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문하시중)] || '''{{{#670000,#fedc89 최사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고려의 배향공신)] ---- [include(틀:고려사)]}}} || ||<-2> '''[[문하시중|{{{#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br]{{{+1 최사위}}}[br]崔士威''' || ||<|2> '''출생''' ||[[961년]]|| ||한남도(漢南道) 광주목(廣州牧) 수주(水州)[br](現 [[경기도]] [[수원시]])|| || '''사망''' ||[[1041년]] [[4월 13일]][* [[율리우스력]] [[4월 7일]]][br](음력 3월 4일)|| || '''묘소''' ||불일사(佛日寺) 법운산(法雲山) 근처[br]→ 송림현(松林縣) 송현(松峴)|| || '''[[작위|{{{#670000,#fedc89 작위}}}]]''' ||청하군 개국후(淸河郡 開國侯)[br]한남군 개국후(漢南郡 開國侯){{{#!folding [ 펼치기 · 접기 ] 청하현 개국남(淸河縣 開國男)[br]청하군 개국후(淸河郡 開國侯)[br]한남군 개국후(漢南郡 開國侯)}}}|| || '''[[시호|{{{#670000,#fedc89 시호}}}]]''' ||정숙(貞肅)|| || '''[[본관|{{{#670000,#fedc89 본관}}}]]''' ||[[최(성씨)#s-3.3|수원 최씨]][* 수주 최씨(水州 崔氏). [[수원]]의 옛 지명이다.]|| || '''[[자(이름)|{{{#670000,#fedc89 자}}}]]''' ||동환(動寰)||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현종(고려)|현종]] 대의 문신. 본관은 [[최(성씨)#s-3.3|수원 최씨]]로 호족 출신인 수원 최씨 가문을 [[문벌귀족]] 가문으로 바꾼 인물이다. 증조부는 호장(戶長) 최서천(崔徐遷), 조부는 최한용(崔韓用),[* 최서천(崔徐遷)의 차남] 친부는 한남군 개국남(漢南 郡開國男) 최융예(崔融藝), 친모는 국대부인(國大夫人) 유씨[* 김해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해부 아간(金海府 阿干) 유율행(庾欝行)이다.]이다. 아들 6명, 딸 1명을 두었다. 최사위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및 최사위 묘지명과 후손들의 묘지명에 남아있다. == 생애 == [[목종(고려)|목종]] 대에 [[상서성|형부상서]][* 형부의 장관으로 형부는 지금의 법무부이다. 즉 형부상서는 지금의 법무부장관.]를 지냈다. 이것이 《고려사》에 나타나는 최사위의 최초 기록인데 이를 보아 능력이 뛰어났고 배경인 가문의 세력이나 뒷배경도 꽤 탄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고려 행영 군단''' || ||<-6> '''{{{#670000,#fedc89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 ||<-6> {{{-2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br][[강조(고려)|강조]] || ||<-6> '''{{{#670000,#fedc89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 ||<-3> {{{-2 이부시랑(吏部侍郞)}}}[br][[이현운]] ||<-3> {{{-2 병부시랑(兵部侍郞)}}}[br]장연우(張延祐) || ||<-6> '''{{{#670000,#fedc89 판관(判官)}}}''' || ||<-2> {{{-2 기거사인(起居舍人)}}}[br][[곽원]] ||<-2> {{{-2 시어사(侍御史)}}}[br]윤징고(尹徵古) ||<-2> {{{-2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br]노전(盧戩) || ||<-6> '''{{{#670000,#fedc89 수제관(修製官)}}}''' || ||<-3> {{{-2 우습유(右拾遺)}}}[br]승리인(乘里仁) ||<-3> {{{-2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br][[최충]] || ||<-6> (중략) || ||<-6> '''{{{#670000,#fedc89 통군사(統軍使)}}}''' || ||<-6> {{{-2 형부상서(刑部尙書)}}}[br]'''최사위''' || ||<-6> (중략) || ||<-6> '''{{{#670000,#fedc89 휘하 장병}}}''' || ||<-6> 300,000명 || 그러다 [[성종(요)|요성종]]이 의군천병 40만을 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 [[강조(고려)|강조]]가 이끈 30만 행영 군단의 지휘관 중 한명으로 통군사(統軍使)라는 직책에 임명되어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귀주성|귀주]] 북쪽의 육돈도, 탕정도, 서성도 세 방면으로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과의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런 기록으로 추측해보건대 [[김명원|정치적인 능력이나 서무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윤두수|군사 업무와 같은 다른 능력은 별로]]였던 듯 하다. 