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96666 20%, #996666)" {{{#FFFFFF '''최진실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1 [[문화방송|[[파일:MBC 로고.svg|width=50]]]] '''[[MBC 연기대상|{{{#334555,#A8BBCC 연기대상}}}]] [[틀:MBC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334555,#A8BBCC 대상}}}]]'''}}} || || [[김혜수]][br](1996년) || {{{+1 →}}} || '''최진실[br](1997년)''' || {{{+1 →}}} || [[김지수(배우)|김지수]][br](1998년) || ---- ||<-5> {{{#000000 {{{+1 '''역대'''}}} [[대종상|[[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width=120]]]]}}} || ||<-5> [[파일:daejongawards.png|width=50]] || ||<-5> '''{{{#000000 여우주연상}}}''' || || '''제32회[br]([[1994년]])''' || {{{+1 →}}} || '''제33회[br]([[1995년]])''' || {{{+1 →}}} || '''제34회[br]([[1996년]])''' || || [[윤정희(1944)|윤정희]][br](만무방) || {{{+1 →}}} || '''최진실[br](마누라 죽이기)''' || {{{+1 →}}} || [[심혜진]][br]([[은행나무 침대]]) || ||<-5> || ---- ||<-5> [[백상예술대상|[[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width=130]]]] || ||<-5> [[파일:baeksangartsawards4.png|height=100]] || ||<-5> '''{{{#FFFFFF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 '''제29회[br]([[1993년]])''' || {{{+1 →}}} || '''제30회[br]([[1994년]])''' || {{{+1 →}}} || '''제31회[br]([[1995년]])''' || || [[배종옥]][br](걸어서 하늘까지) || {{{+1 →}}} || '''최진실[br](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1 →}}} || [[최명길(배우)|최명길]][br](장미빛 인생) || ||<-5> {{{+1 [[백상예술대상|[[파일:백상예술대상_로고.png|width=100]]]] {{{#FFFFFF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 [[김정은(배우)|김정은]][br](2005년) || {{{+1 →}}} || '''최진실[br](2006년)''' || {{{+1 →}}} || [[손예진]][br](2007년) || ||<-5> || ---- ||<-5> [[한국갤럽|[[파일:한국갤럽 CI.svg|width=135]]]] {{{#000000,#FFFFFF {{{+1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 || || (신설) || {{{+1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7CEEB, #87CEFA, #00BFFF)" {{{#000080 '''최진실[br](2005년)'''}}}}}} || {{{+1 →}}} || [[최수종]][br](2007년)[* 2006년도에는 조사 결과가 없다.] || ||<-5> {{{#000000,#FFFFFF {{{-2 ※ 매해마다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를 선정.[* [[틀: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 참고]}}}}}} || ---- }}} || ||<-2> '''{{{+1 최진실}}}[br]崔眞實 | Choi Jin Sil'''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최진실-1.png|width=100%]]}}} || ||<|2> '''출생''' ||[[1968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br](現 [[파일:서울특별시 휘장.svg|height=20]] [[서울특별시]] [[파일:은평구 CI.svg|width=19]] [[은평구]])|| ||<|2> '''사망''' ||[[2008년]] [[10월 2일]]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묘소'''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갑산공원 묘원[* 2010년 [[최진영]]과 합장되었다.]|| || '''신체''' ||162cm[* 프로필상 키는 164cm였다. 당시 최진실 나이대 기준으로 한국 여성 평균보다 큰 키다. 최진실의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작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작은 키는 아니었다.], [[B형]]|| ||<|2> '''가족''' ||아버지 최국현, 어머니 [[정옥숙]][br]남동생 [[최진영]], [[최서준]][* 남동생만 둘을 뒀는데, 이 중 최진영은 장남이자 둘째다. 막냇동생의 이름은 내가 바라는 세상에서 첫째 동생인 최진영에 의해 밝혀졌다.] 6촌 [[최재성(배우)|최재성]] || ||아들 [[지플랫|최환희]][* [[2020년]] [[11월 20일]] 가수로 데뷔했다. [[https://entertain.v.daum.net/v/20201118113615620|#]] ], 딸 [[최준희]] || || '''학력''' ||[[서울불광초등학교]] {{{-2 (졸업)}}}[br]동명여자중학교 {{{-2 (졸업)}}}[br][[선일여자고등학교]] {{{-2 (졸업)}}}|| || '''종교''' ||[[개신교]]([[기독교한국침례회|침례회]])[* 사망할 당시 온 가족이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 || '''데뷔''' ||[[1988년]] [[삼성전자]] TV CF|| || '''별명''' ||깨순이[* 어렸을 적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다.], 최수제비[* 유년 시절 가정형편으로 쌀이 아닌 수제비가 주식이 되어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또자[* 잠이 많아 어머니가 붙여준 별명이다.], 또순이[* 연예계 데뷔 후 미디어 언론에서 불린 별명], 최트루[* 진실=True] || || '''서명''' ||[[파일:최진실싸인.jpg|width=80]]||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진실-2.gif|width=100%]]}}}|| || {{{#FFFFFF ▲ '''1997년 인터뷰 하는 모습'''}}} || >'''제가 역사적으로 남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꼭 기억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 - 1994년 11월 29일 [[서울 1000년 타임캡슐]]에 담긴 영상 인터뷰 내용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국민배우]]이자[* 20대에 국민배우 타이틀을 달았다.] 만인의 연인.''' 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장기집권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고[[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013813|#]] 199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국민스타[*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최진실이 사실상 진정한 마지막 국민스타라고 칭하기도 했다.]'''이다.[* 최진실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있었지만 그 의미를 넘어 이름 석자만으로 브랜드였던 전무후무 레전드 중의 넘사벽 레전드.] 유치원생부터[* [[파일:0664b70d89857459583.jpg|width=400]] 5살 여자아이에게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묻자 "최.진.실!"이라고 대답한다.] 60대 이상 노년층까지 남녀노소 전 연령대 층을 아우르는 인지도, 대중성, 호감도, 스타성, 파급력, 영향력 등을 지님과 동시에 옆집 딸, 친구, 누나, 언니, 동생 같은 '''친근한 국민 [[슈퍼스타]] 이미지의 배우였다.'''[* 선하고 귀여운 외모가 베이스지만 다양한 스타일링과 이미지를 최진실식대로 전부 소화하였다. 청순함과 러블리 귀여움과 스타일리쉬 내추럴함과 미시스타일 등 모두 배합된 모습을 보여주어 전 연령층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 생애 == 1968년 12월 24일 새벽 2시 55분에 서대문구 현저동 성신병원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친할아버지[* 경찰 공무원]께서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며 지어주셨고 최진실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정옥숙보다 9살 연상인 최국현은 [[경복고등학교]] 시절 연극을 하고 KBS 탤런트 공채 1기였다고 하나 부친의 극심한 반대로 운수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우 [[최재성(배우)|최재성]]은 6촌 오빠였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사촌 형 최상현은 연극배우 출신의 KBS 연출가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20500209121002&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4-02-05&officeId=00020&pageNo=21&printNo=22421&publishType=00010|#]]]는 택시 운전을 하셨고 어머니[* 경상북도 상주시 출생 정옥숙의 외가는 시골에서는 부자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어머니 정옥숙은 그림과 시에 소질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설광이었으며 [[신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는 [[미용사]]로 일했는데 이후에도 그런 재능을 살려 어린 최진실에게 직접 근사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멋진 시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며 최진실의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정옥숙의 자매 중에 소설가가 된 막내 여동생 정현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최진실은 자신보다 5살 연상인 정현숙을 이모들 중 가장 좋아했다. 정현숙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도 최진실, 정옥숙과 같이 출연하여 최진실의 친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던 정현숙은 '숲속의 방' 캐릭터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는 미용사였는데 두 살까지는 가족이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남동생 [[최진영]]이 태어나던 해, 세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일을 쉬면서 집안 형편이 갑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네 살 무렵에는 '물푸렛골'이라 불리던 구파발의 산동네에 다 쓰러져가는 방 세 개짜리 판잣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고모 세분, 고모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모여 살았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 사실을 결혼 후에 알았다. 이 결혼이 아버지의 재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1985년부터 13년간 별거하다가 1998년 이혼한다.] 최진실이 5살 되던 무렵 가난에 지친 어머니 정옥숙이 최진실과 남동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뒷산에 올라가니 최진실이 “엄마, 우리 죽는 거야? 나 죽기 싫어, 무서워.”라며 우는 바람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8살, 9살 삼송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늘 밝고 활발하던 아이었지만 학교에서는 말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벙어리라는 소문이 돌아 아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을 정도.] 너나없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동네 친구들과는 다르게 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은 부잣집 아이들도 꽤 많아 어린 나이에도 계층 의식을 크게 작용해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은연중에 자신의 처지와 가족에 대한 상대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 이때부터 자신과 타인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허나 워낙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집에 돌아오면 다시 '깨순이'로 돌아왔다. 10살 무렵 아버지가 사우디 근로자로 떠나 서울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를 하였고 불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생 때 류머티스성 관절염 진단을 받아 한동안 약을 먹기도 하였고, 고등학교 때는 [[심장병]]이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동명여중을 다니던 시절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던 배우 [[강수연]]을 동경했고 우상으로 삼는다.[*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강수연을 동경하며 5살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교실 밖에서 강수연이 수업 듣는 것을 몰래 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강수연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 정도.] 동명여중을 졸업하고 선일여고로 진학했다.최진실은 학창시절 귀여운 외모에 성격도 좋아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주위에 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까지는 내성적인면이 강했다고 한다.] 최진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연기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한테 만화를 그려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고나면 그걸 따라하는 게 일이었다. '연기 놀이'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가족들이 다 자는 밤중에 큰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거울을 보며 혼자 '연기 놀이'를 하다가 그 거울이 넘어지는 바람에 자던 가족들이 크게 다칠 뻔한 적도 있다. 중학생 시절에 [[미술교사]]로부터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년때까지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추리소설 매니아이기도 했다.[[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0403040041294834|#]] 하지만 집안 형편으로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 데뷔 이전 === 최진실은 최진영과 연기합을 맞추며 연기력을 연마하다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함께 합격한다. 하지만 정옥숙은 최진실의 연예계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방송사 연수비도 마련하지 못해 배우 꿈은 좌절되고 미대 진학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에 좌초되면서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http://mtvdaily.asiae.co.kr/article.php?aid=1412233795774310002#_enliple|#]] 하지만 배우 꿈을 접을 수 없어 1988년 호텔을 그만두게 되고 2달 동안의 단식투쟁에 들어간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81&aid=0001964103|#]] 이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최진영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옥숙은 항복하게 되고 최진영도 최진실을 돕기로 한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도 직접 찍어주고 그 사진들을 들고 모델 에이전시들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가 최진영의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게 되고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초기에는 최진영이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다. 1988년 4월에 모델 박영선이 주인공인 광고에서 뒷배경 역할을 맡게 된 최진실은 추운 날씨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연속 촬영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함께 동행한 최진영은 덜덜 떠는 최진실에게 수건을 덮어주며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 할거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최진영은 급한 마음에 컨셉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는 초짜 모델 최진실에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최진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배우로 성장하도록 이끈다.[[http://lady.khan.co.kr/khlady.html?www&mode=view&artid=201204231734371&code=4|#]] 이후 배우 [[김희애]]가 주인공인 화장품 광고 '쥬단학'의 보조모델로 활동하다가 '센시티브'에 여러 조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이게 A안이다. 근데 광고 감독 박경삼은 콘티에 변주를 줘서 김희애와 최진실 투톱인 B안을 만들어 본다. [[파일:1955_29270_0000.jpg|width=500]] 사내에서 B안에 대한 선호도가 좋아 B안이 낙점되고 전파를 탄다. 신예 모델을 찾던 삼성전자 후배에게 박경삼은 지체없이 최진실을 추천하였고 최진실은 곧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 CF모델 데뷔와 신드롬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_6qwuwPb56c)]}}}|| || {{{#FFFFFF ▲ '''삼성전자 광고'''}}} || [[파일:6-a29a.gif|width=500]] [[파일:6-b29b.gif|width=500]]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 >[[삼성전자]] 광고 카피. 최진실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그 카피다. 1988년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당시 출연한 [[광고]]가 엄청나게 히트하며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킨다. [[파일:20160926234318_baormdhl-2.jpg|width=500]] [[파일:04257edc32620550799.jpg|width=500]] '''인물 이름을 딴 <○○○ [[신드롬]]>의 시초'''이자 [[최초]]의 [[인물]]이며 [[연예인]] 대상으로 인기 요인을 [[연구]]한 ○○○ 신드롬 책이 나온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988년 당시 처음보는 깜찍하고 발랄한 분위기와 선하고 귀여운 외모의 여자 광고모델 등장은 대중들은 물론 광고계와 연예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중문화 연구자인 마정미에 의해 <최진실 신드롬>(청하, 1993)이라는 서적이 발간된다. 이 책은 '최진실과 에로티시즘', '최진실이 지닌 상품미학', '최진실로 상징되는 신세대론', '최진실이 출연한 광고와 자본주의의 상관성' 등을 분석한다. 마정미는 최진실이 연예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전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문화 분석을 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최진실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중문화예술인과 관련한 전문서적이 전무하던 시절에 마정미는 대중스타 분석 이론서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현실문화 분석이 새로운 출판 경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대상황에서 탄생했다.] 초창기 광고 모델 시절에는 [[성우]] [[권희덕]]이 목소리를 맡았는데, 권희덕이 목소리를 담당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대사는 널리 알려져 유행했다. 이 대사가 담긴 광고는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광고계에서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95년 제1회 '한국 모델 페스티벌'에서 CF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2500289115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1-25&officeId=00028&pageNo=15&printNo=2133&publishType=00010|#]] === 배우 입문 === 광고모델로 인기가 치솟자 MBC 예능에도 출연을 하는데 방송사 대기실에서 MBC 드라마《[[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드라마)|한중록]]》(1988년) 조연출을 만난다. 이 조연출을 통해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드라마)|한중록]]> PD [[이병훈(PD)|이병훈]]을 만나게 되고 배우 면접을 본다. 신인 배우가 필요했던 이병훈을 통해 1989년 MBC 특채 배우가 돼 한 해 전 1988년 10월부터 방영 중이던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드라마)|한중록]]>에 1989년 2월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평양 기생 '장미' 역으로 [[강박증|의대증(衣帶症)]] 환자 [[사도세자]] [[최수종]]에 이끌려 궁궐에 입성하게 되는데 의대증 발광으로 사도세자한테 살해당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wD5GL0V1h8s|관련영상]] [* 이 영상에는 자막에 최진실 역이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로 돼 있으나 오타. '경빈 박씨'는 궁녀 '빙애'로 배우 최현미가 맡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같은 해 6월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드라마)|한중록]]> 후편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드라마)|파문]]>(1989년)에 좀 더 비중있는 배역으로 출연하는데 주인공 박승도의 여동생 박선아 역을 맡았다. 방송사 특채 배우 1년차에 일복이 터지는데 영화계 입문까지 한다. 영화 [[남부군(영화)|남부군]] 출연이 확정된 후에는 섭외 요청이 많아져 1989년에는 MBC에서 주조연•조연급으로 계속 얼굴을 비친다. 1989년 4월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작품인 TV드라마 첫 주연작 MBC 베스트셀러극장 <시진읍>에 언어 장애인으로 출연했다. 또 MBC <잠들지 않는 나무>(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1989년), 추리 드라마 MBC <[[제5열(MBC)|제5열]]>(1989년), MBC <당신의 축배>(1989년), 로드 드라마 MBC <[[서울 시나위]]>(1989년)에 출연했다. === 1990년 ~ 2002년 === 1990년 청소년특집드라마 MBC《두 권의 일기》 에서 자신의 발랄한 개성을 드러내며 주목을 받았다. [[채시라]]와 공동 주연이었고 1부는 채시라, 2부는 최진실이 주인공을 맡았다.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퀴즈쇼 MBC 교양 <퀴즈 아카데미>에 게스트로 출연해 유쾌한 모습을 보여 줘 대학생들에게 큰 호감을 얻고 있었는데 이후 대학생들의 생활을 다룬 드라마《우리들의 천국》에까지 출연하자 계속 상승 국면을 탔다. MBC 인기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 가짜 대학생 '승미' 역을 맡아 입체적 연기를 보여주다가 [[백혈병]] 환자인 것으로 처리돼 드라마에서 하차를 하자 최진실의 연기를 더 보고 싶었던 시청자들은 아주 애간장이 타게 된다. 이 드라마로 공감과 인기를 얻어 '''청소년•신세대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MBC에서도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어 영화《[[남부군(영화)|남부군]]》으로 대중들에게 CF 스타가 아닌 '''영화 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최진실 첫 등장 장면에서 극장 안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7px -10px" [[파일:남부군4.gif|width=50%]][[파일:남부군5.gif|width=50%]]}}}|| || {{{#FFFFFF ▲ '''영화《남부군》'''}}} || 영화《남부군》의 첫 촬영은 1989년 3월이었고 최진실은 그 해 가을부터 합류해서 촬영하게 된다. 영화 촬영이 없는 기간에 [[정지영(영화 감독)|정지영]] 감독의 허락 하에 [[삼성전자]] 광고 모델로 [[사이판]]에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 팔을 다쳐 피부이식수술 차 엉덩이 수술까지 하게 된다. 그런 몸 상태로 빨치산 역할을 묵묵히 잘해내 제작진을 놀라게 했다. 영화 시사회는 <대한극장>에서 있었고 영화가 끝난 후 극장 입구에서 사인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어 모두 배우 [[안성기]]의 팬이겠거니 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영화는 3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 1990년 한국 영화 관객 동원 2위를 기록했다. 영화《남부군》은 대한민국 최초로 냉전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6.25 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청룡영화상]]에서 이 작품으로 '신인여우상'을 받는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1900289107001&ed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5-19&officeId=00028&pageNo=7&printNo=622&publishType=00010|#]]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할 뻔 했는데 '[[UIP]] 직배 반대 운동' 관련 [[정지영(영화 감독)|정지영]] 감독이 영화 촬영 현장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남부군》성공 이후에는 영화에서 쭉 주연 배우를 맡았다. 1990년 첫 주연 영화《[[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가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이 들면서 대박을 터뜨리자 영화계의 신예 스타로도 떠오름과 동시에 영화 배우로 완벽히 자리잡는다. 이 작품으로 [[대종상]]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
