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명 황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명 제15대 황제[br]{{{+1 희종 철황제 | 熹宗 悊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ianqiZhe.jpg|width=100%]]}}} || || '''출생''' ||[[1605년]] [[12월 23일]] || || '''사망''' ||[[1627년]] [[9월 30일]] (향년 21세) || || '''능묘''' ||[[덕릉]](德陵) || ||<|2> '''재위기간''' ||'''{{{#670000 제15대 황제}}}''' || ||[[1620년]] [[10월 1일]] ~ [[1627년]] [[9월 30일]][br],,(7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주(성씨)|주(朱)]] || || '''휘''' ||유교(由校) || || '''부황''' ||[[태창제|광종 정황제]] || || '''묘호''' ||'''[[희종]](熹宗)''' || || '''시호''' ||달천천도돈효독우장문양무정목장근철황제[br](達天闡道敦孝篤友章文襄武靖穆莊勤悊皇帝) || || '''연호''' ||[[천계]](天啓, [[1621년]]~[[1627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 [[태창제]]의 장남. [[묘호]]는 희종(熹宗), [[시호]]는 달천천도돈효독우장문양무정목장근철황제(達天闡道敦孝篤友章文襄武靖穆莊勤悊皇帝). 휘는 유교(由校). 연호는 천계(天啓). == 생애 == ||[[파일:e66616ba4b784d0d99f71acf77ffb9e8_th.jpg|width=250]]|| 15대 황제 희종 주유교는 태창제 주상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력 41년(1613) 주상락이 태자였을 때 태자비 곽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다시 태자비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는 정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 측실부인 중에서 태자비를 고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재인, 선시, 숙녀 등 품계가 낮은 측실들이 있었을 뿐이다. 만력 33년(1605) 재인 출신 왕씨가 주상락의 장남 주유교를 낳고 만력 47년(1619)에 사망했다. 신종 [[만력제]]는 장남 주상락을 냉대했다. 주상락의 생모 왕공비가 신분이 천한 궁녀 출신이라고 싫어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간사한 정귀비의 간계에 놀아났기 때문에 장남을 멀리했다. 만력제의 장손으로 태어난 주유교도 조부의 관심 밖에 있었다. 아들이 미워도 손자는 예뻐함이 인지상정인데도 만력제는 그렇지 않았다. 역시 정귀비가 걸림돌이었다. 주유교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불안하게 보냈다. 나이 어린 주유교가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음산한 궁궐에서 유일하게 즐긴 일은 목공예였다. 16세 어린 나이로 즉위해 23세로 요절하기까지 7년간 재위했다. [[명나라]] [[암군]] [[명 4대 암군|F4]] 중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데, 그 7년 동안 [[목수]]질만 하다 죽었다. 특히 즉위한 이후에는 조부 만력제가 망친 국정을 쇄신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그의 관심사는 여전히 목공예였다.[* 그래서 환관 [[위충현]]이 신하들의 상소를 천계제에게 전달할 때는 꼭 '''천계제가 목공예에 열중일 때만 노려서''' 보고했다고 한다. 목공예 한참 빠져 있는데 불쑥 처리해야 할 국정 상소를 가져와 폐하께서 처리하셔야 한다고 하니 천계제는 짜증내면서 "아 니가 알아서 해"라고 내뱉었고, 그걸 또 위충현은 '황제께서 내게 맡기셨다'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고.] 황제가 불쑥 나타나 십장처럼 목수들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천계제는 친히 대패질하고 가구를 만드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건청궁의 미니어처를 정원에 '''완벽 재현'''할 정도였다. 허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마에스트로#s-1|마에스트로]]가 아니라 '''대명국의 황제'''였다는 것이다. [[송휘종]]과 마찬가지로 천부의 재능이 있었으되, 재능을 살리는 직업 대신 분수에 넘치는 지위에 앉아 자신과 나라를 함께 망쳐버린 케이스. 당시에 목공은 시시한 취미가 아니라 돈벌이도 잘 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평가도 높은 직종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황제가 할 일은 아니긴 하다.