물론 총사령관은 본인이 아닌 강조였고 전력 차이도 뚜렷한 상대를 맞아 싸운 것임은 감안해야 한다. 상술했듯 패전의 책임자였지만, 서무 능력은 인정받았는지 이후 계속해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가 되었다가 [[상서성|이부상서]](吏部尙書)[*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의 장관]를 겸했다. 현화사비에도 등장하는데 현화사 건설을 위해 별감사(別監使) 직위를 받아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를 건축했다. 현화사비에 적힌 직위는 *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 - [[현종(고려)|현종]]이 봉한 [[공신]]호.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문산계 품계로 종1품 최고위 [[산계#고려|품계]]. * 검교태부(檢校太傅) - 검교직은 실권이 없고 단순히 직위에 이름만 올렸을 때 붙인다. 태부는 [[삼사(관직)|삼사]] 중 서열 2위이다. *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차관. * 판삼사사(判三司事) - [[삼사(관청)|삼사]]의 장관. * 상주국(上柱國) - 최고위 [[상훈법|훈위]]. 훈위는 신하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주는 명예직이다. * 청하군 개국후(淸河郡 開國侯) - 청하군을 [[봉호]]로 하는 [[후작]]. * [[식읍]] 1,000호(食邑 一千戶) 이후 [[성종(고려)|성종]]의 12목 제도를 더 발전시켜서 지방관과 파견직을 더욱 세밀화하고 심화시켜 [[고려]]의 지방 통치를 강화시켰다. 또한 지방 소규모 [[호족(한국사)|호족]]들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이 지방 통치력 강화의 성과를 인정 받아 * 광국공신(匡國功臣) - 현종이 새로 봉한 공신호. * 검교태사(檢校太師) - [[삼사(관직)|삼사]] 중 서열 1위로 최고위 칭호.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중서문하성]]의 최고위 관직. 이 되었다. [[흥료국]]의 건국을 틈타 거란을 침공하고자 했던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의 제안을 반대했다. 이후 나이가 들어 퇴직을 요청하였고, [[내사령]]으로 [[치사#致仕|치사]]하였다. [[정종(고려 10대)|정종]] 대에 사망하였고, [[태사]]에 추증되었다. 전쟁에서는 큰 역할을 맡지 못했지만 지방 제도의 개혁으로 고려 [[고려#지방 행정|지방 행정]] 제도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 공으로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묘지명 기록 == === 최사위 묘지명 === [[문종(고려)|문종]] 때 최사위의 막내아들 최영언이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묘지명이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다. 고려사엔 없는 최사위의 가계가 기록되있고 여섯 아들과 사위의 이름과 관직을 알수 있다. 각각 * 1남 어사중승(御史中丞) [[최충공]](崔忠恭) * 2남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충경(崔忠敬) * 3남 사재승(司宰丞) 최준검(崔遵儉) * 4남 내사서령(内史書令) 최충약(崔忠諾) * 5남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郎中) 최충영(崔忠永) * 6남 시합문지후(試閤門祇侯) 최영언(崔令言) * 사위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郎中) 김경화(金敬和) 최사위는 건축 및 토목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그가 참여한 건축물은 * 현화사(玄化寺) - 현화사비와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 [[봉은사]](奉恩寺) * [[태묘]](太廟) * [[보제사]](普濟寺) 금당(金堂), 나한전(羅漢殿) * 의왕사(醫王寺) * 사가원(寺家院) * [[서경(고려)|서경]](西京) 사천삼사(四天三寺) * 서경(西京) [[장락궁]](長樂宮) * 서경(西京) [[태조(고려)|태조]]진전(太祖眞殿) * 연주(延州) 진북영화사(鎭北靈化寺) * 선주(宣州) 신중사(神衆寺) * 진도현(珍㠀縣) 점찰원(占察院) * 시진현(市津縣) 포천(布川) 미륵원(彌勒院) * 낭천군(狼川郡) 개통사(開通寺) * 계성사(啓星寺) * 개차근산(皆次斤山) 정양사(正陽寺) * 수주(水州) 자복사(資福寺) * 송림현(松林縣) 보현관(普賢舘) 가 있다. 