{{{#!wiki style="margin: -7px -10px" [[파일:1de5cf74b5.gif|width=100%]]}}}|| || {{{#FFFFFF ▲ '''영화《나의 사랑 나의 신부》'''}}} || 1991년 영화《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에서 1980년대 교복 자율화 세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로 고등학생 '다혜' 역을 맡았고 이어 영화《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입양]] 문제를 다룬 [[스웨덴]] 로케이션 작품으로 스웨덴 [[웁살라]] 대학 종교학과 학생 수잔 브링크(본명 신유숙) 역을 맡았다. 수잔 브링크는 실존 인물이다. 최진실은 이 작품에서 입양아 역할을 밀도있게 잘 표현해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고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스웨덴에 체류하면서 스웨덴의 성평등 가정 문화를 경험한다. [[스웨덴어]]로 연기한다든가 그때까지 해보지 않은 연기들을 다양하게 해보며 배우로서 한 단계 상승하는 시간도 갖는다.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해 개봉 일주일만에 서울 관객 10만 명을 돌파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수잔브링크-1.gif|width=50%]][[파일:수잔브링크-2.gif|width=50%]]}}}|| || {{{#FFFFFF ▲ '''영화《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 곧이어 최진실은 '''[[충무로]]의 돈 낳는 기계'''라는 수식어와 '최진실 신드롬, 황금알을 낳는 오리, 데뷔 2년 만에 전성시대'라는 타이틀을 탄생시켰고 영화사와 방송사의 섭외 요청도 빗발쳤다.[* 이 스웨덴 여행은 정옥숙, 최진실, 최진영이 함께 한 첫 외국 여행이었다. 정옥숙은 첫 외국 여행이라 설렜고 최진실은 정서적 지지, 매니저 역할 등을 잘해준 정옥숙한테 선물이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교포 2세, 한국인 입양아 등 젊은이들이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팀을 관심있게 지켜봤고 입양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데 연대감을 느껴 조력자가 돼 준다. 스웨덴 [[웁살라]] 숙소는 교포들의 집이었고 그들의 환대를 받는다. 촬영을 끝내고 스웨덴을 떠나는 날 교감을 나눈 입양아 중에는 공항까지 나와 준 사람도 있었는데, "영화 촬영이 위안이 되었다"고 말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Qe57mjP3Hec)]}}}|| || {{{#FFFFFF ▲ '''1991.11.18 다큐《인간시대》'''}}} || 말 11월,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에 연예인으로서는 국민배우 [[안성기]]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했다. 43%의 시청률이 나오면서 대박이 나고 최진실은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친근한 서민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남녀노소 세대 불문 전 국민적 호감을 얻는다.[* 특히 중장년층들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되어 많은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고 이후 야무진 똑순이 이미지가 각인되어 더욱더 사랑을 받았다.] 1992년 1월 MBC 드라마《약속》에 출연하여 최고시청률 41.5%를 이끌며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만드는 서막을 올리게 된다. 1992년 3월 9일부터 배우 [[하희라]] 후임으로 MBC FM <0시의 데이트> DJ가 된다. CF 모델, 텔레비전 배우, 영화 배우까지 골고루 거친 후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던 차 라디오 DJ 제의가 들어오자 냉큼 받았다. 매일 자정부터 1시간 동안 진행했다. 최진실은 발성상 비음이 약간 섞이고 발음이 부정확한 경향이 있어 음성 연기의 어려움도 경험하지만 자신의 실수조차 좋게 봐주는 청취자들 덕분에 힘을 얻는다. 라디오 진행을 맡은 지 2달이 지날 무렵 MBC《질투》출연 제의가 들어왔고 두 일을 병행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드라마 촬영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고 자정에 DJ 박스에 앉으면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급기야 드라마 촬영 후 귀가하는 차 안에서 졸도해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자 <0시의 데이트> 측에 양해를 구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6월 MBC 드라마《[[질투]]》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서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최고의 인기스타'''로 대한민국을 흔들어 버린다.《질투》의 최고시청률은 56.1%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흐름이 바뀌어 트렌디 드라마가 대거 제작된다.《질투》는 윤명혜 원작 <내 사랑 기나긴 그림자>를 [[한국일보]] 기자 출신 최연지 작가가 각색한 작품으로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실감나게 그린 드라마였다. 최진실이 맡은 '유하경' 역은 여행사 직원으로 1989년 외국여행 전면 자유화 직후의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젊은이들이 매우 선망하는 직업군이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1387772|#]]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편의점, 피자가게는 젊은이들을 흥분시켰고 내용에 걸맞는 경쾌한 OST도 대박이 나 [[싱어송라이터]] [[유승범]]은 이 곡으로 가요 프로그램 1위도 한다. ||
{{{#!wiki style="margin: -7px -10px" [[파일:드라마질투-1.gif|width=100%]]}}}|| || {{{#FFFFFF ▲ '''드라마《질투》'''}}} || 《질투》는 '신세대', 'X세대', '신인류'라는 신조어로 해석되던 1990년대 전반 젊은이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다룬다. 오늘날 한국 드라마 체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킨 '트렌디 드라마'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전의 대다수 드라마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이전 드라마가 흔히 다루던 '재벌가의 감춰진 비극', '버림받은 여자의 복수극', '화목하지만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의 일상' 같은 레퍼토리를 거부했고, '인과응보', '권선징악' 이라고 불리는 고전과 동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교훈성'이라는 주제를 걷어차버린다. 대신 20살 중반부터 30살 초반 청년들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스케치했다. 수도 [[서울특별시|서울]] 번화가 몇 곳에만 존재하던 편의점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자 수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밤중에 그것도 음식뿐 아니라 생필품까지 갖춘 특이한 가게에서 라면, 김밥을 먹는 주인공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이 나누는 경쾌한 대화나 그들의 의식주를 따라 하고 싶은 욕구는 젊은이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질투》직후 출연한 MBC 드라마《매혹》은 대학을 갓 졸업해서 사회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담았는데 사회적으로 한창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던 광고업을 배경으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동기동창생들끼리의 사랑과 우정을 빠른 속도로 그렸다.​ 하지만 시청률은 상당히 저조했고 흥행에 참패했다. 이어 영화《숲속의 방》에서 [[86세대]]를 상징하는 운동권 대학생 '소양' 역을 맡게 된다. 최진실은 사회의식이 담긴 작품으로까지 활동 외연이 넓어진다. 드라마《매혹》에 이어서 영화《숲속의 방》까지 흥행에 참패했지만 최진실의 무섭게 치솟는 위상과 인기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1993년 MBC 드라마《[[폭풍의 계절]]》에서 배우 [[김희애]]와 투톱으로 출연하였다. 브라운관 트로이카였던 최진실과 김희애의 동반 출연으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당시 홍보 문구가 '연기력의 김희애냐 vs 인기의 최진실이냐'였다.] 시청률은 평균 34.2% 최고 52.1%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대선배였던 김희애가 더 메인 주인공이었지만 최진실도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력까지 인정받게 되고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영화《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출연한다. 충무로 트로이카였던 [[심혜진]]과 투톱이었고 친구 사이임에도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 연기를 보여줘 관객은 이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1994년 영화《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 출연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소설가 [[양귀자]]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 새 장을 연 작품이다. 최진실은 사회적으로 무게감 있는 작품에 출연함으로써 연기 변신을 꾀하여 청춘스타 이미지에 지적인 이미지까지 더하게 되고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를 받는다.''' 이 작품의 스크립터가 [[인정옥]]이었다. 영화《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년)의 촬영을 끝낸 후인 1994년 2월에 [[SBS]]와 출연 계약을 맺었다. TV 드라마 분야에서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6촌 오빠 배우 [[최재성(배우)|최재성]]과 연기합을 맞출 뻔 했으나 불발되고 배우 [[이병헌]]이 상대 배우로 선택되며 [[SBS]] 주말 드라마《사랑의 향기》에 출연한다. [[사랑의 향기]]는 전체 시청률 순위에서 SBS 프로그램 중 최고 등수인 4위를 기록하는 등 최진실은 SBS에서도 준수한 성과를 내 [[SBS 연기대상]]에서 2년 연속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어 배우 [[박중훈]]과 영화《마누라 죽이기》로 두번째 호흡을 맞추며 커리우먼인 소영을 연기하였다. 12월 17일 개봉한 후 보름만에 관객 10만 명을 돌파해서 흥행에 대성공한다.[*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할 뻔 했는데 주연 배우 [[박중훈]]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최진실은 인기상만 주구장창 받다 이 작품으로 1995년'''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SBS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 미국 로케이션 촬영 중이라 어머니 정옥숙이 대신 수상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마누라죽이기-1.gif|width=100%]]}}}|| || {{{#FFFFFF ▲ '''영화《마누라 죽이기》'''}}} || 1995년 상반기에는 SBS 드라마《아스팔트 사나이》와 《째즈》영화《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와《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두 편에 출연한다. 연말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SBS]]《째즈》와 SBS《아스팔트 사나이》가 [[동남아시아]]에서 방영되고 좋은 반응이 나온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미국]] 로케이션 작품이라 스케일이 컸고 최진실은 자동차 디자이너 오화련 역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하반기에는 MBC 드라마《[[아파트]]》에 [[채시라]]와 투톱으로 출연한다. 브라운관 트로이카 라이벌인 최진실과 채시라가 동반 출연한다 하여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됐었고 많은 기대를 받았다. 허나 시청률은 기대보다 중박 정도였고 반응도 미적지근하였다. 1995년 후반기에는 전문적으로 연기를 연구하기 위해 [[중앙대학교]] 예술전문대학원 공연예술학부 영화학과 지도자 코스에 진학한다. 최진실은 연극영화학과에서 호흡이나 발성부터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또, 데뷔 이후 강행군의 연속이었던 상황이라 책을 읽으며 에너지 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텔레비전보다 파급력이 적은 영화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때 선택한 영화가 '고스트 맘마'였다. 1996년 영화《고스트 맘마》가 서울 관객 30만 명이 들어 흥행에 대성공한다. 이 영화는 웃기고 웃는 연기를 주로 해온 흐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가 성공하자 CF 출연 섭외가 밀려들고 '제2의 전성기'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 즈음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실험 영화《[[홀리데이 인 서울]]》출연 제의를 받는다. 이 영화에서 강우석은 제작자였는데 최진실이 맡은 퇴폐적인 모습의 '호텔 전화 교환수' 역은 원래 배우 [[김남주]]의 몫이었으나 영화사와의 의견차이 때문에 도중하차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최진실에게 강우석이 부탁을 해서 성사된 출연이었다. 강우석은 파격적인 출연료로 최진실의 의리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배우 [[장동건]], 배우 [[김민종]], 배우 [[진희경]] 등도 출연한 영화로 1990년대 문화 아이콘 [[왕가위]] 감독의 연출 스타일로 만들어져 최진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된다. 1997년 영화《베이비 세일》은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지만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 된다. 이 영화에 임할 때 '마음 푹 놓고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고 그러자 이전보다 감정 잡는 것이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로소 연기가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껴져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기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희열을 경험한다. 상반기에는 MBC 미니시리즈《[[별은 내 가슴에]]》, 하반기에는 MBC 주말연속극《[[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한다. 데뷔 10년차가 된 1997년, 나이로도 30대에 접어들면서 '최진실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SBS와의 계약 위반을 감수하면서 출연한 트렌디 드라마《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여전히 선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의상디자이너 이연이 역을 잘 소화해내 친정 MBC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별은내가슴에-1.gif|width=100%]] [[파일:별은내가슴에-2.gif|width=100%]] [[파일:별은내가슴에-3.gif|width=50%]][[파일:별은내가슴에-4.gif|width=50%]] [[파일:별은내가슴에-5.gif|width=100%]]}}}|| || {{{#FFFFFF ▲ '''드라마《별은 내 가슴에》'''[* ~~긴머리 가발이 옥의티이긴 하나~~ 시놉이 바뀌어[* 이연이와 소피아가 쌍둥이 입양아 설정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준희([[차인표]])와 소피아는 연인 사이었고, 소피아의 쌍둥이 동생인 이연이와 이준희가 이어지는 설정이었다는 것. 이연이와 이준희가 이어지고 강민([[안재욱]])과 양순애([[전도연]])가 이어지는 것이 원본 시놉이었으나 강민 캐릭터가 신드롬급으로 인기가 많아지자 시놉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 이준희, 소피아, 양순애 캐릭터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으며 이연이 캐릭터 또 한 디자이너로서 성공하는 성장 스토리가 흐지부지되었다.] 극 전개에 허술함이 있음에도 눈빛, 말투, 몸짓, 제스처까지 이연이와 소피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1인2역 연기가 완벽했다.]}}} || 뒤이어 출연한 주말연속극《그대 그리고 나》에서도 커리어우먼 윤수경 역으로 출연해 시청률 62.4%라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특히, 최진실은 트렌디 드라마의 발랄한 이미지와 주말 연속극의 중후한 이미지를 동시에 1997년 한해에 보여줌으로써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다.''' 즉 '''중후한 이미지를 성공시켜 인기 연착륙에도 성공해 30대의 포문을 화려하게 열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그대그리고나-1.gif|width=50%]][[파일:그대그리고나-3.gif|width=50%]]}}}|| || {{{#FFFFFF ▲ '''드라마《그대 그리고 나》'''[* '수경' 캐릭터의 성격이 가장 잘 표현 된 장면이다.]}}} || 11월 영화《[[편지]]》가 개봉된다.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관객 80만 명이 넘게 들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1998년 '''[[청룡영화상]]에서 '한국영화최다관객상'을 받는다'''. 이 영화는 MBC <별은 내 가슴에>가 막 뜨고 있을 무렵인 1997년 4월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영화 <고스트 맘마>로 워밍업을 했지만 최루 영화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수용한 이 영화에 대해 '울고 짜는 연기는 솔직히 좀 자신 없는데...' 입장이었다가 대본을 받아보니 서사가 흡인력이 있어 응낙했다. 당시 신인배우였던 상대 배우 [[박신양]]은 일면식이 없던 연기자였지만 같이 연기를 하면서 실력에 놀라게 되고 매력적인 배우라고 평가한다. 촬영지 '[[경강역]]'은 여행 장소로 각광 받고 삽입된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도 화제가 된다. 감정 소모가 많은 작품이라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나고 무척 지쳐 있을 무렵 MBC <그대 그리고 나>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
{{{#!wiki style="margin: -7px -10px" [[파일:최진실-편지.gif|width=50%]][[파일:영화편지-1.gif|width=50%]]}}}|| || {{{#FFFFFF ▲ '''영화《편지》'''}}} || 1998년 MBC《추억》에서 광고회사 직원 서인영 역을 맡는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한국 배우로 최진실이 뽑힌다. 1998년 10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고 최진실도 일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일본으로 '''한류진출'''을 준비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드라마추억-1.gif|width=100%]]}}}|| || {{{#FFFFFF ▲ '''드라마《추억》'''}}} || 1999년 MBC《[[장미와 콩나물]]》에서 손미나 역을 맡는다. 배우 [[김혜자]]와의 연기 궁합이 좋아 엄청난 환호를 받는다. 후에 김혜자와 영화《마요네즈》로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마요네즈》는 전국 관객 약 25만 명 추정. 기혼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설 연휴 영화 [[쉬리]] 기간흥행 속에서 나름 선전했다. 2000년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이기도하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 '마요네즈' 작가 전혜성이 각본도 맡았다. 희생하는 여성이 아닌 욕망하는 여성을 테마로 다룬 이 소설은 연극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마요네즈》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자식들이 이 영화를 보게 하자’는 의도로 기획한 영화였고 상대 배우로 [[김혜자]]가 먼저 캐스팅 되는데 김혜자가 “딸 역할을 진실이가 해줬음 좋겠다”고 하여서 캐스팅 됐다고한다.[[http://cine21.com/news/view/?mag_id=53465|#]] 2000년 11월 영화 '판타지 로망 대서사시'《[[단적비연수]]》는 서울 관객 61만 명, 전국 관객은 177만 명을 기록했지만 제작비 47억 원에 비해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 작품 퀄리티나 평도 안 좋았다.] 그 시점 역대 최고 제작비가 투여된 한국 영화다.[[http://m.koreatimes.com/article/20010105/20545|#]] 2000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4위를 기록하고 2001년 [[대종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했다.[[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0/021015000200011010332003.html|#]] [* 최진실은 일찌감치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고 판단을 했고 1990년 영화 '꼭지딴', 1991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2년 영화 '숲속의 방', 1994년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9년 영화 '마요네즈', 2000년 영화 '단적비연수' 등을 통해 캐릭터 다변화를 이뤘다.] 2000년 12월 5일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했다. [[일본]]을 시작으로 한류 진출과 [[2000년대]] 한국 [[영화]]계 부흥기에 맞춰서 영화 필모를 더 쌓을 계획이었던 최진실은 '''계획 실행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1군 국민 연예인 위상'''과 인기를 유지했고 각종 대중지표와 설문, 인기도 조사 '''[[고인물]]'''이었다. 2002년 MBC《그대를 알고부터》에서 무역회사 직원 이옥화 역을 맡는다. 중국에서 성장하고 대학도 나온 [[조선족]] 이옥화가 한국에 와서 겪는 문화적 충격과 좌충우돌이 연기의 포인트다. 최진실은 실감나는 [[중국조선어|연변어]] 구사를 위해 코미디언 [[정선희]]의 도움을 받았다. 