[* 자세한 건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067540|이 글]]을 참조. [[루이 16세]] 항목도 함께 참고. 차라리 [[압뒬하미트 2세|권력이라도 확실히 붙들고 이것저것 해 봤으면]] 취미 때문에 저평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틈만 나면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다. 사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가정사 탓이 크다. 어머니 왕재인(王才人)을 죽인 새어머니 이선시(李選侍)가 연루된 [[명말 3대 의안#s-5|이궁안]]이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명말 3대 의안#s-5]] 항목 참고할 것.] 여하간 [[만력제]] 시대의 각목 테러 사건인 [[명말 3대 의안#s-3|정격안]], [[태창제]] 의문사 사건인 [[명말 3대 의안#s-4|홍환안]] 그리고 이 막장 집안 싸움 이궁안이 [[명말 3대 의안]]이다. 이때문에 천계제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를 모두 넘긴 뒤 취미 생활인 [[목공]]과 [[귀뚜라미 싸움]]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뇌물]]이 끊이지 않고 별의별 막장 짓을 일삼았다. 그렇게 환관 위충현이 이선시와 결탁하여 천계제의 무능함과 무관심을 이용해 난동을 부려 명나라의 정치를 막장으로 만들었을 때 명나라는 여진족이 [[요동]]을 다 장악하고, 농민들은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중 천계제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요절한다. [[뱃놀이]]를 하다가 어쩌다 물에 빠졌는데, 과거 [[정덕제]]의 죽음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생긴 [[노이로제]]가 사인이었다.[* 왕공창 대폭발 후유증으로 병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때는 천계제의 유일한 아들인 헌회태자마저 요절했기에 본인도 이에 충격을 받아 거의 [[기절초풍]]한 상황이었다.] 또한 [[방사]](= 방술사)의 말을 믿고 옛 [[금나라]] 황릉 일대를 파괴했다. 천계제는 [[천명제|누르하치]]가 저렇게 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금나라]] 황릉의 왕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진족]]의 용운이 아직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풍수]]를 파괴하고 용맥을 잘라 왕기를 없앤다."는 '신묘한 방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군대를 보내 금나라 황릉 지역[* 여담이지만 이것을 만든 사람은 '''[[금나라]]의 [[폭군]] [[해릉양왕]]'''이다.]을 파괴하고 불지르고 뽑은 다음 그 일대 산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물론 예전에 [[금나라]]가 멸망할 때 [[몽골 제국군|몽골군]]들이 마구잡이로 [[도굴]]했기 때문에 딱히 남은 건 없었다. 하지만 [[천하통일|중국 통일]] 후에는 같은 민족으로 보고 복구를 해서 [[원나라]] 때는 명소였다.] 게다가 천계제는 인원을 두 차례 파견하여 지상, 지하, 바깥, 내부까지 구룡산 능원에 있는 금나라 황릉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파냈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철거한 후 각 황릉의 지궁을 파헤쳤고, 땅바닥에 흩어진 석주나 난간 같은 건축 부자재와 돌멩이로 묘실을 메워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여진의 왕기를 단절시키려 했으며, [[풍수사]]의 조언대로 [[태조(금)|금 태조]]의 예릉이 있던 용두에 있는 흙을 파헤쳐서 용머리를 자르고, 용머리 아래에 있는 목 부위에도 큰 구멍을 파놓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6%98%8E%E7%86%B9%E5%AE%97%E5%83%8F.jpg|width=250]]|| 또 예릉이 있던 자리에는 고탑(皐塔)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관우]](關羽)와 [[남송]](南宋)의 [[명장]] [[우고]](牛皐)의 영혼을 불러내서, [[명나라]]가 [[천명제|누르하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후금]](= [[청나라]])이 강성해지자 그들의 조상들인 금나라 황제의 무덤을 파괴하여 막아보려는 주술적인 행위였으나, 이는 같은 여진족인 후금을 빡치게 만들어 침략원인을 제공하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이를 '''천계 굴릉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후세의 [[고고학자]]들에겐 큰 골칫거리를 던져준 셈이었다. 