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동학·천도교 교주)] ||<-2> {{{+2 '''최시형'''[br]'''崔時亨'''}}} || ||<-2> [[파일:최시형.jpg]] || || '''초명''' ||최경상(崔慶翔) || || '''이명''' ||최갑대(崔甲大) || || '''자''' ||경오(敬悟) 또는 경상(景祥) || || '''호''' ||해월(海月) || || '''본관'''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 27세.[[http://m.srbsm.co.kr/view.php?idx=33646|#]]] || ||<|2> '''출생''' ||[[1827년]] [[3월 21일]] || ||[[경상도]] [[경주시|경주부]] 경주읍내 황오방[br](현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이곳에는 외가가 있었으며, 본가는 경주부 경주읍성 북문밖 북성건(현 경주시 [[성건동]])에 있었다.[[http://m.srbsm.co.kr/view.php?idx=33646|#]]][* 출생지 227번지 부근의 229번지에 [[천도교]] 경주교구가 있다.[[http://www.chondogyo.or.kr/niabbs4/bbs.php?bbstable=sungj&call=read&page=1&no=51&categori11=%C7%D8%BF%F9%BD%C5%BB%E7|#]]] || ||<|2> '''사망''' ||[[1898년]] [[6월 2일]] (향년 71세)|| ||[[한성부]] 중서 정선방 대묘동계 묘동[br](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 지금의 [[단성사|단성사빌딩]] 앞에서 사형되었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8743.html|#]]] || || '''비고''' ||[[동학]]의 2대 교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출신으로 [[최제우]]와 동향(同鄕) 사람이다. == 생애 == 1827년 3월 21일 [[경상도]] 경주부 경주읍내 황오방(현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에서 빈농인 아버지 최종수(崔宗秀)와 어머니 [[배(성씨)|경주 배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경주 최씨 대동보> 7권 464쪽에는 아버지 최종수에게 부인으로 [[연일 정씨]]만 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때 아버지까지 여의어 [[계모]]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한때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을 하다가 1861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할 당시 최시형은 머슴으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는데 최제우가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골랐음을 보여주는 대목. 1864년 제1대 교주 최제우가 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자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어 신도들을 이끌었다. 이후 [[태백산]]에 은신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고 경상도 [[안동시|안동대도호부]], [[강원도]] [[울진군|울진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에 은신하였다. 1892년 교조의 신원, 동학 활동의 자유,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며 1893년 [[서울특별시|한양]]으로 올라와서 동학 대표 40명을 통해 당시 임금 [[고종(대한제국)|고종]] 앞에서 통곡하며 청원하여 고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으나 시행되지 않자 [[충청북도]] [[보은군|보은]]에서 척왜 운동,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조정에서 충청도 관찰사 등을 해임하자 최시형도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전봉준, [[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간청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하였다. 1895년 전봉준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충청남도]] [[논산시|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공주시|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장수군|장수]]에서도 패배하자 몸을 숨겼다. 1898년 강원도 [[원주시|원주군]]에 머물던 중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호매곡면 송곡리(현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서 체포되었고 한성부에 압송된 뒤 그 해 한성부 중서 정선방 대묘동계 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1898년 6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시형을 포함하여 정식으로 재판받은 동학군 지도부 인사 전원은 서양식으로 바뀐 형벌 제도에 따라 교수형을 받았다. 참수 및 화형 등은 언제까지나 양반 혹은 지역 관료들이 사적으로 행한 것을 조정이 묵인한 것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때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한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정읍시|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것.] 1907년 7월 11일 한성부 남서 미동에 사는 박형채(朴衡采)의 청원으로 고종의 윤허를 받아 최제우와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1_003|#]] == 기타 == * [[손병희]]의 여동생 손소사(孫召史)와 [[결혼]]하여 장남 최동희, 차남 최동호를 낳았다. 두 아들은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손자 최익환(崔益煥)(1913. 3.19.~1999. 6.14.) 또한 [[천도교]] 종법사를 지냈다. * 1865년에서 1871년까지 은거지로 가졌던 영양 일월산에 추정 흔적이 발견되었다.[[https://youtu.be/eq9VhrCmomU|#]] *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20220219/486263/1886859231/4349206959/d2e5e327ab0a02dba01a502335b2b23a.jpg|노년기 모습이]]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20220219/486263/1886859231/4349206959/8b2ac8838b9da219ae81704473b986e2.jpg|담긴 사진]]이 2장 남아 있는데, 사실 이는 같은 날, 정확히는 '''최시형의 처형 직전'''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주한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G. 마튜닌(Николай Гавлирович Матюнин 1849.12.2~1907.5.18)이 촬영한 것들이다. 몇 초 간격으로 촬영되어 최시형의 오른손의 위치가 다른 것 외에 기본적인 차이는 없으며,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발이 퉁퉁 붓고 혼자 서는 것은 커녕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워하여 앉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받춰줘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https://www.fmkorea.com/4349206959|#]] == 대중매체에서 == * 1991년 개봉한 영화 <[[개벽(영화)|개벽]]>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연기했다. 여담으로 위의 이 유이한 작품 속 배역을 맡은 두 사람은 각기 10년을 사이로 두는 [[KBS1]] 주말에 한 사극 [[무인시대]]에서 [[이의민]]과 책사 두두을 역으로 호흡을 같이 하였다. [[분류:동학·천도교 교주]][[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 관가정공파]][[분류:1827년 출생]][[분류:1898년 사망]][[분류:종교인]][[분류:교수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