겸사겸사 정선희와 광고도 같이 찍게 된다. 2002년 4월 28일부터 2002년 10월 20일까지 거의 반 년 동안 방영된 드라마로 태아 최준희와 5개월간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최진실은 배우 [[김혜자]]와 콤비 연기를 많이 했다. MBC <당신의 축배>(1989년), MBC <그대 그리고 나>(1997년), MBC <장미와 콩나물>(1999년), 영화 <마요네즈>(1999년), MBC <그대를 알고부터>(2002년) 등에 같이 출연했다. === 2003년 ~ 2004년 최초의 암흑기 === 2002년 12월 남편 [[조성민]]이 최진실과 이혼하고 싶다며 갑작스레 [[기자회견]]을 열었고 조성민이 [[가출]]하여 강제로 [[별거]]에 들어갔다. 조성민과 [[내연녀]] 심마담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일방적인 거짓 [[언론 플레이]]와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명예훼손]]을 일삼아 최진실은 '''10년 넘게 착실히 쌓아온 [[국민배우]] 이미지에 엄청난 손상을 입었고 사회적 위상이 한순간에 추락했었다.''' 안티들도 급격히 생겨나 심각한 [[인격모독]]과 루머로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했었다. 자세한 내용은[[최진실/사건사고| 최진실 사건사고]]를 참조.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 대중들과 연예계가 워낙 최진실에 호의적이어서 옹호여론도 팽팽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9F8krkUzd5I)]}}}|| || {{{#FFFFFF ▲ '''2004.04.19 37살 당시'''}}} || 2004년 MBC《장미의 전쟁》에서 산부인과 의사 오미연 역을 맡았다. 의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최수종]]과 호흡을 맞춘다. 이 작품은 [[비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장미의 전쟁》의 경우 KBS2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채시라]] 주연의 <애정의 조건>을 방영했다.[* 주말 저녁 8시대 다수 시청자들은 산부인과 의사 최진실과 전업주부 채시라 중에 전업주부 채시라를 선택해서 <애정의 조건>은 최고 시청률 45.4%를 기록했다. <애정의 조건> 작가 [[문영남]]은 다음 해 2005년에는 최진실을 통해 시청률 재미를 또 톡톡히 보게 된다.] PD 이창순은 배우 [[최수종]]도 동반 출연하는 김에 MBC <질투>(1992년)의 시퀄처럼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질투>의 주제가와 장면을 예고로 내보낸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16&aid=0000129844|#]] 이 드라마는 지각 대본 문제로 김선영 작가에서 노유경 작가로 교체된다. 작가 교체는 극 전개나 캐릭터의 색깔을 뒤흔드는 모험이자 무리수라 평균 시청률도 12.5%에 머문다.[* 하지만 OST인 가수 린애의 '특별한 이유'는 인터넷 음악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클릭수를 자랑했다.] 최진실 데뷔이래 처음 겪는 암흑기였다. [[이혼]] 사태와 드라마 작품까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최진실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라는 평이 지배했다. 때문에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 역 출연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레 하차했고, 이어 영화 메모리의 가영 역 출연 예정이었지만 영화 제작까지 무산되었다. 또, 영화 '실종'으로 [[싸이코패스]] 혜정역을 연기 할 예정이었으나 이 영화 또한 제작이 무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최진실은 영화계가 날 버린 것 같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룡영화제]]측에서는 최진실에게 꽃다발을 보내거나 시상자로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고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03/2004020370036.html|#]] === 2005년 ~ 2008년 화려한 복귀 === 그러나 2005년 8월 KBS 드라마《[[장밋빛 인생]]》에 맹순이 역을 맡아 적나라한 실감나는 서민 연기와 암환자 연기로 대중을 감동시키고 복귀에 대성공한다. [* MBC 전속 배우였는데 KBS 드라마에 출연한거다. 그 해 MBC 드라마 출연 계획이 없어 경영진과의 딜 끝에 KBS에 한 해 잠깐 출연한 건데 거기서도 잘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KBS 사장 [[정연주(언론인)|정연주]]도 최진실에게 고마워한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0050961|#]]] 그 결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2005년을 빛낸 탤런트'에서 1위'''를 하고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과 인기상, 2006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다. 최진실은 기자들과 [[악플러]]들의 공격에도 굳건히 또 다시 전성기를 누림과 동시에 연기력까지 제대로 인정받아 '''국민배우 명성을 다시 되찾았다.''' 다시 MBC로 돌아와 2007년《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 이세영 역으로 출연한다. 호흡이 긴 일일드라마를 잘 리드해 준수한 시청률로 MBC에 보답을 한다. MBC 사장 [[최문순]]도 그런 최진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140부작이라 MBC와의 전속 계약 시간을 한번에 처리하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었다. 2008년 MBC 드라마《[[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하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첫 트렌디 드라마의 주역인 최진실은 '''중년 트렌디 드라마'''라는 새 장도 여는 쾌거를 이루었다. OST인 가수 [[변진섭]]의 '사랑이 올까요'도 경쾌한 멜로디로 인기를 끌었다.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는 2005년 곡인데 3년 후 이 작품에 삽입되면서 재조명을 받게 되고 2008년·2009년 연속으로 노래방 애창곡 1위에 오르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라드 곡으로 자리매김한다. 그해말, '''[[한국갤럽]] '2008년을 빛낸 탤런트'에서 5위'''를 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내마스-1.gif|width=100%]] [[파일:내마스-2.gif|width=100%]]}}}|| || {{{#FFFFFF ▲ '''드라마《내 생에 마지막 스캔들》'''}}} || [[OBS경인TV]]에서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토크쇼MC를 맡았다. 최진실의 첫 TV 예능 진행이라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하여 시즌2 제작이 예정되었다. ​​최진실은 [[유재석]]보다 많은 회당 출연료로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은 것은 물론 프로그램 홍보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받았는데 OBS 최대 주주 <영안모자>의 계열사 <대우버스>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대우버스 4700대에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이미지를 랩핑해 홍보에 나섰다.[[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43|#]]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는 광고 시장 불황 속에서도 방송 6회 만에 광고가 완판되는 성과를 올렸다.[[https://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04301034231001|#]] == 위상 그리고 인기 == * 최진실은 1988년 [[삼성전자]] CF 모델, 1989년 [[MBC]] 특채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광고판, 방송판, 영화판 등을 넘나들며 약 20년간 최정상의 범국민적 인기를 누린 국민 배우이다. 특히 '''1990년대, 20세기 후반의 오랫동안 지속적이면서 높았던 인기는 어떤 배우, 연예인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지금은 많게는 20년 이상 넘게 꾸준한 인기로 사랑받는 국민MC [[유재석]]이 연예계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 [[1990년대]]에 텔레비전 배우로는 [[김희애]], [[채시라]]와 함께, 영화 배우로는 [[강수연]], [[심혜진]]과 함께 각기 '트로이카'라고 언론에서 불렸다. 최진실이 두 분야의 공통 분모인 것이 1990년대 최진실의 독특한 포지션을 말해준다. 일찌감치 신비주의 벗어던진 예능계 블루칩이었고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세 번 속은 연예인으로 2006년 12월 시점 최진실이 유일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0052561|#]][[https://youtu.be/Zb3JHUP2GQY|관련영상]] * MBC 라디오 방송국 개국 시기인 196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 [[최불암]]•[[김혜자]]•[[강수연]] 등], MBC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 시기인 197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 [[고두심]]•[[이덕화]]•[[유인촌]]•[[장미희]]•[[원미경]]•[[김미숙(배우)|김미숙]]•[[이미숙(1960)|이미숙]]•[[이혜숙]]•[[박상원(배우)|박상원]]•[[임성민(남배우)|임성민]] 등], 흑백TV에서 컬러TV로 전환되는 시기인 198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 [[최명길(배우)|최명길]]•[[황신혜]]•[[김청]]•[[박순애(배우)|박순애]]•[[최재성(배우)|최재성]]•[[최민수]]•[[최수종]]•[[박중훈]]•[[문성근]] 등], 동년배 배우들이지만 1980년대 중반에 데뷔해 이미 왕성하게 활동한 배우들[* [[김희애]]•[[채시라]]•[[하희라]]•[[김혜수]]•[[최수지]]•[[이미연]]•[[전인화]] 등], 비슷한 시기에 영화계에 데뷔한 CF스타 [[심혜진]] 등과 공생한 1990년대 전반기에 최진실은 깜찍한 용모, 여유로운 표정, 유머감각, 진정성 있는 말투, 녹록치 않았던 성장기를 공개하는 담대함, 준수한 연기력 등이 어울어져 남다른 아우라가 생겼고 그것이 최고의 인기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원동력이 된다. * 배우 [[안성기]]는 1989년 영화 <남부군> 제작사 사무실에서 최진실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최진실은 그늘지지 않고 상큼하고 발랄한,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암울한 시대를 거치다보니 그 당시 배우들은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는데, 최진실의 경우 빨치산을 돕는 간호사 역할을 맡았는데도 밝은 분위기가 났다. 우리와는 다르구나, 세대도 다르고 느낌도 새로운 새 시대의 배우가 나왔구나'라고 했단다.[[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3477​|#]] [[1988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 경제가 도약을 하자 [[텔레비전|컬러TV]]가 널리 보급이 되고 대중문화도 활기를 띠는데 이 때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절묘했던 것. 실제로 삼성전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컬러TV 인지도를 크게 올리고 최진실을 통해서는 가전제품 판매 1위를 달성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1&oid=028&aid=0002329276|#]][[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521750|#]][[https://web.archive.org/web/20031014070716/http://sports.hankooki.com/starstory/people/cjs/cjs4.htm|#]] * 동시대 톱스타들의[* 기존의 김희애•채시라•하희라•김혜수 및 심혜진을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고현정]]•[[오연수]] 등] 건재는 물론 후배들[* 동갑이지만 1992년 [[미스코리아]]로 선발돼 1993년부터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해 1994년부터 주연급으로 상승한 [[이승연]], 1994년 최고의 신인으로 급부상한 [[심은하]], 1994년에 데뷔한 [[김남주]], 1967년생이지만 1993년에 데뷔해서 1994년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급부상한 [[차인표]] 등] 특히, [[신은경(배우)|신은경]][* 15세였던 1988년에 데뷔한 신은경은 1994년 [[종합병원(드라마)|종합병원]]을 기점으로 X세대를 대표하는 톱스타로 부상함.]•[[김지호(배우)|김지호]]•[[장동건]]•[[이병헌]]•[[배용준]]•[[김민종]]•[[김희선]] 등 [[X세대]] 스타들과 영화계에서 [[정선경]]•[[진희경]] 등 색다른 개성의 배우들이 등장한 1990년대 중반에도 최진실은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며 승승장구했고 김희선•심은하 등이 최고 주가를 달린 1990년대 후반에도 최진실은 탁월한 작품 선택이라는 변곡점을 통해 상승 곡선을 이어가며 여전히 높은 인기를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10년 넘게 부동의 톱스타 자리를 유지했다. * 결혼이 필수이던 시대에 연예인의 연애와 결혼은 연예 기자들의 주 관심사였는데 최진실의 연애와 결혼도 늘 기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라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전반기에는 변진섭, 후반기에는 이병헌, 재벌 2세 등이 기사에 오르내렸다. 얼마나 관심이 과했는지 광고계에 종사하는 친척 오빠를 연인으로 오해해 기자들이 난리를 치기도 한다. 연예계 입문 13년차인 2000년에도 최진실의 연애나 결혼이 최고 연예가 뉴스라며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을 정도다. * 연예계 데뷔 초기부터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로 인해 부작용도 많이 겪지만 진솔한 모습으로 그 상황을 처리해 나갔다. 2005년 이후에도 베테랑 배우로서 대중에게 계속 존재감을 어필했다. 2007년에는 배우로서, 아들과 딸을 둔 어머니로서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할 정도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자 2008년에는 귀여운 외모에 가려졌던 카리스마와 통찰력이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게 되었다. 토크쇼 진행자는 최진실에게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말하고 최진실은 '[[혜안|메사끼]]'를 말하냐고 응답했다. [[최문순]]도 '행동하는 지성' 최진실에 주목을 했다.[[https://archive.is/VIEs|#]] * 1990년대에는 각종 인기조사에서 계속 높은 순위에 들었다. 귀여운 외모에 털털하고 친근한 딸, 누나, 언니, 동생 이미지로 최진실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면서 호랑이 등에 탄 형국으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 1990년대 내내 예능 단골 손님이었고 프로그램 기획 능력도 탁월해 예능 PD들은 첫회에 최진실을 출연시켜 고칠 건 고치고 보강할 건 보강하곤 했다. 각종 언론과 기관에서 주관한 호감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석권했다. 그렇게 호감도가 높으니 2,30대 남성이 뽑은 1등 신부감, 가장 보고 싶은(적합한) CF 모델, 가장 예쁜 얼굴 등 다양한 조사에서 대다수 1위를 차지했다. 여러 조사 중 근검절약형 연예인에선 항상 1위를 차지하며 '저축왕 이미지'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한국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소비의 중요성이 공유되자 최진실도 전향적 태도를 취했다. * 1990년에 부활한 스포츠조선의 [[청룡영화상]]에서 1990년 이래 1996년과 1999년을 제외하고 8번이나 독자•관객들이 뽑는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에 영화배우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 최진실은 자신이 연예인으로서 그렇게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을 틈나는 대로 대중을 향해 직접 하면서 엄청난 인기가 주는 높은 긴장도를 낮추는 행동을 한다. 1995년 SBS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에서 기자 역을 맡은 [[이승연]]의 외모와 스타일이 맘에 들어 먼저 친구 제의를 할 정도로 연예계 내에서도 소탈한 모습을 취했다.[* 최진실은 이승연과 성향이 잘 맞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나 연기 합을 맞춰보고 싶어했는데 특히 <델마와 루이스> 류의 워맨스 영화에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 한국 연예계(드라마, 영화, 예능 등)에서는 2010년대부터 워맨스, 브로맨스 소재가 대거 등장. <델마와 루이스>(1991년)는 대표적인 워맨스 영화로 워맨스, 브로맨스 영화의 시조새쯤 된다.] 배우 [[이태곤]]은 2010년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최진실의 소탈함을 증언하는데 "신인때 최진실과 보험광고를 찍었는데 최진실은 톱스타이면서도 나한테 무릎 안아프냐고 걱정해 주고 스태프들한테 연기하는 사람 무릎 아프다고 소리쳐 줬다. 내가 더 잘 나올 수 있도록 연기 조언까지 해줬다"고. * 1990년 출연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시초이고 ​만화적 구성을 사용하여 새로운 영화문법을 제시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16083588|#]] 1990년에는 영화 <꼭지딴>에도 출연하는데 특별히 무술 훈련도 따로 받아 준수한 액션 연기를 보여줬고 한국 영화 여전사 계보에서 [[시조새]]쯤 랭킹된다.[[https://archive.ph/20140215233201/http://today.movie.naver.com/today/today.nhn?sectionCode=MOVIE_TUE§ionId=1074%23cbox_module|#]] * 1990년 MBC <두 권의 일기>, 1991년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예요 2>에서 고등학생 연기를 했다. 결과론적으로 이미 하이틴 스타로 유명했던 동년배 배우 [[하희라]], [[채시라]], [[김혜수]] 등과 이미지상 밸런스를 맞추게 된다. * 최진실은 배우가 방송사 분장실을 사용하던 관행을 깨고 개인 메이크업아티스트 시대를 열었다. 그 만큼 연예인의 자율성이 신장된거다. 그때 함께 했던 메이크업아티스트가 김선진이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662689|#]] * 1993년까지 MBC에서 활동하던 최진실은 톱스타답게 1994년 2월 SBS로 스카우트될 때 최고 대우인 '회당 300만 원에 드라마 출연 100회' 전속 계약을 맺었다. 즉 드라마 100회 출연을 하면 매회 300만 원씩을 받아 총 수입이 3억 원이 된다는 거다. MBC에서 활동할 때에는 방송사 자체 출연등급표에 따라 출연료를 받았다.[* [[채시라]], [[김희애]] 등 역시 그랬는데, 주 수입을 CF모델료로 채워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신생 방송사 [[SBS]]는 거물 연예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하기로 방송계에서 유명했는데[* 지역민방이 생긴 1995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한정 신생 민영방송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함으로써 전국 방송 제한에 따른 손해(CF 계약 만료 등)를 메꿔주었다. 즉 MBC나 KBS는 전 지역으로 송출이 되나 SBS는 수도권만 송출이 돼 광고 효과가 떨어져 광고주 입장에서 SBS 출연 배우는 광고 모델로서 메리트가 떨어졌다.], 최진실도 방송사 이동으로 한순간에 역대 최고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다. 이후 SBS에서 2년간 드라마 [[사랑의 향기]]•[[아스팔트 사나이]]•[[째즈]] 등에 출연하면서 SBS 인지도 상승에 기여한다. 하지만 100회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1995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주말연속극 [[아파트(드라마)|아파트]]에 출연을 하게 된다. <아파트> 출연은 MBC 특채 배우로서 최진실 스스로 MBC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MBC가 SBS 전속 배우 최진실을 다시 출연시켰다는 점, SBS와 전속 계약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SBS가 기꺼이 타방송사 출연 그것도 방송사들의 간판 드라마인 주말극에 출연하는 것을 허용해준 점에서 최진실의 위상을 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진실이 <아파트>에 출연 중인 상황에서 1996년 3월 SBS는 최진실과 전속 계약을 다시 맺었다. 이후 SBS는 여러 번 최진실에게 드라마 출연을 제안하게 되는데 최진실은 영화배우•CF모델이기도 했기에 영화 촬영 등을 이유로 모두 고사하게 되면서 출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무렵인 1997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 출연을 결정하게 된다. <별은 내 가슴에> 출연에 대해서 SBS는 1995년때와는 달리 계약대로 최진실에게 위약금을 요구했고 MBC는 그 위약금을 대신 지급하기로 했다.[[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1997&M=02&D=17&ID=9702172602|#]] 그러면서 최진실은 SBS 전속 배우에서 MBC 전속 배우가 된다. 즉 방송사 간에 최진실 쟁탈전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의미다. * 1994년말에 MBC <신(新)인간시대>에서 신년 특집으로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이라는 제목으로 분야 별 스타를 조사했는데 최진실은 여자 연기자 부문 1위에 선정되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시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정한 지 6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타임캡슐을 파묻는 행사를 하고 '역사적으로 남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최진실의 인터뷰도 거기에 담겼다. 이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에 개봉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56&aid=0010099890|#]] * 1990년대 후반기에는 기존의 상큼하고 친근한 젊은이 이미지에 기혼자 혹은 직장인을 안정감있게 잘 표현해 10대 이상 대중에게 골고루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등 계속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중장년층, 노년층까지 아우르는 인기라 파워가 굉장했다. * 최진실은 특히 데뷔 10년차인 1997년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모두 최대 흥행작들을 양산했다. 일단 3월에 MBC 트렌디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의상디자이너 '이연이'로 출연해 연예계 입문 10년차에도 여전히 발랄한 이미지를 선보이며 신세대들의 사랑을 받았다. 7개월 후인 10월에는 MBC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서 성숙한 커리어우먼과 똑똑한 기혼자 역할을 맡아 58회 동안 극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대 그리고 나> 출연은 최진실의 주말드라마 징크스도 완전히 깨버리는 동시에 선배 배우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 즉 명실상부 연예계 내외부에서 무게감 있는 배우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대 그리고 나>는 평균 시청률 42.5%를 기록하게 되면서 최진실 최대 흥행 드라마로 남았다. <별은 내 가슴에>도 평균 시청률 40.2%였다. 스크린에서도 11월에 개봉한 영화 [[편지]]에 국문학과 대학원생 '정인'으로 출연해 서울에서만 72만 명의 관객을을 모으며[* 전국 관객수는 약 200만 명으로 추정] 그해 한국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는 최진실 역대 필모그래피 중 최고 흥행 영화였다. <편지>는 러시아 유학파 배우 [[박신양]]과 호흡을 맞췄고 좋은 하모니를 보여주었다. 1997년 야망을 이룬 유명인 조사에서 정치인 1위 김영삼, 경제인 1위 정주영, 스포츠인 1위 박찬호와 함께 연예인 1위는 최진실이 선정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160072|#]]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 영화스타의 스타파워 분석’ 보고서를 냈고 최진실은 [[최민수]]와 함께 관객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배우로 꼽혔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18242|#]] * 1992년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대통령 [[노태우]]는 저축유공자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1992년 [[KBO 한국시리즈]]에서 시구를 했고 한국시리즈 연예인 시구는 최진실이 최초였다. *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었다. 