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서울대학교 총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B2D57, #00397F 20%, #00397F 80%, #1B2D57);" '''{{{#ffffff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br]{{{#ffffff {{{+1 최규동}}}[br]崔奎東}}}'''}}}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최규동.png|width=100%]]}}} || ||<|2> '''출생''' ||[[1882년]][* 1881년생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 [[12월 30일]] || ||[[경상도]] [[성주군|성주목]] 가천방 천동[br](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 ||<|2> '''사망''' ||[[1950년]] [[10월 18일]] (향년 67세) || ||[[평양시]] 북구 미림이리[br](현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 || || '''학력''' ||고향 사숙(私塾) {{{-2 ([[한학]] / 수학)}}}[br]광성상업학교 {{{-2 (야학부 / 중퇴)}}}[br][[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광신상업학교]] {{{-2 (졸업)}}}[br]정리사 {{{-2 (수학연구과 / 졸업)}}} || ||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 || '''본관''' ||[[최(성씨)|영천 최씨]][* [[http://m.seongjuro.co.kr/view.php?idx=34193|#]]] || || '''호''' ||백농(白儂) || ||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교육자, 교육행정가.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상세 == 1882년 경상도 성주목 가천방 천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에서 아버지 최영한(崔永漢)의 9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세 되던 1901년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상경한다. 상경 도중 화성향교의 전신인 차씨 서당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처음 [[아라비아 숫자]]로 덧셈 뺄셈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또 중교의숙(中橋義塾)[* 1896년 [[민영기(친일반민족행위자)|민영기]]가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종로구 중학동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으로 1906년 폐교되었다.]에 들렀다가 서양 산법을 보고 그 과학성과 명료함에 탄복하여 현대 셈법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905년부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724|광성상업학교]] 야학부와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광신상업학교]]에서 [[일본어]]와 산술을 배웠으며, 이 무렵 안일영(安一英)[*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수학교사. [[양주동]] 교수의 수필에 나오는 유년기 시절 '몇 어찌' 일화에서 '기하'라는 한자어의 유래를 알려준 사람이다.]과 유일선(柳一宣)[*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한국인 최초로 근대수학을 전공한 인물로 정리사를 설립해 근대수학을 가르쳤다.]을 만나게 된다. 이후 광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광신상업학교를 졸업한[[http://2011oldwww.snu.ac.kr/presidents/4|#]] 그는, 유일선이 설립한 정리사(精理舍)[* 1906년 서울에 설립되어 1912년까지 운영되었다.] 수학연구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 무렵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앙고등학교|융희학교]], [[중앙고등학교|기호학교]], [[대성학교]], [[휘문의숙]], 기명학교(箕明學校)[* 1905년 평양 성당에서 세운 가톨릭계 학교이다.]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에 부임했다. 당시 최규동은 '최[[대수학|대수]]'로, 안일영[* 이 사람을 사사했던 사람이 시인, 영문학자, 국문학자 [[양주동]] 교수다. 양 교수가 유년기에 시골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도시로 나가 근대 학문을 배울 때 안 선생 문하에서 기하학을 배웠었다. 한문을 통으로 뗐던 양 교수가 생각하기에 幾何를 그대로 훈독하면 "몇 어찌"가 되니 뜻이 통하지 않아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안 선생은 처음에 "너 한자 공부하고 왔다며? 진짜 몰라?"라고 반문했으나 양 교수가 "한문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고 뜻도 통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단어가 명말 [[서광계]]가 geometry를 중국식 발음인 '지허'로 음/의역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답해주었다. 이때 목을 어루만지며 "때를 좀 씻거라."라고 지적했다는데, 이것은 견문의 부족을 비유한 것이다. 이 일화는 양 교수의 수필에 실제로 나오는 내용이다.]은 '안[[기하학|기하]]'로 불리며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수학 강의가 유명했다. 1918년에는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으며, 1919년 국내 최초로 중등교육 수학 교과서를 집필하여 출간했다. 1920년 6월 [[한규설]], 남궁훈(南宮薰)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여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으며, 노동독본 등 야학교재의 편찬 간행과 정기강연회를 실시했다. 1934년 5월에 국학 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이 되어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언어학자 대회에 한국대표로 정인섭(鄭寅燮)을 파견하여 한글과 한국어의 과학성을 알리게 했다. 광복 후 [[미군정]] 학무국의 자문 기구인 한국교육위원회,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행정을 담당하였고 서울시교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조선교육연합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정기 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하였다. 1949년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으나,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같은 해 10월 18일 평양시 북구 미림이리(현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서 공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종전에는 1953년 6월에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1년 10월 1일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이 공개되면서 사실이 알려졌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200239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1769&publishType=00010|#]]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친일 논란 ==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 기관지 〈문교의 조선〉에 중동학교장 최규동 명의로 '죽음으로써 군은(君恩)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징병제/일본|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이라는 특집기획에 실린 네 편의 글 가운데 하나로[* 다른 세 편의 글을 쓴 사람은 연희전문학교장 [[윤치호]], 한성상업학교장 김주익, 휘문학교장 홍산범식] 설사 강요에 의해서 집필했더라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친일행위임에는 틀림없다.[[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83026.html#csidx8f990bae42494758c53f1e4da57dbcb|관련기사]] 다만 당시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 서울대학교 총장 임명시에도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직접 쓰지 않은 것으로 해명이 되어 임용된 사실이 있다. [[http://www.sp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2|관련기사]] 2015년 3월 교육부는 최규동을 '3월의 스승'으로 선정했다. 이에 대해 상기한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이 스승으로 떠받들어질 자격이 있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당시 심사과정에서 최 선생의 친일행적 여부를 확인했다. 창씨개명 거부, 건국훈장 추서 등 대한민국 초기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됐다"고 해명했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309500152|#]]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 논란에 대해 "일부 자료만을 갖고 전 생애를 친일행위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503091713171|#]] == 대중매체에서 == 1966년 영화 《[[남북천리]]》에서 배우 임운학이 연기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82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영천 최씨]][[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총장]][[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납북자]][[분류:6.25 전쟁/사망자]][[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