}}[br][[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2 (공학 / 석사)}}}[br][[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2 (공학 / 박사)}}} || || '''종교''' ||[[개신교]] || || '''경력''' ||서울대학교 교수[br]한국해사대학교 교수[br]대한국산자동차주식회사 기술고문[br]대한민국 공군본부 항공부대 정훈장교[br]대한민국 공군본부 항공수리창 창장[br]대한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br]대한민국 상공부 광무국 국장[br]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br]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br]국무위원회 국무회의 과학자문위원[br]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br]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br]한국과학재단 이사장[br]한국과학기술연구소 명예연구위원[br]한국과학원 원장[br]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고문[br]UN국제연합과학기술개발자문회의 자문위원[br]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br]경상북도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과학자, 공학자, 교육인, 관료이다. 본관은 [[해주 최씨|해주]]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호는 송곡(松谷)이다. == 생애 == 1920년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대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했다. 1944년 귀국 후, 조선광업주식회사에서 일하다 1946년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광산야금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3년 [[미국]] 유학을 떠나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물리금속학 석사를 졸업하고. 1955년 대학을 옮겨[*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서상희 연구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지도 교수였던 B. D. Cullity 교수가 본인의 모교인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 추천해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한다. ]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화학야금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1959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해사대학교 교수 등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재직하다가 [[한국원자력연구원|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3년에 [[캐나다|캐나다]]의 [[앨버타 대학교 |앨버타 대학교]]와 엘도라도 금속연구소로 떠나 [[지르코늄|지르코늄]] 추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여년의 연구 이후 귀국해 캐나다에서의 연구 경험을 소개하는 글을 대한화학회지에 실었다. 이를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박정희]]가 읽고 최형섭을 초빙해 과학기술 발전, 교육 방안, 연구소 채제 및 운영 방향 등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여하고 곧바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에 부임했다. 5년 뒤인 1971년에는 제2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과학기술처 장관]] 등을 지냈다. 7년 6개월간 과학기술처 장관에 재직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직에 있을 때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환경의 조성[* 상술한 캐나다의 연구체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록 기각되긴 했으나 연구소를 대상으로한 [[회계감사|회계감사]]를 하지말아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해외 인재 영입[* 당시 대한민국은 [[두뇌유출|두뇌유출]]로 외국으로 간 인재가 많았는데, 이를 국내로 영입하기 위해서 10만원 정도의 월급을 제시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대학 교수들이 3만원, 대통령이 7만원 받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이나 실제로 해외에서 온 인재들에겐 봉급의 30%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집이나 교육 등의 문제를 최대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해외 인재 영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 국내 대학교수나 정치권으로부터 최형섭이 많이 공격받는 부분이었다.] 등으로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소장으로서 그가 목표한 것은 산업 현장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 [[미국|미국]] 측에선 [[벨 연구소 | 벨 연구소]][* [[트랜지스터|트랜지스터]] 연구 등으로 [[노벨상|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자유로운 연구와 기초 과학을 중시했다]를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했으나, 바텔기념연구소[* 기초 과학 연구보단 기업의 의뢰나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연구를 주로 하는 연구소로 [[복사기|복사기]] 등을 개발 및 상용화하는데 기여하였다.]를 모델로 삼았다. 기업에게 성공적인 기술이전을 한 사례는 [[SK|선경그룹]]의 자기테이프를 꼽을 수 있다[* 다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개발한 기술과 유사한 기술을 해외에서 유치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기업 간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 1971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되자 과학 기술의 기반 구축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정략적 개발 ,과학 기술의 풍토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기술개발촉진법·기술용역육성법 등 여러 관계법령을 제정하고, [[대덕연구단지|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에 일조하여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개발 기반을 다졌다. 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기술을 선호한 성향에 맞게 관련 기술에 중시했다[* 기초과학을 중시하지 않은 성향은 노벨상에 굶주린 우리나라에서 공격받는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기초과학을 완전 배제하진 않은 것이 대학의 연구지원을 하는 [[한국과학재단|한국과학재단]]을 설립 및 운영하기도 했다.]. 과학 기술의 대중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태국]],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의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맡아 활동하며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 전략이란 저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중국]], [[일본]] 등의 나라와 기술개발협력을 시도하였다. 사후 [[이태규]]를 뒤를 이어 2번째로 현충원에 안장된 과학기술인이 되었다. == 연구 업적 == 최형섭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부유선광(浮遊選鑛)[* [[광물 |광물]]의 표면이 가진 물리적, 화학적 특징을 이용해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을 골라내는 방법이다. 잘게 분해된 광물에 공기방울을 부착해 경제성 있는 광물만 떠오르거나 가라앉게 하여 선별한다] 이론이다. 미네소타 대학원 시절, 지도 교수인 쿡 교수 하에서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Flotation characteristics of hematite, goethite and activated quartz with 18-carbon aliphatic acids and related compounds 논문은 지금도 부유선광, 산화철 관련 논문에 인용되는 논문이다. 그 외에도 실용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던 성향에 맞게 여러 특허도 등록했다. 상술한 [[지르콘 |지르콘]] 관련 연구를 통해 지르콘사의 제련이나 지르콘 관련 정제 및 제조 기술 등을 등록해 대통령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부유선광을 통해 저품위의 철로부터 고품위의 철을 뽑아내는 기술 등 여러 기술의 특허를 등록했다. == 수훈 == * 5.16 민족상 * 국민훈장 무궁화상 *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 * 대통령상 발명상 *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 일화 ==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의 실정에 맞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산업 기술을 중시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영입할 때, 현재 대한민국은 당신들이 필요하나 과학자들이 원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말고 정부나 산업계를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신경쓰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중용한 [[박정희]]와 관계가 좋았다. 1965년 경공업 수출로 연간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을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냐고[* 당시 수출액 3위 품목은 가발이었다.]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상한 박정희에게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10억달러가 넘는다며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연구소의 임금이나 예산 문제에 있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형섭이 원하는 데로 연구소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직 은퇴 이후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리더쉽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과학 연구 자체를 좋아하여[* 집안이 유복한 덕분에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연구실을 만들기도 하였다.], 과기처 장관이 되자 오히려 아쉬워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 연구원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외에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어릴 적에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커서도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제3공화국))] [include(틀: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제4공화국))] ---- [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분류:진주시 출신 인물]][[분류:1920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공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수]][[분류:과학기술처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인사]][[분류:대전고등학교 출신]][[분류:와세다대학 출신]][[분류:미네소타 주립대학교 출신]][[분류:학자 출신 정치인]][[분류:해주 최씨]][[분류:한국과학기술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