최진실은 금융실명제 홍보 모델로 발탁되어 투명한 금융 흐름이 가능해졌음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94년 김영삼은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 인기 스펙트럼이 넓어 거의 모든 연령대의 유권자들한테 호감형이었기 때문에 서민 이미지가 아쉬웠던 여당 [[신한국당]]에서 1996년 최진실을 자당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연예인으로서 정당의 광고 모델이 된 것이다. 이로써 정치가 최진실을 타고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생활 정치가 도래하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라는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는 권위주의가 팽배했는데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그 시절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그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묘수였던 셈이다. [[신한국당]]에서는 "권위주의 시대 정치를 탈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며 "최진실의 인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 당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고, 최진실도 "모델로서 인연을 맺은 것일 뿐이다, 정당에 입당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인터뷰]]하러 가기도 했다. 이듬해 8월엔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국가홍보 CF에도 출연[* [[최불암]], [[조용필]], [[채시라]], [[심은하]], [[배용준]], [[HOT]], [[S.E.S]] 등 여러 스타들과 함께 출연했다.]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최진실을 대한민국 최고 국민배우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 1998년 최진실은 MBC <추억>에 출연하면서 이혼 금기 사회에서 '이혼' 이미지를 과감하게 입는다. 같은 해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한국 배우로 뽑히는데 [[일본어]]를 공부하며 '''[[일본]] [[한류]]진출'''을 모색했다. * 1998년에는 건국 50주년을 맞이해 MBC가 한국갤럽에 의뢰한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 '해방 이후 지난 50년간 활동한 우리나라 모든 연예인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응답자에게 최대 3명을 요구함.][* 출처는 [[https://panel.gallup.co.kr/Gate/Panel/F023.aspx|갤럽DB]]]에서 [[그대 그리고 나]] 등으로 정상의 인기를 여전히 누린 덕분에 '''[[탤런트]]•영화배우 부문에서 전 연령층을 합쳐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신세대층(11~24세)에서 3위(40명), 청장년층(25~39세)에서 2위(44명), 중년층(40~59세)에서 5위(26명)를 기록하며 전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기존과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본 조사가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이기 때문에 '''연예계 전 부문을 합쳐 지난 50년간의 연예인들'''을 대상으로도 국민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최진실은 신세대층에서 공동 11위(13명), 청장년층에서 4위(26명), 중장년층에서 6위(19명)를 기록하며 역시 '''비교적 모든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전체 연예인 중 5위'''를 차지했다.[* 1위는 1995년 이후 연예계 역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 [[김국진]]이, 2위는 흑백TV 시절부터 국민적 인기를 누린 20세기 한국 최고의 연기자 [[최불암]]이 차지했고, 엄청난 가창력으로 신드롬급 인기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1980년대 연예계를 리드한 [[조용필]]이 3위, 1990년대 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대의 아이콘 [[김희선]]이 4위였다.] 이를 통해 1990년대 전 기간 동안 최진실이 연예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고 그 영향력과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 1999년 출연 영화 <마요네즈>는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예술영화와의 접속에도 성공했다. 최진실은 실험영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그래서 신인 감독과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0023652|#]] * 2000년 출연 영화 [[단적비연수]]는 관객 177만여 명이 들어 손익분기점은 넘겼으나 역대 한국 영화 최대 제작비 47억 원이 투입된 거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 관객수였다.[[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04|#]] 2000년에는 최진실 캐릭터에 투트랙이 가동이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2000년대 한국 영화 100만 관객 시대에 합류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5살 연하남과의 연애•결혼 발표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국내에 연상연하 커플 신드롬을 만들어 낸다. 후자는 공중전에서 구 시대 유물 [[가부장제]]를 거하게 허물어뜨린 사건이라 한국 사회를 좀 더 유연해지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했다. 또 같은 해 12월에 있었던 결혼식 인터넷 생중계는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의 전국적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직후 전 국민적 활용 사례이자 500,000명의 네티즌이 동시 접속한 작품이라 인터넷 개인방송 맛보기 플랫폼이 돼 줘 한국인의 생활에 인터넷이 더 깊숙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이게 지금의 [[아프리카TV]] 개인방송이나 [[유튜브]] 개인방송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로 프레임이 전환되는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최진실은 4년 후인 2004년 ​세계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싸이월드]]에 가입함으로써 [[메이저 언론|레거시 미디어]]라는 거간꾼 없이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뚫는다. * 2000년 하반기에 2000년대까지 공신력 있는 조사기관이었던 <리스피아르>에서 진행한 연예인 인기도 조사에서 여자탤런트 부문 1위를 차지했다.[[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2004210041879888&select=&query=&user=&site=&reply=&source=&pos=&sig=hgjTSY-gihRRKfX2h6j9Sl-ALmlq|#]][* 2000년 상반기엔 해당 조사에서 4위였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MBC와 전속계약을 다시 맺었다. * 최진실은 2001년 임신 중에 4월에는 남양유업과 광고 계약을 맺을 뻔 했고 출산이 임박한 7월에는 삼성전자 가전제품 광고를 찍었다. 남양유업 광고료가 고가로 잘못 알려져서 소비자의 분노를 샀고 급기야 인터넷에 '안티 남양', '안티 최진실' 카페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 최진실은 남양유업 광고 제의를 거절했다. * 2002년까지 각종 인기조사에서 주요 순위에 들었고 2002년 10월에 조사한 '사귀고 싶은 연상녀' 조사에서 전성기를 다시 누리던 [[이미연]]과 [[이미숙(1960)|이미숙]]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 2002년 1월 KBS <서세원쇼>에 최진영과 출연해 즐거움을 선사했고 홍진경, 정선희 등도 코너를 장식해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면서 이 회차 시청률이 28%로 대폭 상승해 주간 시청률 5위를 기록하는 등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14&aid=0000002854|#]] 2002년 4월 MBC <그대를 알고부터>에서 중국 교포 무역회사 직원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류시원]]과 호흡을 맞춘다. [[김혜자]]와의 합도 관전포인트였다. 연변 언어를 소화하기 위해 [[정선희]]의 도움을 받았다.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연기를 했고 여름을 거치면서 탈진했다는 기사가 나와 대중의 염려를 받는다. <그대를 알고부터> 평균시청률은 16.5%였다. 2002년에는 <[[현대해상]]> 광고 촬영을 같이 하면서 알게 된 [[남궁민]]을 안타깝게 여겨 매니지먼트사를 연결해 주게 되고 그게 발판이 돼 남궁민은 시트콤 '대박가족'에 출연하게 되고 비로소 무명 배우에서 탈출하게 된다. * 2002년 6월 유아복 브랜드 '미아오'를 내놓고 패션업계에 진출한다. 유아복업체 <아비또>와 공동 투자한 '미아오'는 기획홍보 이사 최진실이 상품 기획을 총괄한 브랜드로 '고양이 울음소리'에서 힌트를 얻은 브랜드 이름도 최진실이 직접 작명했다. 아비또 측은 "신규브랜드를 내놓을 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 유통망 확보인데 '미아오'는 [[롯데백화점|롯데]]와 [[현대백화점그룹|현대]] 등 대형백화점 측에서 먼저 입점 제의를 해오는 등 최진실의 유명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말한다.[[https://archive.md/F1Rmp|#]]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은 각각 한국 백화점업계 빅3 중 하나로 최진실은 롯데백화점과 광고모델로서 인연이 있고 [[현대그룹|현대]]와는 [[현대해상]] 광고모델로 인연이 있던 터였다. * [[현대해상]]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 보험이라 최진실은 여러 버전 광고를 찍는다.[[https://www.youtube.com/watch?v=v5Srbxr96pw|관련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YsmUyDvNIQ|관련영상]] 이 해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4위라는 기염을 토해 응원팀 [[붉은 악마]]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라 광고에도 그런 열기가 반영된다. * 최진실은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채시라•하희라•김혜수 등 다른 30대 배우들을 응원하는 입장을 취했다. 2005년 KBS 첫 출연작 [[장밋빛 인생]]에서 적나라한 서민 연기로 다양한 연령층에 화제를 불러모았고 그해 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올해를 빛낸 탤런트'에서 전 성별, 연령층에서 1위를 차지했다'''[[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89|#]]. 최진실의 네임밸류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최진실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매니지먼트사들이 10억 원대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딜을 해왔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004050|#]] 새로 계약을 맺은 매니지먼트사가 최진실과의 계약 성사 직후 코스닥 등록업체 <라이브코드>의 인수 대상이 되면서 최진실의 네임밸류가 또 다시 높이 평가받았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0068974|#]]. 에어컨 전문브랜드 <캐리어코리아>와 전속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0033483|#]] <캐리어코리아>는 최진실을 20대와 중장년층에까지 폭넓은 호감을 받고 있는 배우로 평가했다. * 2007년 MBC <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서 보육원 원장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재룡]]과 호흡을 맞춘다. KBS에서 금의환향한 후 첫 출연한 작품으로 최고시청률 24.6%로 선방을 했다. <나쁜 여자 착한 여자>는 최진실의 첫 일일연속극 출연이었고 선후배들과의 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 2008년엔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주연을 맡아 적나라한 서민 연기, 최진실표 코믹 연기, 세련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최진실은 '와이어 액션' 연기도 보여 주면서 중년 트렌디 드라마[* 이듬해 2009년 중년 트렌디 드라마 MBC [[내조의 여왕]]도 흥행에 성공하며 대세로 자리잡는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한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2037913|#]] 중년층을 겨냥한 드라마였지만 젊은층까지 시청자 범위가 넓어져 10대, 20대 팬덤이 ​대거 유입했었다. [[디시인사이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에서는 '최트루' 최진실이 연일 화제가 되고 팬들은 최진실의 [[싸이월드]]에까지 날아가 디시에 방문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최진실 본인이 직접 디시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해 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8년을 빛낸 [[탤런트]]' 부문 5위를 했다.''' [[http://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91&pagepos=3&search=&searchKeyword=&selectYear=|#]] 드라마 팬덤이 형성되자 2008년 후반기에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 제작이 확정된다. === 평가 ===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영화 부흥을 견인하고 특유의 귀여움과 친근함을 무기로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 없던 배우의 매력을 선보였다. 또 한국 영화계의 기획 영화 붐과 맞물려 '자기 주장이 분명한 신세대 여성 캐릭터'의 원조급이 된다. 1990년대를 관통하면서 '''[[청룡영화상]] '인기 스타상'을 8회 수상해 [[청룡영화상]] 인기 스타상 최다 수상자'''가 되었고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영화 부문에서 총 5회의 '인기상'을 수상했으며, 최진실 이름값만으로 '''티켓파워''' 역시 뛰어났다. 자타공인 2000년대 한국 영화 100만 관객 시대의 주춧돌을 놓은 당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 <질투>(1992년)는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이자 중국으로 수출된 첫 한국 드라마[*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기념으로 1년 후인 1993년 수출을 하게 된다.], SBS <째즈>(1995년)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 드라마, MBC <별은 내 가슴에>(1997년)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다. 이렇듯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징적 [[인물]]'''이고 '''[[한류]] [[배우]] 1세대'''였으며 '''[[한국]] [[영화]]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밝고 경쾌한 연기부터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까지 [[장르]] 상관없이 모두 잘 소화해내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다.[* 미니시리즈, 주말극, 일일극, 1롤을 맡던 2롤을 맡던 5롤을 맡던, 원톱영화, 투톱영화, 떼주물영화 등. 어떠한 작품, 역할을 하여도 ''''최진실'은 언제나 늘 같은 자리, 위치에 있는 그 '최진실'이었다.'''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에서는 갓데뷔한 신인배우 [[정우성]]이, 드라마 <째즈>에서는 신인배우 [[한재석]], [[정혜영]]이 더 메인 주인공이기도 했다.] 연기력도 수준급이라 데뷔 이후로 단 한 번도 연기력 논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성기였던 90년대 시절 또래 배우들이 얼굴 믿고 연기는 안 한다는 비판이 많던 때에 '최진실 보고 배워라' 는 식의 논조의 사설이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실제로도 다작을 하는 배우로 유명했고 역할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배우였다. 청순가련 캔디부터 비련의 여주인공,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싹싹한 대가족 딸 역할 등 못하는 배역이 없었다. 특히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연기를 배울 좋을 기회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걸로 유명했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는 배우들이 대부분 대선배들인데다가 스케쥴도 살인적이라 어린 배우들은 대체로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최진실은 대선배를 접할 좋은 기회라며 후배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한 적도 있었을 정도. 덕분에 선배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던 배우였다. [[CF]][[광고]]로 최초의 [[신드롬]]을 일으킨 광고모델답게 '''광고계에서 매년 섭외 1위~5위를 다투며 꾸준히 광고모델 역대 최고 개런티를 갱신'''했고 20년간 수백여 편의 [[광고]]에 출연하며 '''CF퀸'''으로서도 꾸준히 왕성한 활동을 했다. [[예능]]계에서도 잘 망가지는 친근함과 뛰어난 입담, 타고난 센스와 감각을 보여 '''예능 프로그램이 새로 편성되면 첫 회에 출연하는 단골 연예인'''이었으며 이런 신뢰자본을 동료 연예인들을 위해 쓰기도 했다. '''[[해외]]에서 대한민국 연예인, 배우로서 종합적인 인지도 또 한 단연 톱이었다.''' 2010년 8월 중국 '한류 드라마 속 미녀 여자 주인공 TOP 10' 조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워를 보여 주었기도 하였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79&aid=0002181456|#]] 최진실보다 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거나 위상이 높거나 외모와 실력(연기력)이 좋은 연예인들은 많았지만 새로운 스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결혼을 하고서도[*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인기가 전성기 때보다 현저히 떨어졌었다.] '''드라마 영화 광고 예능을 넘나들며 신비주의와 공백기 없이 남녀노소 전연령대층에서 꾸준한 국민적인 대중인기를 유지하고 스타성까지 하늘을 찌르는 원톱의 위치에서 연예계 전체를 리드하며 장기집권하는 국민 연예인은 없었다.''' 이후 2003년부터는 파경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 남편의 말이 거짓말이고 최진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최진실이 사망한 뒤에 밝혀졌다.]로 이전보다 언론매체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광고주의 소송 外의 문제로 커리어를 제대로 쌓지 못하였지만 드라마 <장밋빛 인생>과 <내 생에 마지막 스캔들>을 기점으로 다시 예전 이미지와 인기, 위상을 회복하고 있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생긴일이라 한 목소리로 “최진실은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독보적인 여자 연예인이었고 인기와 위상을 꾸준히 유지하던 영리함도 있었음에 아내, 엄마로서 가정에 헌신하는 최진실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이 있다. '''결혼을 아예 하지 않았다면 현재(2020년대)도 여전히 원톱의 위치에서 전성기였을 것.'''” ~~검증되지 않은 미신이지만 결혼시키지 말고 만인의 연인으로 살게하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결혼을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면...~~ 이라며 아쉬움을 표하는 여론이 있지만 “두 자녀의 엄마로서 책임과 최선을 다하기위해서 자존심을 전부 내던지고 역경과 고난을 꿋꿋이 이겨 내며 재기에 성공하였고 자녀들과 다른 행복을 누리면서 당당하게 제2의 삶을 살던 최진실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라는 의견도 많다. 그리고 공통적인 여론은 워낙 '''성실함으로 무장한 독보적 매력으로 전 국민적 인기를 얻어 20대부터 '[[국민배우]]', '국민스타'로 불리어진 [[인물]]이라 [[노년기]]까지 연기 활동을 이어갈 경우 꾸준한 영향력과 엄청난 업적을 더 낼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2020년대 현재, [[OTT]], 웹 드라마, 웹 예능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중년 배우들 작품 선택이 더욱 더 넓어진 시대가 되어 아쉬움이 유독 크다. '최진실 신드롬'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을 여러 번 들었다놨고, 어렵던 시절 유일한 '[[흙수저]] [[신데렐라]]' 연예인 최진실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희망이었으며, 활동 마지막해에도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키며 문화 헤게모니를 이끌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죽음''' 또한 현재까지도 손에 꼽히는 역대급 문화적 충격으로 [[대한민국]]을 뒤흔들어놓아 '[[베르테르 효과]]'의 대표 사례가 되어, [[가짜뉴스]] 폐해를 널리 알려 언론중재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이뤄냈다.[[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1|#]] == 외모 트레이드 마크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진실-나드리화장품.gif|width=100%]]}}}|| || {{{#FFFFFF ▲ '''나드리 화장품 CF광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진실-3.jpg|width=100%]]}}}|| || {{{#FFFFFF ▲ '''1997년 제33회《백상예술대상》'''[* 1996년 영화《고스트 맘마》로 영화부문 인기상을 수상했다.]}}}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진실-일상.jpg|width=100%]]}}}|| || {{{#FFFFFF ▲ '''일상 사진'''}}} || ||
