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포천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분류:1891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 || 성명 ||최면식(崔勉植) || || 자 / 호 ||경소(敬紹) / 염재(念齋) || || 본관 ||[[경주 최씨]][* 화숙공파 29세손 '''식(植)''' 상(相) 항렬.] || || 생몰 ||[[1891년]] [[1월 7일]] ~ [[1941년]] [[7월 3일]] || || [[출생지]] ||[[경기도]] 포천현[br](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익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최익현]]의 손자이기도 하다. == 생애 == 최면식은 1891년 1월 7일 경기도 포천현(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최영학(崔永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로 이주하여 [[장사동(종로구)|장사동]]에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결심, 무기를 휴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7년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고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5676|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남도 지역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조달하여 광복회장 [[채기중]]에게 증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다 1918년 초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2월 25일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총포화약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4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662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그후 1여년 동안 미결수로 복역하다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407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출옥 후 대한광복회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에 재차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반신불수가 되었다. 1925년 이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상·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와 숭인면 신설리(현 [[동대문구]] [[신설동]]) 등지에 은거하며 자택을 국내 독립운동 단체의 연락처로 제공하기도 하고, 상경하는 청년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독립투사 비밀 기술원에서 의술을 배워 한약방을 개설해 어려운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하기도 했다.[[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1203|#]] 그러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1년 7월 3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