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764 0%, #003764 20%, #003764 80%, #003764)"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ffffff 대한민국 초대·제2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br]{{{#ffffff {{{+1 최시중}}}[br]崔時仲 | Choi Si-ju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YH2010042209070001300_P2.jpg |width=100%]]}}} || ||<|2> '''출생''' ||[[1937년]] [[8월 4일]] ([age(1937-08-04)]세) || ||[[경상북도]] [[영일군]] 창주면 구룡포동 장안리[br](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장안리마을)[*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1496&sc_serial_code=SRN183|#]]] || || '''본관''' ||[[경주 최씨]] || ||<|2> '''재임기간''' ||초대·제2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2008년]] [[3월 26일]] ~ [[2012년]] [[2월 22일]] || || '''학력''' ||구룡포동부국민학교 {{{-2 (졸업)}}}[br][[대륜고등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2 ([[정치학]] / [[학사]])}}} || || '''병역''' ||[[대한민국 육군]] 육군 일병 귀휴|| || '''종교''' ||[[개신교]] || || '''약력''' ||새누리당 전임고문[br]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br]한국갤럽 회장[br]민자당 비례대표[br][[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명박 정부]] 때 신설된 [[방송통신위원회]]의 초대, 2대 위원장이다. == 생애 == [[1937년]] [[8월 4일]] [[경상북도]] [[영일군]] 창주면 구룡포동 장안리마을[*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장안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구룡포동부국민학교, [[대륜고등학교]],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부터 [[1993년]]까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고, 그 후 [[1994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갤럽]]의 회장으로 근무했다. 최시중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이자 언론정책을 총괄한 실세중의 실세였다. 고향도 경북 포항으로 이명박과 같은데다, [[이상득]] 전 의원과 대학동기다.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시중을 정치적 멘토로 모셨고 [[이명박 정부]] 탄생 주역 ‘6인회’의 한 멤버이기도 한 최 전 위원장은 [[이상득]] 전 의원과 함께 ‘양대실세 대군’으로 꼽혔다. '''방통대군'''이라는 별칭도 뒤따랐다. 특히 [[미국]]에서도 이 두 사람을 ‘MB정부 양대 브레인’으로 평가했는데,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 비밀문서를 보면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친형 이상득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이 대통령의 정치적 두뇌로 생각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두 사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을 것’라고 상부에 보고했다는 문건 내용이 있었다. 2012년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방통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8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최시중은 상고를 포기했고 형이 확정된 이후 2013년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69.html|#]] == 기타 == [[https://mbn.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325842|방통위원장 청문회]]에서 군복무 중 [[탈영]] 의혹을 받았으나, [[귀휴]]로 알려졌다. 최 전 위원장은 방통위원장 시절, 기자들에게 생명선이 굵고 길게 이어진 자신의 손금을 곧잘 자랑하면서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고 말하곤 했다. == 김대중 대통령 및 [[김대중 정부]]와의 관계 == 의외로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호의적이었다. 즉, 처음부터 보수 인사는 아니었다. [[유신정권]]의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의 인터뷰를 보도할 수 없는 현실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으며, [[15대 대선]]에서도 [[한국갤럽]] 사장으로 김대중 후보에 호의적인 도움을 준 바가 있으며 김대중 정부시절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정부]]에 호의적인 여론조사를 내놓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에도 방통위 회의에서 묵념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은 우리 현대사의 큰 획으로 남아있다", "오랜 인연을 가져온 분으로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이명박 정부]] 자체가 직전 정권인 [[참여정부]]에 대비 [[국민의 정부]]에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 국장을 [[일요일]]에 끝내기 위해 7일로 줄이긴 했지만, [[김홍걸]]의 증언에 따르면 국장 과정에서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된 흥미로운 논란이 [[15대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 12일]] 당시 스티븐 보스워스 미국 대사에게 [[여론조사]] 내용을 흘린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가 전달한 여론조사의 내용이다.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0%포인트 가량 큰 차이로 앞서고 있으며,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가 이 후보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고 김대중 후보의 선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으로, 미국측에 김대중 후보의 실제 선거 결과[* 당시 김대중은 겨우 1.5%차이로 이회창과의 대선에서 접전을 벌여 신승했다] 비해도 훨씬 우호적인 내용을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에 미국 대사에게 한국 선거 상황을 전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2008년]] 방통위원장 후보자 당시 그 사건에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사실 그 당시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가 [[DJP연합]]으로 과거 5공 6공 출신 TK인사들([[엄삼탁]], [[박철언]], [[김중권]]등)을 상당수 김대중캠프로 영입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도 동의하며 TK보수세력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기에 최시중의 DJ 지원이 특별히 진보 행보도 아니긴 했다.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언론인]][[분류: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분류:대륜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이명박 정부/인사]][[분류:1937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 신자]][[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