{{{#!wiki style="margin: -7px -10px" [[파일:최진실-별은내가슴에.gif|width=100%]]}}}|| || {{{#FFFFFF ▲ '''드라마《별은 내 가슴에》'''}}}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v는사랑을-1.gif|width=50%]][[파일:사랑은tv를-2.gif|width=50%]] [[파일:사랑은tv를-3.gif|width=50%]][[파일:tv는사랑을-4.gif|width=50%]]}}}|| || {{{#FFFFFF ▲ '''1996.02.09《TV는 사랑을 싣고》'''}}} || * 선하고 귀여운, 깜찍하고 발랄한, 고급진 [[걸크러쉬]] 이미지, 그리고 유니크한 이미지까지 동시에 공존 * 귀여운 외모와 대조를 이룬 슬픈눈 * 서사와 한이 담겨있는 듯한 눈빛, 반짝이는 눈동자, 눈밑 진한 다크서클 * 특유의 활짝 펼쳐진 큰 귀[* 일명 당나귀 귀, 요정 귀, 원숭이 귀] * 하트 모양의 도톰한 입술, 웃을 때 시원시원한 입매, 가지런한 치아 * 앞에서 보면 계란형 얼굴, 옆에서 보면 귀족턱[* 귀여우면서 분위기 있는] 이런 다양한 특징이 최진실의 외모 트레이드 마크였다. == 성격 == * 데뷔전에는 느긋하고 무던한 성격이었으나 데뷔 후 연예계 생활을 하며 '빨리빨리'가 습관화되면서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우울감을 자주 느끼며 예민해지고 [[다혈질]]적인면이 생겼다고. * 허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고난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때문에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은 최진실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유작 드라마 '내 생에 마지막 스캔들'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 [[정준호]]는 최진실 사망 후 인터뷰를 통해 "당시 드라마를 촬영하며 최진실을 가까이서 지켜 본 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평소 우울증 같은 게 없었다."라고 언급했었다.] * [[감수성]]과, 섬세함이 남다르게 풍부했고 대중들의 평가에 상당히 예민했으며 이에 따른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데뷔 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최정상에 올랐을 때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져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꿈]]을 자주꿨고, 이후 [[국민배우]]로 안정기에 들어섰음에도 안 좋은 기사가 하나라도 나면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잠을 설쳤다고 한다. 때문에 1990년대부터 [[수면제]]를 복용했다. 신경성 위염도 심해서 스케쥴 도중 헛구역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항상 인사성이 밝고 친절했으며 친근하고 정이 많아 사람들을 챙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미담도 끊임없이 많은 편. 최진실과 친오누이처럼 가까이 지냈던 배우 [[박중훈]]은 최진실에 대해 "인간관계를 맺을 때 뒷생각을 잘 못하는 편이었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대하는 쪽이었다"라고 언급했다. * 팬들에게도 잘 하며 팬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했다. * [[애교]]가 많았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나의사랑나의신부1990.jpg|width=100%]]}}}|| || {{{#FFFFFF ▲ '''영화《나의 사랑 나의 신부》촬영 현장'''[* 배우 박중훈과 영화감독 이명세]}}} || * 굉장히 소탈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 매사에 성실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악바리]]기질이 있었고, 굉장히 여리고 눈물이 많았다고 한다. * 연예인으로서, 배우로서 굉장히 영리하고 똑부러지는면이 있었다. * 유머감각과 똑부러지고 센스있게 말을 잘하고 친화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말주변이 별로 없고 부끄러움을 꽤 타는 편이었다. 결혼 전 MC 진행자의 질문에 말끝을 얼버무리며 장난스레 옆에 있는 동료에게 대답을 떠넘기는 모습을 꽤 볼 수 있으며, [[시상식]]에 참석할 때 안정제를 먹은 적이 있다. 그 시절 톱여배우들이라면 대부분 거치는 MC, 사회를 진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가 2008년에 첫 토크쇼를 진행했다. * 사단 멤버들을 살뜰히 챙겼다. 친한 동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엉뚱한면이 많았다고 한다.[* 절친 개그우먼 [[이영자]]의 말에 의하면 최진실이 집착성이 꽤 강하고 귀가 상당히 얇았다고.] *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절친 [[이영자]]가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인 [[MBC]] <[[지피지기]]>와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지피지기-1.gif|width=50%]][[파일:지피지기-22.gif|width=50%]]}}}|| || {{{#FFFFFF ▲ '''2007년 예능 지피지기 드라마《나쁜여자 착한여자》특집'''}}} || tvn 현장토크쇼 <현장토크쇼 TAXI>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으며, [[홍진경]]이 최진실에게 뜸들이며 “[[김치]] [[사업]] 홍보에 필요한 인터뷰가 필요한데...”라고 어렵게 말을 꺼내자 비속어를 섞어가며[* 사단 멤버들과는 사적으로 말을 걸쭉하게 했다.] “카메라 들고 당장 안 오냐”고 했던 일화는 홍진경이 <[[힐링캠프]]>에서 말한 바 있다. 그 外, 친구가 하는 사업에 노개런티로 홍보모델 했던 경험도 있으며 영화 감독, 드라마 감독, 드라마 작가와의 의리로 출연했던 작품들이 꽤 있다. * '[[강강약약]]', '[[외강내유]]'였으며 솔직하고 털털했고,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 [[걸크러쉬]]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한가닥하는 사단 연예인들을 중재하고 이끄는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타고났었다. 최진실은 대중들에게 '선하고 착한 이미지'였지만 그 당시 여배우에게 금기시되는 [[음주]]와 [[흡연]] 여부를 숨기지 않고 공개했고, 터무니없는 루머들로 고통을 받을 때마다 당당하고 똑소리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훗날 또 다시 터무니 없는 루머로 절친인 개그우먼 [[정선희]]와의 [[우정]]을 왜곡하고 [[마녀사냥]]까지 당하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 Right of Publicity == 최진실은 계약 기간보다 5년을 더 자신의 초상을 사용한 제약업체를 대상으로 5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다. 사법부는 2000년 이 제약업체에 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최진실은 이 재판을 통해 연예인 퍼블리시티권의 초석을 다진다. === 공익 활동 1 === * 1991년 5월에 소년소녀가장 돕기 자선 공연 열어 공연 수익금 3천만 원을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 * 2002년 6월 7일 재정이 어려운 대학교들에 컴퓨터 등 IT 학습기자재를 지원한다.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의 '사이버 코리아 21' 정책과도 통하는 행보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에 해당된다. 통신사 [[KT]]와 연대한 활동이라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최진실에게는 자신을 변함없이 최고 대우로 광고 모델로 기용해 준 KT와의 우정을 표시하는 일이라 의미가 있었다. KT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공식 파트너이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fuEe8DJ_z5U|관련영상]] * 2002년 6월 12일 [[한동대학교]]에 5천만 원을 기부하고 한동대학교에는 '최진실 장학금'이 생긴다. * 2004년 12월에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에게 후원금을 지급한다. === 공익 활동 2 === * 1993년 금융실명제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1997년 외환 위기]] 시기에 도산 위기에 처한 [[기아자동차]]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2000년 6월에 대중예술인으로서 공공외교관을 자임한다. 1990년대 전반기에 이미 [[사이판]], [[스웨덴]], [[괌]] 등 외국여행을 많이 한다. * 2004년 10월에 갈 곳 없는 노숙인들과 보육원의 원생들을 돌봐 주었다. * 2004년 12월에 자신의 범죄 피해 경험을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공익에 부합되게 사용하였는데,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광고 모델에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광고주의 행동에서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게 되고 사회가 [[가정폭력]]을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 [[강지원]] 등 여성운동계와 연대한다. * 2005년 12월에 [[백혈병]] 환자들과 [[히말라야 산맥|히말라야]]를 등반한다. * 2006년 4월에 굿네이버스 친선대사가 된다. * 2007년 7월에 저소득층 아동들을 돌본다. * 2008년 3월에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싶다고 한다.[[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03120305501001|#]] * 2008년 4월에 남자 MC 일색 예능계에 일침을 가한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1949250|#]][* 이런 실정이라 10년 후인 2018년에야 [[이영자]]가 <2018 MBC 방송연예대상>, <2018 KBS 연예대상>에서 모두 '대상' 수상하면서 여성 최초 '대상' 2관왕이 됨. 남성 2관왕은 이미 세 번 나온 시점. 그 와중에 그 세 번 중 두 번은 한 인물. 누구냐? 최진실이 추천했던 [[유재석]]. 이영자는 최진실의 친구였고.] * 2008년 3월에 최진영에게 [[베트남]] 봉사활동을 권하고 최진실은 드라마 촬영 중이라 2009년에 갈 계획을 세운다. 최진영은 최진실 사망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2008년 11월에 베트남 봉사활동을 다녀온다. * 2008년 5월 29일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2008년 촛불집회]]와 뜻을 함께 한다.[[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2661.html|#]] * 2008년 7월 13일 연예계 내의 승자독식구조에 대해 성찰한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1967090|#]] * 2008년 7월 14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일본군 위안부 발뺌에 대해 질타한다.[[https://archive.fo/20120802221258/http://www.dcnews.in/news_list.php?code=entertainment&id=319961|#]] * 2008년 10월 1일 북측 아동들을 위한 자선사업,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2&aid=0001166502|#]] 1989년 영화 '남부군'(1990년)을 찍으면서 남측 반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한다. * 2008년 10월 1일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 사망 == 2008년 9월 8일 시점 이후 [[정선희]]의 남편 [[안재환]]의 사망과 관련된 거짓 소문을 겪는다. 2008년 9월 8일 배우 안재환이 자신의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 직후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과장이 말하길 최진실이 수십 억 원을 안재환에게 빌려주었고 그 돈을 갚으라고 압박을 가하자 안재환이 자살했다'는 쪽지가 인터넷상에 유포된 거다. 쉽게 말해 최진실이 악덕 사채업자라는 거다. 남편 사망이라는 엄청난 돌발 상황으로 [[멘탈붕괴|멘붕]] 상태인 친구 [[정선희]]가 이런 일까지 겪게 되자 최진실은 자신의 우정을 모욕하는 범인들에게 크게 분노를 하고 합리적•이성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사회 상황에 큰 고통을 토로하다가 2008년 10월 2일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최진실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여파가 매우 컸던지라 [[베르테르 효과]]도 크게 일어나 연구 결과 1위로 나타났고 구체적 수치로는 700여 명이 사망한다. 2008년 9월 22일 최진실은 경찰에 수사 의뢰 ​했었고 ​2009년 6월 16일 백승연 등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 처벌을 받았지만 고소인은 세상을 떠났다. === 황색언론의 밥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진실임신못한다.png|width=400]]}}}|| || {{{#FFFFFF '''스포츠서울 2001년 2월 3일자 1면 헤드라인'''[* 불임 내용 같지만 사실 읽어보면 조성민과 결혼한 최진실이 TV·영화·CF 스케줄 때문에 바빠서 임신할 틈도 없다는, 별 것 없는 내용이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이 기사에 대해 주의 조치를 내렸다.]}}} || 거의 '''데뷔 하자마자 원톱을 찍은 케이스'''라 데뷔때부터 [[황색언론]]의 밥이자 [[기자]]들에게 가장 많이 시달린 대표 연예인이다. [[기레기]]들과 미디어 언론은 심심하면 '''[[신문]] 1면에 최진실을 헤드라인에 걸고 [[언론 플레이]]를 하거나 소설을 쓰며 루머를 퍼트리기도 하였고 과장되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많았으며''' 키우는 강아지의 종류나 위경련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소한 일상들까지 신문에 실렸다. 최진실이 유독 흉측한 루머들과 터무니없는 루머들이 많았던 이유중의 하나. [[변진섭]]과[* 변진섭과의 열애설은 최진실이 자서전에서 직접 언급한바가 있다. 1989년 변진섭이 진행하던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당시 변진섭은 인기 최고 절정인 시기였고 최진실은 CF스타로 막 이름 알리고 주목받던 햇병아리였던 때였다. 라디오 게스트로 몇 번 출연하며 여의도 포장마차에서 가수 김혜림, 개그맨 이휘재 등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한번은 변진섭 매니저의 집들이에 매니저 배병수, 가수 변진섭, 강수지, 김혜림, 원미연, 홍서범 등과 함께 초대받아 갔었는데 이 일로 최진실이 변진섭의 집에 드나든다는 소문으로 번졌고, 최진실이 변진섭의 콘서트에 초대받은 적도 있는데 최진실은 '사랑 나누기 최진실 콘서트'에 변진섭이 출연해 변진섭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개그맨 이휘재가 무대에 오르더니 "지금 이 자리에는 변진섭씨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면서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최진실을 소개했고 최진실은 "저희 오빠의 콘서트에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는데 다음날 '최진실, 변진섭 내년 9월 결혼, 콘서트에서 공개선언' 이라는 타이틀 기사가 나갔다고. 최진실은 긴 기간 동안 일방적인 기자들과 언론에 의해 곤욕을 치뤘었다. 참고로 1991년 최진실이 출연한 다큐 '인간시대-최진실의 진실'에서 초등학생 팬들이 최진실에게 싸인을 요청하며 "변진섭 오빠하고 약혼 진짜에요?"라고 장난스레 물어보고 최진실은 "아니라고 그랬잖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도 나온다. 최진실과 변진섭이 루머를 해결하기 위해 의견를 나누다 마침 둘다 MBC 방송국에 볼 일이 있어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또다시 기자들에게 목격되어 잡지에 다정한 모습이라고 사진까지 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최진실과 변진섭이 해명을 하기 위해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들었고 이런 것이 사랑인가? 하는 감정이 들어 점점 루머가 어느새 현실이 되었고 결혼이라는 단어를 기정사실로 인정해가며 공개적으로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며 우애를 나눴다. 항간에는 양가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결혼 약속을 했으며 약혼반지를 교환했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어느날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최진실을 보며 어머니가 "네가 좋으면 결혼하라"라고 말했지만 최진실은 그 시점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결혼이 아니라 상황에 떠밀려서 하는 결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결론을 내려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1995년 말에 변진섭과의 공식 결별 기사가 나간다.] [[이병헌]]과의 열애설 또한 기자들의 설레발과 [[소설]]로이루어진 경우이다. 2002년 12월 조성민의 파경 기자회견으로 매일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자녀들과 1년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으며 둘째 또한 첫째를 낳았던 병원에서 낳으려고 했지만 기자들이 출산 며칠 전부터 그 병원에 몰려가 있어 결국 다른 병원으로 가서 거의 숨어서 낳았고[* 조성민이 "임신 중인 둘째가 내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한 것도 화근이었다.], [[https://woman.donga.com/3/all/12/129324/1|파파라치들도 함께]][* ~~조모씨들의 개소리 인터뷰는 거르면 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1/15/2004011570001.html|최진실을 꾸준히 따라다녔다.]][* 아들이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에 놀란듯 매우 경직된 표정이었다.] 자녀들과 해외여행을 할 때는 공항에서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맨 구석에 자리하는 것이 버릇된다. 악플을 당한 역사가 의외로 길다. 인터넷 활성화 이전 [[PC 통신]] 시절부터 악플러들의 공격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그 정도 뒷담화 가지고 거물급 연예인이 일반인인 날 고소해서 경찰서로 오라가라 하냐"며 징징대는 한심한 글을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자기가 뭘 했는지는 쏙 빼놓고 작성한 글[* 진짜 거두절미하고 자기가 경찰서로 불려간 상황부터 쓴다. 무슨 뒷담화를 했냐고 질문하는 글에는 결코 대답이 없다.]인데 안타깝게도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온라인 상에서의 모욕과 명예훼손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최진실씩이나 되는 연예인이 뭐 그런 걸로 일반인을 경찰서로 부르냐?"며 악플러 편을 드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2000년대]] 당시 통제되지 않는 언론과 미개했던 네티즌들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2002년 12월 남편 [[조성민]]이 거짓 기자회견한 뒤로 기자들의 공격은 물론 최진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무차별적인 루머 생성과 [[언어폭력]] 그리고 [[마녀사냥]]의 정도가 상당히 심각했었다. 1988년 [[광고]]모델 신드롬, 1989년 연예계 정식 데뷔이래 [[결혼]] 후 2002년까지 '''오랫동안 연예계 꼭짓점에 있던 최진실을 [[견제]], [[열폭]], [[질투]]하는 안티들과 최진실이 추락하기만을 벼르던 음해세력들 그리고 극성 야구 팬들[* 지금도 여전히 "조성민의 인생이 망한 건 전부 최진실의 탓" 이라며 [[피해자]]인 최진실에게 [[책임전가]]를 한다거나 심지어는 최진실에 관한 [[루머]]들을 언급하면서 [[피해자]]를 욕보이고 [[이혼]] 사유를 최진실에게 떠넘기며 조성민의 [[부정행위]]들을 옹호하는 모습들을 꽤 볼 수 있다. [[정신병자]] [[집단]]이 따로 없는 것이 조성민도 최진실을 [[폭행]]할 때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언어 폭력을 하면서 [[폭행]]했다. 그리고, 자녀들을 위한답시고 "그래도 아이들 아빠인데...", "아이들이 상처받으면 어쩌냐"라며 '''조성민의 부정행위와 범죄행위들을 [[입막음]] 해오고 있다.''' 자녀들도 피해자들이지만 최진실이 '''이 사태의 제일 큰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해야 될 문제이다. 또, "연예인 톱스타와 운동선수 톱스타. 즉, 톱스타끼리의 [[결혼]], 세기의 [[부부]]였는데 둘다 안타깝다"며 최진실과 조성민을 동급선상으로 두는 반응들도 있는데. 엄연히 말하면 '''최진실은 젊은 나이에 [[국민배우]] 칭호을 얻어 일치감치 연예계 원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당시 운동선수 원톱은 [[IMF]] 시기에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박찬호]]였다.''' 조성민은 준수한 외모와 훌륭한 피지컬, 상당한 실력 그리고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잠시 핫했던 운동선수였으나 최진실의 이름값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운동선수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둘의 "급"차이는 "하늘과 땅"차이.~~] 결혼 후에 '최진실 남편'으로 불리고 여전히 '최진실 전남편'으로 불리는 이유다.]이 [[공범]]이었다.''' 2008년 10월 [[기레기|장례식장에서 언론들의 도가 넘는 취재 행태가 도마에 오르며 또 한 번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장례식에 참석한 유명인들에게 '심정이 어떠한가' 라는 넌씨눈스러운 질문은 기본에다가, 오열하다 못해 실신하는 모습을 그대로 연예신문 1면에 때려박는 등 몰상식한 취재 행태로 인해]] 취재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 때 여론의 뭇매를 워낙 세게 맞았던 탓인지, 이후 연예인의 장례식 모습은 직접 카메라를 들이밀거나 심경을 묻는 게 아닌 멀리서 참석하는 모습만 찍는 식으로 바뀌었다. === 불의에 분노 === 배병수 사망 관련(범인 [[김구라]]), 조성민 관련(범인 [[조성민]]), 안재환 사망 관련(범인 백승연) 명예 훼손 피해를 심각하게 겪었다. 이런 인격살인 행각에 대해 토크쇼에서 깊은 분노를 표현했다. 연예인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세태에 대해 큰 우려를 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나훈아]]의 기자회견을 언급하며 연예계 대선배 나훈아를 다시 못볼까봐 두렵다고 했다.[[https://www.youtube(DbaGoMVK8YA)|관련영상]]] 최진실은 연예계 생활 중에 크게 살인교사범, 유책배우자, 악덕사채업자로 부당하게 몰렸다. 그 외에도 여러 모함과 모욕을 겪었다고 인터뷰한 게 적지 않다. 1991년 <인간시대 - 최진실의 진실>에서 연예인을 향한 인격권 침해에 이모 정현숙한테 분노를 표현하는 게 나온다. 일찍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최진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연예인으로서 겪는 이런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김재우에게도 가짜뉴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분하다고 했다. 2007년 <무릎팍도사>에서도 이로 인한 깊은 고독감 혹은 고립감을 강호동에게 표현하는 게 나온다. 2008년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진행도 이런 잘못된 문화를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까싶어 연기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 임하게 된다. 2008년 9월 최진실을 악덕사채업자로 몰았던 백승연이 선처를 바라며 최진실에게 수시로 전화를 해대자 최진실은 '악마의 전화'라고 분노했고 백승연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경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10월호 월간 잡지에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로 모함하는 인터뷰가 실리자 다시 시작된 조성민의 범죄 행각에 대해 분노하고 문자메시지로 경고했다.[* 월간 잡지는 통상 전월 마지막 주에 발간된다.] 최진실은 백승연의 범죄 행각에 이은 조성민의 범죄 행각에 대해 김재우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언론에 의해 유책배우자로 몰리는 부당한 일을 겪으면서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복용하게 된다고 한다. 최진실이 얼마나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는 그의 일기장 일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 ▶ “엄마… 미안해! 약[* 수면제 혹은 우울증약으로 추정]에 취해, 약 먹은 사실을 까먹고, 또 입에다가 한웅큼 물구. 눈은 반쯤 감겨서. 나 죽으면 그냥 흰 천에 둘둘 말아 갠지스강에 띄워 달라구…”[[https://www.ajunews.com/view/20140617165756699|#]] > ▶ “환희야. 수민[* 딸 준희의 개명 전 이름.]아. 나의 아들. 나의 딸아. 엄마 어떻게 하면 좋아? 너희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구나. 엄마는 지금 너무 막막하고 무섭고 너희를 지푸라기라고 생각하고 간신히 너희를 잡고 버티고 있단다. 너희만 아니라면 삶의 끈을 놔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루를 살더라도 너희와 활짝 웃으며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고, 한창 예쁜 너희 재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은데 사는 것 자체가 너무도 힘들어 너희 모습도 놓치고 있구나, 떠날까? 우리 떠나자. 미지의 세계에 대해 불안감, 엄마의 소심한 성격 탓으로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한심하다. 온 집안을 어두컴컴하게 해두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해가 지면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환희야 수민아 미안하다. 여러 가지로 엄마가 부족한 게 많아 너희에게 항상 죄짓는 기분이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863046606084984&mediaCodeNo=258|#]] > ▶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조성민|그 남자]]를 저주하며 살 것이다.''' [[아빠]]라는 존재를 모르고, [[아빠]]의 사랑 없이 자라야 되는 우리 환희와 수민이를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흐른다. 난 아이들을 위해, 우리 엄마가 진영이와 나만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나두 우리 아이들만 위해 살 것이다. 보란 듯이... 나쁜놈, '''나와의 [[인연]]이 고작 이것밖에는 안 될 거면서 뭘 그렇게 [[결혼]]하자고 난리를 피웠을까?...''' 