내용을 보면 보제사, 봉은사, 현화사, 태묘, 장락궁, 태조진전 등 유명한 건물도 눈에 띈다.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다음과 같다 * 직위: 태사(太師) - 내사령(內史令) * [[산계#후삼국시대|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시호]]: 정숙공(貞肅公) 직위와 시호는 고려사와 똑같지만 향직 품계가 추가되어 있다. 최사위의 현종 옹립 시기의 일화, 여요전쟁 때의 일화가 실려있다. [[현종(고려)|방금성고(方今聖考)]][* 방금은 지금이란 뜻이다. 성고는 임금의 아버지를 의미하는데, 이 묘지명이 만들어졌을 때가 [[문종(고려)|문종]] 때다. 문종의 아버지는 [[현종(고려)|현종]]이므로 '지금 임금의 아버지'는 현종이다.]께서 [[잠룡]](潜龍) 시절 [[고려의 궁원|대량원(大良院)]][* 현종은 대량원에 봉해져 대량원군이 되었다.]에 머물고 있을 때, [[천추태후|여후(呂后)]][* [[천추태후]]를 한나라의 [[고황후 여씨|여후]]로 비유하여 비난한 것이다.]가 [[김치양]]과 성고를 죽이려하자 이를 막고 대보(大寶)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여요전쟁 시기, 거란국(契丹國)이 병마를 끌고와 [[강조(고려)|배주신좌(背主臣佐)]][* 주인을 배신한 신하, 즉 [[강조(고려)|강조]]를 의미한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사위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일축했다. 거란군이 돌아가던 중, 그들을 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 증손자 최계방 묘지명 === 최계방(崔繼芳)은 최사위의 증손자로 자는 복시(復時)이다. 아들은 장남 최함소(崔諴少), 차남 최관오(崔觀奧), 감찰어사(監察御史) 최▨▨(崔▨▨)과 혼인한 성명 미상의 딸이 하나있다. 최계방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공신호: 추충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推忠同德盡郎衛主匡國功臣) - 현종이 하사한 공신호로 고려사에 나오는 공신호의 풀버전으로 보인다. * 직위: 내사령(內史令) * 수직: 수태사(守太師) * 작위: 한남군 개국후(漢南郡 開國侯) * 시호: 정숙공(貞肅公) 이다. 최사위의 장남 최충공이 최유서(崔惟恕)를 낳고 최유서가 최계방을 낳았다. 최계방의 어머니는 [[김원충]]의 조카이며 [[명의왕후]]의 이모이다. 최계방 묘지명에선 최사위가 성조 현종(聖祖顯宗)을 지켜 태조의 자리(太祖之位)를 잇는데 도와주었고, 정통(正統)을 만세(萬世)에 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썼다. 그리하여 수원 최씨가 '삼한의 대족(三韓之大族)'이 되었다고 한다. === 고손자 최우보 묘지명 === 최사위의 고손자 최우보(崔祐甫)는 최융예(崔融藝) → 최사위(崔士威) → 최영언(崔令言) → 최덕준(崔德峻) → 최은(崔殷) → 최우보(崔祐甫) 순으로 가계가 이어진다. 어머니 이씨는 사문조교(四門助敎) 이사강(李思絳)의 딸이다. 그는 역사에 조예가 깊어 낙랑군 개국후(樂浪郡 開國侯)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당당히 참여했다. 최우보 묘지명에 나오는 최사위의 관작은 수태사(守太師) - 내사령(內史令)으로 현묘조(顯廟朝)에 대공덕(大功德)을 세워 묘정에 배향(配食廟庭)되었다고 한다. == 대중매체 ==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최오식이 연기했다.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박유승이 연기했다. [[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최사위|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 문서의 최사위 문단]] 참조. [[분류:961년 출생]][[분류:1041년 사망]][[분류:수원 최씨]][[분류:문하시중]][[분류:고려의 배향공신]][[분류:고려의 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