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 개요 == [[고려]] [[명종(고려)|명종]] 시기의 무신 출신 재상. == 생애 == 최충렬은 명종 초기 신호위 대장군으로 임명됐고, 곧 상장군으로 승진해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할 때 중군병마사로 임명됐다. 그리고는 추밀원에서 관직을 지냈다. 1177년 추밀원부사였던 최충렬은 추밀원사 상장군 [[이광정(고려)|이광정]]과 함께, [[중방]]의 의사결정에 반발한 내시낭장 겸 병부원외랑 장보의 반박을 들었다. 이광정과 최충렬은 장보를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중간에서 강에 빠뜨려 죽이게 했다. 이듬해 1178년에는 동지추밀원사로 승진했다. 최충렬은 다른 추밀원 관원들과 함께 음력 2월에서 1월로 바뀌었던 [[연등회]]의 날짜를 되돌리자고 건의해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에 집권자 [[정중부]]가 사적인 이유로 일부 관원을 탄핵하는 일이 있었다. 일부 기두(旗頭)들은 무신들을 겨냥해 고변하기도 했다. 최충렬을 대상으로는 정중부를 습격하려고 한 무리와 한패라는 고변이 들어왔고, 정중부는 명종에게 진상 조사와 [[국문]]을 요구했다. 1179년 9월 정중부가 살해당한 뒤 최충렬은 재상이 됐다. 같은 해 10월 [[팔관회]]에서 백관에게 올리는 과일 상과 중금군(中禁軍) 옷 장식의 무절제함을 지적하고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11월에 재상 이광정과 함께 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이유로 해직을 요청했으나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부 판형부사로 승진했다. 1181년 1월에는 [[한문준]]과 함께 여러 낭사들을 비판했다. 낭사들은 뇌물과 말다툼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무신과 이를 거르지 못하는 이부와 병부를 비판하며 승진에 연한을 두도록 간언했다. 그러나 이들 낭사 역시 뇌물을 주고 제멋대로 하니 최충렬 등이 [[무신정변]]에서 죽은 문신들의 예시를 들며 비판한 것이다. 1181년 10월에는 [[참지정사]]로서 왕을 대신해 서경에 가서 팔관회를 행했다. 팔관회 때 재상이 서경에 가던 전통은 조위총의 난 이후 없었는데, 최충렬은, >先王皆遣宰相爲使, 蓋重翼京也, 乞依舊制. >선왕께서 재상을 모두 사신으로 보내신 것은 대개 익경(翼京, 서경)을 중히 여기셨기 때문이니, 바라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자신을 서경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사서에서는 최충렬이 서경에서 받을 물품[* 고려사 최충렬 열전에서는 증유(贈遺, 증여), 고려사절요에서는 증회(贈賄, 뇌물)라고 표현했다.]이 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명종 역시 최충렬의 뜻을 미루어 알았다고 표현했다. 최충렬이 서경에서 개경으로 돌아올 때, 받은 물품으로 가득 찬 수레 30량(兩)이 잇달아 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1182년 2월(음력)에 죽었다. [[분류:고려의 상장군]][[분류:118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