수민아, 환희야. [[엄마]]가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한 점은 [[아빠]]를 지켜주지 못한 점이다. > ▶ 그인 떠났다. 3살도 채 안 된 환희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 아빠에게 버림받은 우리 수민이. 그리고 나 세 명뿐이다. 그는 자신만의 또 다른 행복을 위해, 나를 짓밟고, 아이들을 짓밟고 떠나버렸다. > ▶ 밤만 되면, 더욱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바보 같은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 두 사람(조성민과 내연녀 심마담)에게 늘 당하기만 한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 두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나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그냥 쓰러져 영원히 잠들었으면 생각밖엔 없다. > ▶ '''하나님이 정녕 계시는 걸까?.... 계신다면, 계신다면 제발, 저를 지켜주세요.''' 최진실의 사망 소식은 외국에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미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독일]], [[싱가포르]] 등은 최진실의 사망을 비중있게 다뤘다. [[뉴욕 타임즈]], [[AP통신]], [[UPI]], [[BBC]], [[LA타임스]], [[가디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도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악플]]과 [[루머]]를 주요 사망 원인으로 보도하던 [[한국]] [[언론]]과는 달리 당시 [[한국]]의 [[보수적]]인 [[사회 문화]]를 꼬집기도 하였다.''' 2008년 10월 7일(한국시각), 타임은 《South Koreans Are Shaken by a Cerebrity Suicide(스타의 자살에 한국인들이 흔들리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최진실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최진실의 자살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후폭풍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진실은 '한국의 [[줄리아 로버츠]]', '한국의 [[안젤리나 졸리]]'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국민적인 배우'''이다. '''한국은 정서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이고 정보기술적으로는 능숙한 사회이다. 최진실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 여성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강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고 싱글맘은 인격 장애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진실은 2004년 이혼을 했고 싱글맘이었는데, 한국에서 금기시되는 이혼모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했으며 싱글맘이 환영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다. 최진실은 자살한 동료 배우와 관련된 악성 루머 때문에 힘들어 했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회생활하는 여성의 경우, ‘싱글이고 이혼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괄시받는 계층(pariah status)'으로 여겨져 사회활동에 불이익을 받는데, 최진실은 이러한 것들로도 고초를 겪어왔다. '''최진실의 죽음이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혼모로 살아간 최진실의 고통을 언급하는 데는 거의 없었다.''' 최진실은 이런 한국 사회 분위기를 타고 올라 영리하게도 '혼인 유지'라는 스탠스를 유지했었고 누구라도 이혼할 상황이라는 걸 대중이 확인한 시점 2004년 9월 1일 당일치기로 이혼을 완료했었다. 2002년 12월 18일부터 2004년 8월 31일까지 최진실의 공식 입장은 '혼인 유지'였고 그것으로 자신이 유책배우자가 아님을 입증한 것인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로 모함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외신의 언급대로라면 결국 최진실의 '너무도 당당한 삶'이 못마땅한 자들이 최진실을 계속 범죄자로 음해한 것이다. 최진실은 '너무도 당당한 이혼'으로 한국 사회의 '정상가족 신화'를 박살내게 되고 한국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정상가족 신화'를 지키기 위해 그런 최진실을 제거해야 했던 상황.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최진실을 '살인교사범', '유책배우자', '악덕 사채업자'로 만들어야 했고 그걸 간파한 최진실은 그 다음은 '포주'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살인교사범(1994년에 시작) → 유책배우자(2002년에 시작) → 악덕 사채업자(2008년에 시작) → 포주(?)] 즉 한국 사회는 '당당한' 최진실에게는 엄청나게 환호했지만 기득권의 핵을 깨버리는 '너무도 당당한' 최진실은 두려워 했다는 의미다.[* 최진실은 1993년 [[주병진]]이 진행하는 토크쇼 <주병진쇼>에 출연했을 때 자신은 여성 팬이 더 많다고 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그러니 이에 연동된 거짓소문과 악성댓글 문제도 상당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이자 스승 [[전길남]]도 최진실의 사망을 두고 '인터넷 폭력의 상징'이라고 했을 정도로 [[마녀사냥]] 행태가 악랄하게 진행된다.[[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11/2014081101924.html|#]] 2008년 9월 여론조작이 심각하게 진행될 때 “나는 외톨이…, 왕따…, 도무지 숨쉴 수가 없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꿋꿋하게 극복하겠다”라는 다양한 상념의 메모를 남기고 삶에 대한 애착도 드러낸다. 최진실은 월간 잡지 <퀸>의 기자 김재우 편집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들을 남겼다.​ > ▶ “오늘은 '최진실 안티 사이트'에 들어가 봤어. 이들은 왜 나를 싫어하는 걸까, 알아보기 위해서였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어. 최진실이라는 사람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웃집 사람 같은 편안함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 톱스타라는 칭호가 따르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이질감을 느껴서가 아닌가 싶어. 그 어떤 배신감 같은 거라고 나 스스로 정의를 내려봤어. 인기를 얻고 돈을 벌고 그들과 다른 삶을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 성격이나 취향이 달라진 게 아닌데…. 난 명품도 안 좋아하고, 아직도 수제비와 분식이 좋은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날 평가하고 그렇게 믿는 걸까? '안티팬들과의 만남', 뭐 이런 거라도 해서 해명을 해야 하나? 그러면 세상은 또 뭐라 할까…? 나 언제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거니? 그냥 은퇴를 하는 게 옳을까? 은퇴를 한다고 해서 나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기나 할까?” > ▶ “이혼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조성민의 이혼과정. 조성민이 피해자 코스프레하며 이혼하고 싶다고 언론에 떠들고 다녔기 때문. 2002년 12월 18일부터 2004년 8월 31일까지 대중은 조성민의 간통, 폭행, 사기, 중상모략, 사문서 불법 유출 등의 범죄 행각을 확인.]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 때 들었던 말들이 더 힘들 수도 있는데, 왜 지금 마음은 그 때보다 더 힘들까? 처음에는 사채업자란 소리에 웃음이 났는데, 그냥 웃을 수가 없었어. 가까운 사람들조차 조금은 연관된 게 아닌가 싶은 눈빛을 보내는 거야. 난 그저 친한 동생(정선희)의 아픔에 손이라도 먼저 잡아주기 위해 달려간 것뿐인데, 그래서 발인 때까지 함께 있어준 것인데, 세상은 어쩌면 내 진실과 다르게 매번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니? 이젠 더 이상 내가 설 수 없을 것 같아. 이걸 또 이겨내면, 또 다른 일에서 난 사채업자에서 포주로 불릴지도 몰라.” > ▶ “이제와서 내 이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니. 벌써 이런저런 일로 내 사생활은 세상에 모두 알려져, 늘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대중 앞에 놓였던 사람인데. 난 이제 예쁜 척도 고상한 척도 못해.[* 2005년 10월 연예기획사 '싸이더스HQ' 본부장 박성혜가 최진실을 두고 '고상하지 못하다'고 떠들고 다닌 게 있다.[[https://www.donga.com/news/Series/70070000000536/article/all/20051007/8235525/1#|#]] 박성혜는 연예인이 범죄피해자일 때 범인 편에 서서 일을 한다는 의미다. "성혜야 범죄피해자가 왜 고상하지 못하지? 그럼 범인이 고상하다는 거니?" 이런 후려침이 가능한 행태다. 박성혜나 박성혜의 이런 범죄적 언사를 그대로 기사에 실은 김갑식이나 범죄자 조성민 수족 역할 잘 하고 있다. 너희들의 행태는 영원히 박제되는 거야.] 근데 우리 환희가 올해 초등학생이 됐잖니.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달리 그 나이엔 인터넷 검색은 다 기본으로 한다는데, 그 어린 아이들이 우리 환희에게 어떤 말이나 시선을 보내면 어떻게 하니? 엄마 때문에 우리 환희가 마음의 상처라도 받으면 얼마나 세상 살아가는 데 위축이 되겠니. 그 생각만 하면 빨리 범인이 잡혀 이 억울한 마음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야 하는데. 정말 조바심 나 미치겠어.” > ▶ “범인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무 소름이 끼쳐. 무슨 공포 영화 찍는 줄 알았어.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를 했지? 형사한테도 전화가 왔는데, 번호를 알려준 것 같은 눈치는 아니던데, 정말 그 사람 목소리 무서워서 혼났어. 그 사람 무슨 대단한 위력이 있는 거 아냐? 나이도 어린데, 힘 있는 집 딸인가? 어떻게 번호를 알았냐고 물었는데, 그냥 말을 흐리더라고. '그냥 무조건 용서해달라'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해오는 거야. 물론 중간에 흐느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가식처럼 느껴졌어.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막 욕을 해댈 수도 없는 거잖아. 또 '욕쟁이 최진실'로 글을 올릴까봐.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안 나오더라.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는 너무도 비굴하게 타이르게 되더라. 왜 그랬냐고 물으니 '무조건 미안하다, 한 번만 봐달라'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아?” > ▶ “사채설 유포자의 일방적인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왔어. 전화가 올 때마다 '악마의 전화'가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또 무슨 말을 할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짜 범인을 알려줄지도 몰라서 전화를 받았어. 그러나 전화를 받으면서도 어린 사람에게 매번 우롱당하는 기분이었어.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사람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기분이었어.” > ▶ “사채설 유포자가 잡혔는데, 세상은 여전히 나를 안 믿는 사람이 많구나. 죽으면 내 진실을 믿어줄까? 내 이름은 '최진실'인데, 인터넷 속 사람들은 나를 '최가식'이라고 부르네. 너무도 슬픈 일이지 않니? 환희, 준희에게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어머니보단 죽어서 진실이 밝혀진 어머니가 낫지 않을까? 10월 3일이 환희 운동회 날인데, '사채업자 엄마'라고 환희 친구들이 놀리면 어떻게 하니?” > ▶ “그 사람은 나에게 용서를 구하면 되지만, 세상의 수많은 오해들은 내 몫인데, 내가 어떻게 또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동안 많은 위기들을 넘겨오는데도 숨이 차올라 죽을 지경인데, 너무도 자신이 없다. 안재환의 자살에 왜 내가 연루돼 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인터넷에 '안재환, 최진실'이란 이름이 동시에 뜨는 이유를 내가 또 어떻게 넘겨야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렇게 넘기고 웃는 게 정말 행복이고 진실일까?” [[조성민]]과 이혼후에는 김재우 기자에게 만일 내가 잘못되면 세상에 공개해 달라며 ''''[[진실]]'의 [[일기]]장을 남긴적도 있다.''' 원본 자료는 인터넷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부가 남아있다. 다음은 일기장 내용 일부분이다.[[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35&num=660720&page=14344|#]][[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35&num=660722&page=14315|#]] > ▶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남편은 저에게 "[[사업]]하는데 돈 좀 보태라"고 종용'''했습니다. 때마침 저는 [[CF]]모델료 1억을 [[현찰]]로 받은 상황이라 그 돈 전부를 건네줬습니다. 조건은 "지금까지 생활비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으니 이제부터 다달이 2백만원씩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아무리 여유자금이 있어도 아이들 우유 값은 아빠가 힘들게 벌어오는 돈으로 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너무도 실망스러웠던 점은 1억원을 가져가면서 고맙다는 말은커녕 "그 많은 돈 중에 고작 1억! 이제 당신에게 돈얘기 또 안 해"하며 퉁명스럽게 애기했던 것입니다. 그에겐 고작 1억인지 모르지만 제가 건네준 그 돈은 둘째 아이 수민이(준희)를 임신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가며 CF출연료로 받은 돈이었기 때문에, 그 서운함은 더욱 컸습니다. > ▶ 하지만 저는 전남편뿐 아니라 그 여자(내연녀 심마담)의 [[진술서]]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또 다른 분노를 느껴봤습니다. [[소송]]은 정말 더 이상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고 전남편과 그 여자가 더 이상 거짓말로 일관된 인터뷰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했던 것인데, 이제는 제가 이들을 쉽게 용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온갖 거짓말로 일관하며 수많은 사람을 속였던 그들은 이제는 한 치의 거짓이 있으면 안 되는 법의 기관을 통해서도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연 이들은 죄값을 어떻게 치를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과연 저에게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혼]]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고 생각하는 '''전남편은 두 아이의 존재를 잊은 것일까요.''' > ▶ 이제 두 아이는 '저만의 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 아이를 위해서 아빠 몫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특히 아들 환희는 어느 정도 제 말뜻을 알아듣습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올바른 것만 보여주고 일러줘야 하는데, 그동안 그렇게 못했던 것이 가슴이 아프네요. 이제는 아빠 없이도 꿋꿋하게 잘 키워 나가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전남편은 아직도 아빠로서 아이들을 보러 올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것도 전 거부하고 싶습니다. 둘째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경솔한 말을 할 때부터 그는 아이들 아빠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몇 번의 방문을 통해 '''전남편은 아이들 [[분유]] 한 통 사온 적이 없습니다.[* 이혼 후, 최진실이 사망하고 나서도,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양육비]]를 지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최진실 자녀들은 굳이 아버지의 경제 지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성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어찌 [[아빠]]라고 할 수 있습니까.''' '''최진실은 사망 직전[* 10월2일 0시 47분 마지막 통화] 김재우 기자와 [[통화]]하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 ▶ "아무리 [[친권]]을 포기했어도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 있을까..." 그녀는 자살하기 이틀 전, ''''죽으면 어쩔 수 없이 두 아이의 [[친권]]이 아버지에게 갈 수 있다'는 말에 상당히 놀라워하고 흥분했다.''' > 그러고는 이런 말도 내뱉었다. "[[이혼]] 당시 [[친권]]을 포기한 이유는 내가 대신 빚(대출과 어머니, 동생 최진영의 돈까지)을 갚는 조건이었는데, 그 [[증거]]가 지금 고스란히 있는데 그게 말이 되냐. 정말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겠네"라고. > "너 아니면 환희, 준희 지켜줄 수 없으니 꼭 곁(최진영)에서 돕고 지켜봐줘야 해", "6년간 힘들었던 부분, 자료 너에게 다 있으니 꼭 도와줘라", '''"혹시나 잘못되면 꼭 공개해 밝혀달라"''' > "누나가 뭐 때문에 힘든지 처음부터 봐서 알잖아. 그리고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그 진실을....그 진실을...(밝혀줘). 재우야, 믿는다. 미안하다. 너 내 동생 맞지?"(마지막 통화) 최진실은 그 전에 이미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불의와 싸울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평소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부재'에 대해 자주 언급해 두었다.[[http://www.gwangj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26|#]] 2004년 드라마 '장미의 전쟁'에 출연하기 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었다. > ▶ "저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제 이름과도 같은 ''''[[진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진실]]'''은 제가 죽어서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이제는 당당히 세상과 맞서 열심히 살 것입니다." 최진실은 자신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완성시키고 싶어 했다. > ▶ "언젠가 저도 죽겠죠. 그 때 저를 위해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들이 있으면 돼요. 그럼 비교적 잘 산 거예요. 돈 많고 힘 있을 때 꽃등심 먹은 사람보다 어려울 때 같이 라면 먹어준 사람이 오래가는 법이거든요. 사람 때문에 늘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새 살이 돋게 해주는 존재도 역시 사람인 것 같아요. 인생? 그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길지 않아요. 살면서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할 수 있는 거죠. '''전 죽는 날까지 드라마틱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에요.'''" === 건설사 <신한>에 분노 === 2004년 8월 1일 최진실은 자택에서 [[조성민]]에게 폭행을 당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2697032|#]] 당연히 최진실은 얼굴을 다쳤고 집안 내부도 어질러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필요하면 그 모습을 공개할 수도 있다. 실제 최진실은 그렇게 했다. 이유는 조성민이 당시 폭행 사실을 아예 부인하며 언론에 뿌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후 소송의 주된 쟁점이 등장하는데, 단순히 법정에 피해사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폭행당한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였던 것이다. 이는 훗날 소송에서 최진실 측이 패소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폭행 장면을 언론에 뿌려서''' 채무불이행책임이 인정된 것이다. 2004년 11월에 광고주 <신한>은 광고 모델 최진실이 다친 얼굴과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정확히는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하며 별도로 맺은 '''품위유지약정 위반'''을 사유로 계약을 해지하며 손해배상금을 청구한 것이다. 원심은 2005년 9월 "모델료 2억 5,000만 원을 돌려주라"라는 원고(신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2심은 2006년 5월 "최진실이 폭행을 적극적으로 유발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진실이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도덕적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 최진실의 인터뷰는 쌍방 폭행이라는 주장을 반박·해명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최진실에게는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라는 원고(신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에서는 2009년 6월 <신한>의 주장에 따라 2심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으며, 2010년 2월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256336|#]] 이는 많은 [[민법]] 개론서의 [[채무불이행]] 파트에 흔히 "최진실 판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판례이다. 즉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의의가 있는 판결이라는 이야기. 다만 주로 법리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비판하는 입장에서 소개되는 편이다. 쟁점은 아래의 세 가지이다. * 소위 '품위유지약정'의 유효성 여부 * 최진실 측의 고의 및 과실 * 불완전이행으로서의 채무불이행 먼저 소위 '''품위유지약정'''에 대해서는 대법원은 계약자유원칙에 의거, 별도의 검토 없이 그 효력을 인정한다. 채무불이행의 성립요건인 '고의 및 과실' 역시 인정하였는데, 단순히 '''폭행을 당한 사실'''이 아니라 '''최진실측이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통해 폭행 사실과 폭행 직후의 사진 등을 공개하였다는 점'''에서 '''고의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두고 형사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명하는 것을 이유로 채무불이행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실제로 2심은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가장 큰 쟁점은 이 사건이 '''불완전이행'''으로서 [[채무불이행]]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불완전이행'이라 함은 '채무를 이행을 하긴 하였는데, 그 이행이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현실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례는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채무불이행은 이행지체(이행이 늦어지는 것), 이행거절(이행을 거부하는 것), 이행불능(이행이 불가능한 것)의 형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행을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지, 했는데 불완전하게 이행했다고 떠올릴 수 있는 사례가 현실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최진실측의 '품위유지약정'의 불완전이행을 긍정하였다. 그 결과 많은 민법 교과서에 불완전이행의 사례로 "최진실 판례"가 예시로 사용[* 이전 게시글에는 대법원이 최진실 사건에서 최초로 불완전이행을 인정했다는 식의 설명이 게재되어있었으나, 이는 틀린 설명이다. 비록 불완전이행이 드물게 인정되는 법리이기는 하나, 쓰레기폐기물을 묻은 후 그러한 하자를 매수인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매매한 경우, 액젓 탱크에 존재하던 하자로 인해 균열이 생겨 액젓이 변질된 경우, 건물 신축공사의 하자 등 하자담보책임과 채무불이행책임의 경합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인정되어왔던 법리였다.]