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절터]] [include(틀:고려의 왕립 사찰)] [목차] == 개요 == 天壽寺 [[고려]]의 왕립 사찰 중 하나. [[숙종(고려)|숙종 명효왕]]이 건설했고, [[예종(고려)|예종 문효왕]] 때 크게 재건된 사찰이다. 건설 후 예종은 천수사를 숙종 명효대왕과 [[명의태후]]의 원찰로 삼았다.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된 절로 여말 [[황산대첩]] 당시까지 존재했다. [[조선시대]]엔 몰락한 상태로 잔존했고,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부지만 남아있다. == 설명 == 원래 천수사 부지엔 '약사원(藥師院)'이라는 작은 사원이 있었다. 숙종이 지은 천수사는 처음엔 다른 곳에 짓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사찰명의 뜻은 '하늘의 수명', '[[천자]]의 삶'을 의미한다. 숙종이 붕어한 후, 예종은 아버지가 지은 사찰을 크게 중창해 부왕의 원찰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1106년 9월에 영평현 [[백작]] [[윤관]]이 책임자가 되어 천수사 건설을 지속하여 끝냈다. 허나 1111년에 태사(太史)가 천수사 부지가 최악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약사원이 있는 부지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에 예종은 친히 약사원에 가 직접 터를 살펴 보았다. 그리하여 약사원을 없애고 그 부지에 천수사를 새로 짓기 시작했는데, 이미 다 지은 사찰을 딴 데로 옮겨 짓는다니, 더 크게 만든다니 하자 빡친 신하들은 천수사 중수를 반대했다. 예종은 처음엔 이에 동의했지만, 1112년 7월 어머니 명의태후도 붕어하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수사 중수를 시작했다. 신 천수사에 부왕과 모후를 같이 모실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1116년 3월, 천수사가 완공되었고, 예종은 부왕과 모후의 어진을 안치했다. 예종은 이 천수사를 보고 부모의 얘기를 하다가 잠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파한집에도 천수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천수사는 경성(京城)[* 파한집 원문 기록으로 [[만월대]]의 별칭.] 동쪽에 있었고 천수사 북쪽에는 산봉우리가, 남쪽에는 시냇물이 있었다고 한다. 천수사로 들어오는 큰길 양 옆으론 월계수 수백 그루가 있어 강남(江南)[* 북송, 송나라의 별칭.]에서 온 사신이 황도(皇都)[* 파한집 원문 기록으로 [[만월대]]의 별칭. 광종 ~ 성종 초엔 개경의 정식 명칭이었다.]로 올 때 반드시 이 월계수 밑에서 쉬었다고 한다.[* 이 문구 원문은 '自江南赴皇都者'인데 송나라와 고려를 대등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왕손(王孫)[* 국왕의 자손들.]과 공자(公子)[* 공작의 자식들. 고위왕족의 자제들을 통칭한 것으로 보인다.]들은 꼭 이 천수사에서 놀았다고 한다. 보한집 권하엔 혜문선사(惠文禪師)란 승려가 쓴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천수사에 관한 시다. 제목도 천수사인데, 두 문구만 기록했다. >긴 길과 문 밖엔 사람들이 남북으로 오가고, >늙은 소나무와 돌 옆엔 달이 고금부터 있었네. >---- > - 보한집 권하 中.[* 보한집의 저자인 최자는 뒤 문구가 [[정지상]]의 시를 교묘히 베낀 것이라며 영악하다고 평했다.] 천수사는 매우 화려해 [[인종(고려)|인종]], [[의종(고려)|의종]], [[명종(고려)|명종]]이 찾았으며 [[여몽전쟁]] 이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조선 때에는 크게 몰락했고, 천수원(天壽院)이란 이름으로 여행객들이 묶는 숙소로 전락했다. === 천수사남문도 === 고려시대의 화가 이령(李寧)은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남을 정도로 당대에 유명한 인물로 그가 그린 그림은 북송 황제 [[송휘종|휘종]]까지 감탄할 정도였다. 어느날 인종 공효왕은 북송 상인에게 진귀한 그림 한 장을 진상받았다. 왕은 그림이 맘에 들어 이령을 불러 보여줬는데, 이령은 자신이 그린 것이라며 인종을 놀래켰다. 이령이 접합된 그림 뒷면을 뜯어내 보여주자 정말 이령의 글귀가 적혀 있어 이령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이 바로 천수사를 그린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이다. 그림은 실전됐으나 제목이나 관련 일화를 보면 천수사 남문을 중심으로 고려의 실제 환경을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사 이령 열전과 파한집 권중에 이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