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95년 사망]][[분류:박릉 최씨]] [목차] == 개요 == 崔敬嗣 (? ~ 695) [[당나라]], [[무주(당나라)|무주]]의 관원. 활주(滑州) 영창현(靈昌縣) 출신으로 본관은 박릉 최씨 제3파[* 원문에서는 제3방(第三房)으로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한국의 파(派)를 방(房)이라고 한다.]였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손자인 최광원의 열전을 통해 최경사의 행적이 언급된다. == 생애 == 최경사는 노름과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던 당시 방주(房州) 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중종(당)|중종 이현]]이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고 방주로 유배된 뒤 많은 관리들이 중종에 대해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최경사는 전임 방주 자사였던 장지건, 동현질과 더불어 여릉왕에게 예의와 공경을 갖추었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중종이 복위한 당시 최경사와 동명이인인 익주(益州) 장사 최경사가 있었는데 관리 명단이 중종에게 올라올 때마다 그에게 4번 이상 관직을 수여했으나 나중에 이 최경사를 소견한 뒤에야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종은 최경사에 대해 수소문했으나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위안석]]을 통해 최경사의 아들인 최열(崔悅)[* 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는 최왕(崔汪)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류이다.]에게 관직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