되고 있다. 대법원은 이런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여 기업측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한민국 법조계가 친기업 단체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비판까지 듣게 되었다. <신한>은 승소하였으나 기업 자체가 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기업의 이미지 실추라는 짐을 씌워서 매우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신한>은 계약 종료 및 폭행 사건 후에도 최진실의 사진이 박혀 있는 쇼핑백과 브로셔를 계속 사용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0380|#]] 이러한 모순적인 행동을 두고 큰 비판이 뒤따랐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동정하는 문화 및 개인에 대한 기업의 갑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2000년대보다도 더더욱 강해진 2010년대 이후 같으면 더더욱 비상식적으로 느껴질 법한 판결이었다. || '''날짜''' || '''내용''' || || 2004년 8월 1일 || 조성민이 최진실 폭행 || || || 이후 조성민이 쌍방폭행이라고 여론조작하기 시작 → 이에 대해 최진실이 폭행을 당했던 자택 현장, 다친 얼굴 공개 → 이에 대해 광고주 <신한>이 광고 모델 최진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 || || 2005년 9월 23일 || 1심 <신한> 일부 승소(부장판사 조해섭) || || 2006년 5월 3일 || 2심 <신한> 패소(부장판사 길기봉) || || 2008년 10월 2일 || 최진실 사망, 3심 소송 진행 중 || || 2009년 6월 4일 || 3심 파기환송(대법관 박시환)[[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2065124|#]] || || 2010년 2월 9일 || 파기환송심 <신한> 일부 승소(부장판사 이대경) || || 2010년 3월 29일 || 최진영 사망 || || 2013년 1월 6일 || 조성민 사망 || == 사후 == * 2008년 11월에 청룡영화상에서 '명예 인기 스타상'을 받게 되고 영화 '남부군'에 같이 출연한 배우 [[안성기]]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고, 2008년 12월 MBC 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고 텔레비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같이 출연한 배우 [[정준호]]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다. * 2009년 8월에 최진실의 유골함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한 남성이 최진실이 자기에게 빙의해 지금 묏자리가 답답하니 자신을 꺼내달라고 부탁해서 유골을 훔쳤다고 한다. * 유골을 되찾은 후 유족들은 2009년 9월에 유해를 재안장하면서 묘원 내부에 최진실을 기념하는 공간을 꾸몄다. 참배객들이나 등산객들은 그 공간에서 최진실을 추억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 2010년 3월에 남동생 [[최진영]]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으며[[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33057487|#]], 최진실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각자의 묘 위에는 각자의 얼굴이 담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두 얼굴은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다. * 2011년 6월에 어머니 정옥숙이 생전에 거짓 소문에 시달린 딸과 아들을 위해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하였다. 이 에세이에는 최진실과 최진영 남매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생애가 개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목은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2013년 9월 9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에서 최진실의 사망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 행태가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6473150|#]] * 2013년 11월 17일 방영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 '연예가 5대 사건' 중 '최진실의 사망'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최진실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 2019년 1월 25일 [[KBS 2TV]] <연예가 중계> 조사 '한국인이 그리워하는 연예인' 1위를 차지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1084436|#]] === 친족법 개정 === 최진실은 2004년 9월 1일 당일치기 이혼 시 단독 친권을 가졌다. 이 때 조성민이 작성한 친권포기각서도 수령한다. 2008년 10월 시점, 이혼 등의 사유로 단독 친권을 얻은 사람이 사망할 경우 생존 부모에게 친권을 주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단독 친권자가 사망하면 생존 부모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한다는 법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2004년 9월 1일 이래 [[조성민]]은 최진실의 두 자녀에 대해 면접교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2008년 10월호 월간 잡지에서 본인이 직접 면접교섭의무를 이행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인터뷰한 게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진실 사망 직후 태세전환해 생뚱맞게 최진실 자녀 재산 관리에 참견하겠다고 나선다. 조성민은 간통, 사기, 중상모략, 사문서 불법 유출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전과도 있었고 가정폭력, 중상모략과 관련해 최환희, 최준희도 직접적 피해자였기 때문에 친권을 요구할 자격이 없었고, 대중은 조성민의 행태에 분노했다. 그러면서 이런 반인권적 행태를 법으로 규제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인터넷상에 '조성민 친권 반대 카페'가 개설이 돼 회원들은 2008년 11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조성민의 친권 회복을 반대하고 '친권법' 개정을 촉구하는 '카네이션 집회'를 열었다. 인터넷상에 '한부모 진실방'이 개설되고 2008년 11월 21일 국회의원 [[김상희]],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함께 국회 토론회를 열었다. '아이들의 법적 권리를 위한 실천 모임'도 결성돼 서명[* 방송인 허수경, 배우 권해효, 코미디언 이영자, 배우 박철민, 배우 신애라, 방송인 서세원-서정희 부부, 만화가 박재동, 제3대 여성부 장관 장하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등이 참여] 운동을 펼치고 여러 유명인사[* 여성학자 오한숙희, 변호사 원민경,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 [[신의진]], '진실한 아버지 카페' 운영자 오성근, 오다향 등이 참석]가 동석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1년 친족법이 개정되어 단독 친권자 사망시 생존 부모 친권 부활과 관련하여 생존 부모에 대해 가정법원이 자격 심사를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률은 2013년 7월부터 시행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4899596|#]] == [[최진실/사건사고|사건사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최진실/사건사고)] * 모두 최진실이 일으킨 게 아닌 타인에 의해 최진실이 피해입은 사건사고다. == 여담 == * 1989년 봄 삼성전자 전속 광고모델로 잘 나갈 시기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 차 방송사에 들렀다가 [[배병수]]가 먼저 말을 걸며 동업을 제의하면서 서로 안면을 튼다. 최진실의 거절에도 배병수가 집까지 알아내 찾아와서 동업을 간청하지만 계속 미심쩍어하다가 사업 계획을 들어보니 비전이 있어 보여 일을 맡겨보기로 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언제든 구두로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서도 안쓴다. 배병수한테 일을 맡긴 후 첫 성과가 영화 <남부군> 출연이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출연료를 멋대로 받아간다든가, 출연 협상 자리에 안나타난다든가 하면서 중간에 계약 파기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배병수가 정중하게 사과를 해와 동업 관계를 이어가곤 했다. 하지만 배병수가 예능 출연을 빈번히 하면서 점점 연예인이 돼 가고 머리 질끈 동여매고 빨간색 양복을 입고 다니는 너무도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가자 최진실은 그게 너무 짐스러워 기자회견을 통해 동업 관계를 청산한다. * 영화 데뷔작 [[남부군(영화)|남부군]]의 [[정지영(영화 감독)|정지영]] 감독에 따르면 신인이었던 최진실을 만났는데 인터뷰때 당당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또 이 영화를 찍는 도중 최진실이 출연한 CF가 대박이 나 스타가 되는 바람에 고마운 점도 있었다고.[[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40&aid=0000012360|#]] * 1989년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변진섭]]과 처음 만난다. 변진섭은 진행자였고 최진실은 게스트. 최진실의 매니저 [[배병수]]와 변진섭의 형이자 매니저 변요섭은 친구사이였다. * 1990년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황신혜]]와 함께 공동 수상했었는데 당시 황신혜의 매니저였던 현 대한민국의 음반 기획자이자 MBK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포켓돌스튜디오의 총괄 프로듀서인 [[김광수]] 대표가 1000만원 돈을 들여 언론사 신문 7만부(대형 트럭 5대분)를 사고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해서 엽서 투표를 했지만 최진실이 1~2만부 차이로 이겼다고 한다.[[https://entertain.v.daum.net/v/20110218070208845|#]][[https://entertain.v.daum.net/v/20180517080010137?f=m|#]] * 1991년 봄 [[엄정화]]와 처음 만난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최진실 사랑 나누기' 자선무대에서 엄정화는 MBC 합창단원으로서 백코러스를 맡는다. * 1991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촬영차 [[스웨덴]]에 갔을 때 정옥숙과 동행한다. 이 때 스웨덴어에 관심을 갖는다. 정옥숙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외국여행 경험이 있는 편이라 아동기에 접어든 최준희의 외국 유학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 1995년 영화 배우로만 활동하던 [[정선경]]에게 텔레비전 배우로도 활동해야 배우 생명이 오래 간다고 조언하며 방송계로 적극적으로 이끌었다.[[https://www.mk.co.kr/star/hot-issues/view/2011/04/250171/|#]] * 1997년 MBC <별은 내 가슴에>에 [[안재욱]]을 직접 캐스팅했다. * 1997년 MBC <특종! 연예시티>를 통해 홍콩 스타 [[여명(홍콩)|여명]]과 만났다.[[https://www.youtube.com/watch?v=P4rgz7kJMF8|관련영상]] * 1998년 7월 자전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가 발간된다. 이 책에는 최진실의 예술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최진실 사망 직후에 재출간되었으나 [[최진영]]이 출판사에 항의해서 모두 회수되었다. * 1990년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에서 흡연 연기를 하면서 담배맛을 처음 알게 되고 이 때는 구토를 할 정도로 힘든 촬영이었지만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흡연가가 된다. 7년 후인 1997년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1인 2역 중 사진작가 '소피아'를 연기할 때 흡연 연기를 보여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여성 흡연 금기 사회에서 '[[흡연]]' 이미지를 과감하게 입는다. 1998년 자서전에도 자신이 흡연가라는 걸 밝혀 둔다. 훗날 전남편 [[조성민]]은 이 사실을 대중들 상대로 거짓 [[언론 플레이]]하며 악용한다. [youtube(CwZfkWNHQew)] * '미스터 맘마'(1992년), '마누라 죽이기'(1994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년), '홀리데이 인 서울'(1997년) 등 여러 영화를 함께 하면서 [[강우석]]과 의남매가 된다. * 영화에서 어머니 역할을 많이 했는데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년), 영화 '미스터 맘마'(1992년),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년), 영화 '고스트 맘마'(1996년), 영화 '베이비 세일'(1997년), 영화 '마요네즈'(1999년) 등이 그에 해당된다. 아역 배우와 교감을 잘 이뤄내 사석에서도 '엄마'라고 부르게 된다. 물론 TV 드라마에서도 어머니 역할을 많이 했는데 MBC <약속>(1992년), MBC <추억>(1998년), MBC <장미의 전쟁>(2004년), KBS <장밋빛 인생>(2005년), MBC <나쁜 여자 착한 여자>(2007년),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등이 그에 해당된다.[* 즉 1988년 삼성전자 광고 모델에서부터 보여 준 혼인•임신•출산•육아 이미지를 잘 타고 넘으며 2008년까지 다양한 연기 세계를 펼쳐 보였던 거다. 혼인•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그 이미지를 입고도 사회적으로 잘나감으로써 여성의 직업 활동과 관련한 고정관념•편견•선입견이 해체된 시대로 한국사회를 부드럽게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관•가치관•인생관이 뚜렷한 여성을 상징하는 배우로 인식되었다.] * 어머니 정옥숙은 딸의 사회적 부상과 함께 촬영장 동행 등 최진실 매니저 역할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박진희가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정옥숙의 역할을 맡는다.[[http://www.mimint.co.kr/article/board_view.asp?strBoardID=news&bbstype=S1N13&sdate=0&skind=&sword=&bidx=1603742&page=1&pageblock=1|#]] 박진희의 딸 이은정과는 의자매가 된다. 최진실은 내성적인 정옥숙보다 외향적인 박진희를 일적으로 더 맞아한다. 남편과 이혼 후에는 최환희의 양육 역할은 정옥숙에게, 최준희의 양육은 박진희에게 맡긴다. * 무명 생활을 오래 하다가 KBS <서세원쇼>를 통해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던 패널 전문 개그맨 [[유재석]]을 2000년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MC로 추천하였다. 최진실은 유재석과 친분이 없던 사이였는데 단지 <서세원쇼>에 출연한 유재석의 모습을 보고 "메뚜기라고 재밌는 친구가 있는데 한번 써보라"며 추천했다고 한다. 훗날 유재석은 <[[해피투게더]] 시즌 3>와 <[[놀면 뭐하니?]]> 통해 최진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최진실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 2002년 무명 연예인 [[남궁민]]을 매니지먼트사와 연결시켜주어 배우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남궁민은 2005년 <[[장밋빛 인생]]>에도 출연한다. * 2004년 12월 인권변호사 [[강지원]][*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기호 6번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당시 [[박근혜]]와 [[문재인]]의 양강구도에만 세간의 초점이 맞춰져 별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0.17%를 득표하여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해당 선거에서 양강구도가 극심했음을 방증한다. 부인은 [[김영란(법조인)|김영란]] 전 [[대법관]]인데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소위 김영란법)'을 입안한 그 분 맞다.]을 찾아간다. 김재우와 같이 움직인다. 범죄 피해자한테 감히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기업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사회통념 때문이라는 걸 간파하고 사회적 연대를 모색한 것. 강지원을 통해 대표적인 여성학자 오한숙희와도 네트워킹을 이룬다. 유감스럽게도 의뢰인 최진실 면전에다가 여론조작범들이나 떠들 이야기를 한 강지원을 최진실이 끝까지 안고 간 건 이런 사회적 의미가 더 중요했기 때문일테고.[[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78#.UkTTcHmwfIU|#]]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부위원장 신혜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복지위원장 [[진선미]],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정춘숙]]도 최진실과 연대한다.[[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01#.VuR8reKIbK7|#]][[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2577|#]] * 2007년 SBS <좋은 아침>에 배우 신애 등과 출연해 자신이 즐겨 만들어 먹는 '참치고추장수제비'를 소개했다. 최진실이 사망하자 신애는 최진실이 해주던 김치찌개와 [[수제비]]를 추억하며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해서 수제비를 먹는 건 질색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하고, 1991년 MBC 어느 방송에 나와 "아직도 수제비를 먹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언론은 수제비 좋아하는 이들이나 식당들이 분노했다고 기사를 썼다고 하고 어느 기자는 가난한 시절을 잊는 것을 넘어 남까지 비웃는다며 칼럼으로 최진실을 비난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최진실은 자신이 워낙 수제비를 질리게 먹어서 그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떠돌았는 모양이나 실상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서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음식이라서 싫어하기는커녕 여전히 수제비를 좋아하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수제비를 끓여주고 함께 맛있게 먹는 장면까지 나옴.][* 최진실의 유년 시절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들여온 밀가루를 이용해서 만든 혼분식을 장려하였고, 딱히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수제비나 칼국수는 가난한 사람의 음식으로 치부되었다. 지금이야 별미로 여겨지지만.] * 2008년 1월에 개정된 친권법이 시행되자 그 달에 바로 자녀들이 자신의 성인 '최'를 따르도록 가정법원에 자녀성본변경 신청을 한다. 이를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도 관심있게 다루면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4&aid=0000072061|#]] 이로써 대한민국 친족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 한다. 자녀들의 성을 변경할 때 딸의 이름을 '준희'로 바꾼다.[* 애당초 최진실은 아들 '환희'와 운을 맞추어 딸의 이름도 '신희'로 지으려고 했으나 조성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민'으로 정했었다.] 이 건으로 악플러가 들러붙자 2008년 9월 4일 자녀 공개 자제 입장을 취했다. * 2008년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정준호]]를 직접 캐스팅했다. * 드라마 집필을 꾀하고 드라마 가제 <사노라면>을 기획했다. 이 드라마에 배우 [[천정명]] 등을 캐스팅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로 입봉도 못한 채 사망하면서 드라마 시놉시스만 남기고 이 시도는 미완인 채로 남았다. * 2008년 9월경 최진실은 사진관 '쌍마스튜디오' 사장에게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전부 앨범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여의도에 위치한 '쌍마스튜디오'는 연예인들의 증명사진 단골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js-681224.jpg|width=100%]]}}}|| || {{{#FFFFFF ▲ '''사진관 '쌍마스튜디오'에 전시된 최진실의 사진'''[* 1999년 모습으로 추정]}}} || * 사망 전날 [[홍진경]]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친구 [[MC몽]]의 'I love you oh thank you'를 신청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15&aid=0002102812|#]] 다음해 2009년 [[MC몽]] 정규 5집 〈Humanimal〉의 수록곡 '진실은 천국에서라도'는 최진실을 추모하는 곡이다.[* <진실은 천국에서라도> 피처링 김희선은 동명이인으로 배우 김희선이 아니라 보컬 트레이너 김희선이다.] 최진실은 [[MC몽]]의 노래를 좋아했고 평소 [[MC몽]]에게 자신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었는데 그게 이뤄진거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30&aid=0002519249|#]] * 최진실의 5촌 당숙 최상현은 박경삼과 [[동양방송]] 시절부터 친구였다. * 사망 전에는 인터넷에서 "사실이냐?"는 뜻으로 "최진실?" 혹은 "최트루?"라는 식의 문장이 유행하며 널리 쓰였었다. 하지만 사망 이후[* 사망 초기에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인드립]] 취급받기도...] '허참', '트루' 등으로 대체되어 쓰이다가 '[[레알]]'이라는 단어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이다. * MBC 공무원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유독 MBC에서 많은 작품을 찍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데뷔작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1988년), 출세작 <[[질투(드라마)|질투]]>(1992년), 연기 대상작 <[[그대 그리고 나]]>(1997년), 마지막 작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등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1990년대에 MBC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배우가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방송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거다.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이끈 주역이다. 애초에 MBC 특채 출신이다.] * 데뷔 초기 광고에서 성우 [[권희덕]]이 최진실의 목소리를 담당한다. * 자신의 사후 여론조작에 대비해 김재우에게 비망록을 남긴다. 2003년부터 최진실과 김재우는 의남매가 되어 서로의 직업에 대해 응원해주며 우애를 나눈다. * 예능 진행을 한 적이 있다. [[OBS경인TV]]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2008년)다. '진실과 구라'로 알려졌지만 정식 명칭은 앞에 '최진실의'가 붙는다. 즉 메인은 최진실이었고 [[김구라]]는 주로 드립에 집중했는데 이들의 호흡이 잘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 [[김구라/논란 및 사건사고|김구라]]는 2002년 10월 19일 '홍대 쌈지 스페이스'에서 '[[한국을 조진 100인의 개새끼들]]'을 부르면서 임신 6개월차 최진실을 살인교사범으로 모함한 자. 대중은 최진실이 대인배라는 걸 목격하며 최진실을 응원함.] 예능인 만큼 티저 이미지로 제작한 [[https://www.google.com/search?q=진실과+구라&client=ms-android-skt-kr&prmd=ivmn&sxsrf=ALeKk01l0_2FGFIQ6o_b398WavBnVSDl7w:1590056485324&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Syev_3cTpAhVI7WEKHSxwATAQ_AUoAXoECBMQAQ&biw=360&bih=513#imgrc=DoZpVOewAbKA0M|사진]]도 대중의 폭소를 유발하는 컨셉. 전국구 방송이 아님에도 큰 인기를 누려 시즌2까지 기획될 뻔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경기도, 인천광역시에서만 송출되는 지상파 방송. 서울특별시는 케이블 방송사를 통해 방영.] * 2010년 11월 20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연예인 자살, 누구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에서 불면증 치료에 주로 사용되는 '[[졸피뎀]]'의 부작용 위험성을 알리면서 최진실, 최진영의 죽음도 거론이 되었지만 이들의 죽음과 치료약의 인과관계가 입증된 건 없다. 이후 식약처가 '졸피뎀' 복약지도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최진실과 최진영의 죽음에 대해서는 2008년 최진실의 죽음, 2009년 노무현의 죽음, 2010년 최진영의 죽음, 2018년 노회찬의 죽음을 거치면서 언론이 사람을 죽인다는 문제가 시대 화두가 되어 2021년에는 '가짜뉴스 피해 구제법'이라는 언론중재법 개정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 [[자서전]]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에서 먼 훗날 [[사망]]할 시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싶다고 하였고, [[이혼]] 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아이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연예계를 [[은퇴]]하고 [[오드리 헵번]]처럼 말년을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이 있다. 그러나 집안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일한 [[가장]]이자 [[어머니]]의 반대로 이와 같은 의견들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실의 [[재산]]은 법에 따라 자식들에게 [[상속]]되었다. *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라는 별명이 생기고 토크쇼와 인터뷰 단골 질문에는 '''[[재산]]'''관련이 빠지지 않았는데 최진실은 늘 한결같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 그렇게 돈 많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재테크]]를 할 줄 몰라 번 돈을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만 했고 재산 관리를 전부 어머니가 하여 최진실은 어머니께 용돈을 타서 썼다고 한다. [[신용카드]]도 1995년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당시 미국 로케 촬영을 하여 신용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처음 만들었다고. 최진실은 사망할 때까지도 어머니가 재산 관리를 하여 본인 재산이 정확히 어느 정도 있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 모든 전연령층에서 남녀노소 범국민적 인기를 누렸는데, 코어 팬덤은 여자 팬 비율이 꾸준히 더 높았다. 예능이나 토크쇼에 출연하여 등장할 때 여자 방청객들이 환호하며 좋아하자 MC들이 “여자분들이 더 좋아한다”며 이를 언급하는 모습을 꽤 볼 수 있다. 최진실도 1993년 주병진쇼에서 “저는 여자 팬들이 더 많다.”고 언급했었다. * 어렸을 적 즐겨먹었던 [[간식]]은 [[요구르트]]와 [[라면땅]]이라고 한다. *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쫄쫄 굶고 있는 최진실을 보고 안쓰러워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며 만원을 쥐어주셨는데 '끼'가 다분했던 엉뚱한 최진실은 맛있는 것을 사 먹는 대신에 멋을 부리는 핑클 [[파마]]를 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의 어이없다는 표정은 아직도 기억한다며 자서전에 서술하기도. 이 에피소드로 최진실이 과거에 날라리였다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다. * 최진실은 복지정책이 미비하던 시절에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자 오랫동안 꿈꾸었던 미술대학 진학이 불투명해지면서 희망을 잃게 되고 급기야 고등학교 2학년때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다. 약국에 들러 쥐약을 달라고 한 뒤 조금씩 먹으며 신세지고 있던 친구 집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는데 친구의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뜨니 복통만 있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고 한다.[* 약사는 최진실이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약을 주면서 쥐약이라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최진실은 자서전을 통해 그때 약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최진실은 새 생명을 얻었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살고자 했다고 한다. * 29살때까지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 유년시절 부모님이 서로 고성을 오고가며 부부싸움을 하면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방구석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버릇은 커서도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본을 외울 때, 무서운 영화를 볼 때, 촬영에 들어가기 전 긴장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물어뜯었다고 했다.] * '마른 체형의 비결'로 평소 군것질을 안 좋아했다고 한다.[* 못 먹으면서 자라 소화 능력이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빵]]이나 [[돈가스]] 같은 튀긴 음식을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한 채로 트름하며 다닌다고] 대신 밥과 밀가루[* 특히 면종류]가 주식이었는데 1995년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미국 로케 촬영 당시에는 전기밥통을 들고 갔다고 한다. * [[강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 ~~강아지가[* 최진실의 화장기 전혀 없는 맨얼굴이 강아지상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고르자브종]]과 [[말티즈]]를 닮았다.] 강아지를 좋아하네?~~ * [[사회]], [[정치]][* 정치색은 밝힌 적이 전혀 없고 중립 입장이었다.]에 관심이 많아 [[신문]]을 자주 읽었으며 공백기에는 [[책]][* 특히 추리소설을 좋아했다.]을 자주 읽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최진실을 귀여운 미인이라 칭하며 좋아했다고 한다.[[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0637/1|#]] * [[심장병]]으로 인해 [[고소공포증]]이 심했다. * 2000년대에 [[가수]] 출신 배우들의 선입견이 심했을 때 이를 언급하며 “주눅들지말라”, “간혹 실망스런 연기를 보여줬더라도 기회의 싹을 자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언론과 인터넷이 도와줘야 한다. ‘지구를 떠나라’는 식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들은 겉으론 내색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 [[배우]]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다면 뭐가 되었을 것 같냐는 [[이영자]]의 질문에 어렸을 때 만화그리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었을 거라고 대답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언급했었다. * 결혼식을 취재하러 온 안면식 있는 기자에게 "나 정말 잘 하는 거 맞냐"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있다. * 사망하기 1년 전 인터뷰를 통해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은 만나지 말라, 언제 공격성을 드러낼지 모른다." 라고 간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정폭력]]의 원인중 하나가 열등감과 자격지심이기 때문이다. [[파일:9916a8016cD164739.gif]] 이와같이 전남편은 애초에 좋지 않은 손버릇을 가졌었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듯하다.[*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척 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머리를 밀어버린다] * '최진실 사단'은 언론에서 붙인 네이밍이다. 최진실은 톱스타였지만 대단히 소탈한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연예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눴다. 코미디언 [[이영자]], 모델 [[이소라(모델)|이소라]], 모델 [[홍진경]], 가수 겸 배우 [[엄정화]], 코미디언 [[정선희]], 배우 겸 라디오 DJ [[최화정]], 배우 [[신애]], 배우 [[김희선]],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등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코미디언 [[이경규]], 배우 [[이승연]], 배우 [[송윤아]], 배우 [[김지호]], 배우 [[김남주]], 방송인 [[백지연]] 등과도 친했다고 한다.] 이영자와 조성아는 최진실 사후 최진실 재단을 추진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wWcWDmyIyM8)]}}}|| || {{{#FFFFFF ▲ '''1999.06.20 출발 드림팀 출연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DIUNwTPczpM)]}}}|| || {{{#FFFFFF ▲ '''1999.06.27 출발 드림팀 출연분'''}}} || * 1990년 초반 배우 [[김희애]]와 사이가 안 좋다는 [[루머]]가 떠돌았었는데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 기자들이 최진실과 김희애가 드라마 <폭풍의 계절> 동반 출연 당시 타이틀롤로 기싸움을 했다는 뇌피셜 기사를 쓰기도 했으나 역시나 터무니없는 루머이다. 최진실이 자서전에서 강력히 해명하며 “희애 언니와 루머 관련 이야기를 나누며 한바탕 웃어넘겼다.”고 하기도 했다. 최진실은 실제로 김희애를 향한 동경심이 있었고 '폭풍의 계절'에서 김희애와 가장 많은 호흡을 맞추며 연기를 많이 배웠다고 존경심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늘 존경하는 선배로 [[김혜자]] [[강수연]]과 함께 김희애를 언급했다. * 브라운관 트로이카 라이벌이었던 배우 [[채시라]]와는 1968년생 동갑내기 [[친구]]로 작품 여러개를 같이 했지만 언론에서 라이벌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바람에 깊게 친해지진 못했다고 훗날 아쉬워 했다. * 배우 [[고소영]]과도 친했다. 최진실이 1990년대에 친한 연예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고소영과 엄정화를 언급했었다. 1998년 즈음 최진실과 고소영이 가라오케에서 술을 먹다가 대판 싸웠다는 어처구니없는 [[루머]]가 크게 돌았었는데 최진실과 고소영이 섹션TV에 출연해 우스갯소리로 직접 루머 해명 인터뷰까지 했을정도였다. 이후 고소영은 최진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허나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 * 배우 [[이미연]]과도 친했다. 2007년 인터뷰에서 '또래 연기자들 중 누구와 친한가요?' 라는 질문에 “미연이요. 미연이가 주연한 드라마 첫회 보고 문자메시지 보내줬어요. 정말 기대하던 드라마였어요”라고 대답하였다. * 배우 [[심은하]]와도 친분이 있었다. 대놓고 그렇게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은하도 최진실이 아끼던 후배 중 한 명이었고 같은 소속사였다. 심은하의 은퇴 소식에 최진실은 심은하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으며 인터뷰를 통해 “은하는 독보적인 여배우다. 하루 빨리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굉장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 2000년대 역대급 신드롬을 누리던 가수 [[이효리]]를 지켜보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진실은 한 인터뷰에서 “이효리는 천의 재목이다. 효리 친구가 드라마가 잘 안된 후에 연기를 안 하고 있는데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 봤으면 한다.”라고 언급했다.[* 최진실 사후 이효리는 빈소에 조문을 가고 싶었지만 친분이 없어 망설이다 결국 못 갔다고 한다. 대신 이소라와 엄정화의 부탁으로 최진영의 집을 방문에 아이들을 위로하고 돌봐줬다.][* 이효리가 학창시절에 최진실과 많이 닮아 '리틀 최진실'이 별명이었다고 한다.] * 배우 [[김희선]]을 상당히 아끼고 이뻐했다. “내 후계자는 희선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었고, 김희선이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리며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했었는데 최진실과 이영자도 참석했다. 최진실은 “우리가 가까운 지인들 중에 선택이 됐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희선이한테 고맙고...”, “희선이가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을 해줬구나. 그걸 많이 느껴서 더 울컥했던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결혼식 도중 '희선이가 너무 이뻤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007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외모적으로 가장 완벽한 후배라고 칭찬하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희선이가 브라운관에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고 작품을 많이 남겼으면 좋겠다.”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최진실의 마지막은 김희선과는 함께하지 못했다. 김희선이 임신 6개월차였기 때문이다. 김희선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참석하지 못하고 싸이월드 개인 미니홈피에 추모 글을 올리며 애도를 표했다.] * 배우 [[김혜자]]와 특별한 사이로 유명했다. 유독 동반출연한 작품이 많고 [[칸 영화제]]에 같이 참석하자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허나 최진실의 사망으로 이 약속은 무산되었고, 김혜자는 2009년 영화 '[[마더]]'로 배우 [[원빈]], 영화감독 [[봉준호]]와 함께 제62회 [[칸 영화제]]에 참석했다. == 출연 작품 == === TV드라마 === ||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시청률''' || ||<|7> 1989년 ||<|15> [[MBC|[[파일:MBC 로고 1986.svg|width=40]]]] ||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드라마)|한중록]][* TV드라마 첫 출연작] || 장미 || || || 시진읍[* TV드라마 첫 주연작] || 언어 장애인 || || || [[잠들지 않는 나무]] || 찬주 || || ||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드라마)|파문]] || 박선아 || || || [[제5열(MBC)|제5열]] || 대통령 후보의 딸 || || || [[당신의 축배]] || 김범경 || || || [[서울 시나위]] || 희수[* 특별 출연] || || ||<|4> 1990년 || [[각시방에 사랑 열렸네]] || 오도희 || || || [[두 권의 일기]] || 양해리 || || || 추억여행 || 심미리 || || || '''[[우리들의 천국]]''' || '''승미''' || || ||<|3> 1992년 || '''[[약속(1992년 드라마)|약속]]''' || 정인 || 평균 34.8% 최고 41.5% || || '''[[질투(드라마)|질투]]''' || '''유하경''' || 평균 40.1% (역대 14위) 최고 56.1% || || [[매혹]] || 이지훈 || 시청률 왕 최진실의 드라마 중 시청률 집계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던 드라마 || || 1993년 || '''[[폭풍의 계절]]''' || '''이진희''' || 평균 34.2% 최고 52.1% || || 1994년 || [[SBS|[[파일:SBS 로고 1990.svg|width=40]]]] || '''[[사랑의 향기]]''' || 영진 || 평균 27.7% (방영 당시 전체 프로그램 시청률 순위 4위) || ||<|3> 1995년 ||<|2> [[SBS|[[파일:SBS 로고 1994.svg|width=40]]]] || '''[[아스팔트 사나이]]''' || 오화련 || 최고 32.9% || || [[째즈(드라마)|째즈]] || 채송화 || 평균 15.5% || ||<|7> [[MBC|[[파일:MBC 로고 1986.svg|width=40]]]] || [[아파트(드라마)|아파트]] || 차나리 || 평균 24.7% || ||<|2> 1997년 || '''[[별은 내 가슴에]]''' || '''이연이, 소피아''' || 평균 40.2% (역대 13위) 최고 49.3% || || '''[[그대 그리고 나]]''' || '''윤수경''' || 평균 42.4% (역대 10위) 최고 62.4% || || 1998년 || '''[[추억(드라마)|추억]]''' || 서인영 || 평균 28.3% 최고 38.4% || || 1999년 || '''[[장미와 콩나물]]''' || '''손미나''' || 평균 32.7% 최고 44.1% || || 2002년 || [[그대를 알고부터]] || 이옥화 || 평균 16.5% || || 2004년 || [[장미의 전쟁(MBC)|장미의 전쟁]] || 오미연 || 평균 12.5% || || 2005년 || [[KBS 2TV|[[파일:KBS 2TV 로고 1984.svg|width=40]]]] || '''[[장밋빛 인생]]''' || '''맹순이''' || 평균 30.9% 최고 47.0% (TNmS) || || 2007년 ||<|2> [[MBC|[[파일:MBC 로고 2005.svg|width=40]]]] || [[나쁜여자 착한여자]] || 이세영 || 최고 24.6% || || 2008년 ||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 '''홍선희''' || 평균 15.8% || === 영화 === || '''연도''' || '''제목''' || '''배역''' || '''관객수''' || ||<|3> 1990년 || '''[[남부군(영화)|남부군]]''' || 박민자 || || || 꼭지딴 || 혜지 || || ||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나의 사랑 나의 신부]]''' || '''미영''' || || ||<|2> 1991년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 || 다혜 || || ||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 '''수잔 브링크''' || || ||<|2> 1992년 || '''미스터 맘마''' || 영주 || 227,294명[* 1992년 한국 영화 흥행 순위 2위] || || 숲속의 방 || 소양 || || || 1993년 ||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 유라 || 69,743명 || ||<|2> 1994년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제3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연기상을 수상한 작품] || 강민주 || || || '''[[마누라 죽이기]]'''[*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인기상만 주야장천 받다가 드디어 주연상 획득.] || '''소영''' || 344,900명 || ||<|2> 1995년 ||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은재 || || ||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 주영 || || || 1996년 || '''[[고스트 맘마]]''' || '''인주''' || 257,688명 || ||<|3> 1997년 || [[홀리데이 인 서울]] || 호텔 전화 교환수 || || || 베이비 세일 || 지현 || || || '''[[편지]]'''[* [[청룡영화제]] 최다 관객상 수상작] || '''정인''' || 724,747명[* 1997-98년 한국 영화 흥행 1위] || || 1999년 || [[마요네즈]] || 아정 || 95,875명[* 전국 관객 약 25만 명 추정. 기혼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은 작품. 1999년 설 연휴 기간 [[쉬리(영화)|쉬리]]의 흥행 속에서 나름 선전.] || || 2000년 || [[단적비연수]][*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년) 속편] || 비 || 616,349명[* 전국 관객 약 177만 명. 손익분기점 상회.] || === 광고 === * [[삼성전자]] * [[일동제약]] 아로나민 씨플러스, 메디폼, 메디터치 * [[캐리어(기업)|캐리어에어컨]] * 이롬 황성주생식 * 한화L&C * [[현대해상]] 하이카 * 대상 감칠맛 나는 미원 * [[롯데칠성음료]] 2% 부족할때 * 미래에셋생명 * [[KT]] * [[롯데백화점]] * [[옥시]] * [[GS칼텍스]] 시그마6 * 한라건설 한라비발디II * 나드리화장품 * 진미식품 참그루 * [[하나금융투자]] * 샤몽화장품 * 네슈라화장품 * 쥬리아화장품 * 삼성시계 * [[신원]] * 한일약품 * [[한미약품]] * [[롯데제과]] * 보루네오가구 * [[기아]][[기아 타우너]] == 수상 경력 == || '''연도''' || '''시상식명''' || '''수상 부문''' || '''작품''' || ||<|2> 1990년 ||<|2> 제11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2> 남부군 || ||<|3> 신인여우상 || ||<|3> 1991년 || 제15회 황금촬영상 ||<|3>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 제29회 [[대종상]] || || 제12회 [[청룡영화상]] ||<|2> 인기스타상 || ||<|3> 1992년 || 제13회 [[청룡영화상]] || || TV저널 올해의 시상식 || 탤런트부문 최우수상 ||<|3> 질투 || || [[MBC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연기상 || ||<|5> 1993년 || 제29회 [[백상예술대상]] || TV부문 인기상 || || 제31회 [[대종상]] || 여자인기상 ||<|2> || || 제14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TV저널 올해의 시상식 || 탤런트부문 우수상 ||<|2> 폭풍의 계절 || || [[MBC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연기상 || ||<|5> 1994년 || 제30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 제32회 [[대종상]] || 여자인기상 ||<|3> || || 제18회 황금촬영상 || 인기여우상 || || 제15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SBS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연기상 || 사랑의 향기 || ||<|4> 1995년 || 제31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인기상 ||<|2> 마누라 죽이기 || || 제33회 [[대종상]] || '''여우주연상''' || || 제16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 || [[SBS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연기상 || 째즈, 아스팔트 사나이 || ||<|4> 1997년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인기상 ||<|2> 고스트 맘마 || || 제18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2> [[MBC 연기대상]] || 베스트커플상 || 별은 내가슴에 || || '''대상''' || 별은 내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 ||<|3> 1998년 || 그리메상시상식 || '''최우수 여자연기자상''' ||<|2> 그대 그리고 나 || || 제25회 한국방송대상 || 탤런트상 || || 제19회 [[청룡영화상]] || 인기스타상 || 편지 || || 1999년 || 제35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인기상 || 마요네즈 || ||<|3> 2005년 ||<|3> [[KBS 연기대상]] || 베스트커플상 ||<|4> 장밋빛 인생 || || 여자 네티즌상 || || 여자 최우수연기상 || || 2006년 || 제42회 [[백상예술대상]] ||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2> 2008년 || 제29회 [[청룡영화상]] || 명예 인기스타상[* 1990년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거의 매년 올랐었지만 인기상만 주구장창 타갔었다. 2000년대에는 결혼 전 개봉한 <단적비연수> 이후 영화를 아예 찍지 않았으며 결국 청룡 여우주연상은 못 받게 된다.] ||<|3> || || [[MBC 연기대상]] ||<|2> 공로상 || || 2014년 || 제3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 [[분류:1968년 출생]][[분류:1988년 데뷔]][[분류:2008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은평구 출신 인물]][[분류:전주 최씨]][[분류:대한민국의 침례회 신자]][[분류:한국 여배우]][[분류:한국 여성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성 방송인]][[분류:MBC 연기대상 수상자]][[분류:자살한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최진실, d=2022-07-09 09: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