이때 건립한 관제묘와 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천계제가 [[암군]]이 된 데는 똑같은 암군인 할아버지 [[만력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앞에서도 썼듯이 만력제는 후궁 정 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 귀비의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이 장자승계의 원칙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여 크게 갈등하다 결국엔 실패했다. 그런 알력이 있는 와중에 만력제는 [[태창제|맏아들 주상락]]의 아들 천계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계제는 만력제가 죽고 [[태창제]]가 황태자로 봉하는 16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가까웠다'''. 결국 천계제의 교육수준이 이 정도가 된 이유는 결국 [[만악의 근원]] 만력제이다. 괜히 명나라는 만력제 때 망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다만 아무리 정치와 학문에 관심이 없고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다 해도 차기 황제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이 글을 모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명나라 황실에서 황태자가 되는 천계제한테 신경을 안쓸리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지적장애]]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뛰어난 목공예 재능과 집착을 보면 [[서번트 증후군]]이 의심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지 [[태창제]]는 재위 29일 만에 죽고 말아 천계제는 정말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 그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나중에 [[숭정제]]가 되는 5살 어린 [[동생]] 주유검을 아끼며 자식처럼 잘 대해주었고 동생의 교육에는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숭정제와의 우애가 매우 깊었다. 죽으면서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거다."라고 숭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뭐, 보는 눈이야 있었지만, 숭정제가 땜빵해 보려고 하기엔 이미 억만 년이나 늦어버린 상황이라 명나라는 숭정제 대에서 멸망했다. 그의 정비 장 황후는 항상 환관의 횡포를 견제한 덕에 숭정제 때 효애철황후라는 명칭을 받고 무사하게 지냈고 [[이자성의 난]] 때도 끌려나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자결했다. == [[명사(역사책)|명사]]의 논찬 == >명나라는 세종 이후부터 기강이 날이 갈수록 쇠퇴했고 신종 말년에는 심하게 무너졌도다. 비록 엄격하고 공정하며 영특하고 용감한 군주가 있었음에도, 이미 다시 기세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거듭 희종의 범속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환관이 권력을 훔쳐 상을 남발하고 혹형을 단행하여 충량한 이들이 참화를 입고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찌 대업을 이루겠는가? == 기타 == *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는 영화 <[[영웅(2002)|영웅]]>의 [[진시황]]과 <강희왕조>에서 [[강희제]]를 맡았던 명배우 [[진도명]]이 천계제 역으로 출연했다. 실제 천계제와 비슷하지만 역사와 달리 신장병으로 죽었으며 죽기전에 숭정제에게 위충현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중국 드라마 <[[천하|대명천하]]>는 천계제 때 [[위충현]]과 봉성 부인, 천계제의 동생 주유검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암투를 다루고 있다. * 천계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 [[광해군]](재위 1608년 ~ 1623년)과 [[인조]](재위 1623년 ~ 1649년)의 재위 기간과 겹친다. * [[로마 제국]]의 [[콤모두스]]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황제]]로서는 부적합하지만 이들이 했으면 매우 적합한 직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천계제는 황제로서는 부적합했으나, [[목수]]로 태어났으면 대성했을 인물이고 콤모두스 역시 황제로서는 부적합했지만 [[검투사]]로 태어났으면 대성했을 인물이었다. 다만 콤모두스는 재위 2년까지는 무척 멀쩡했고 평균 정도의 능력을 가진 황제인데다 망가지기 전까지는 의외로 황제가 더 적합한 직업이었다. 고대 서양 군주 중 최고의 [[명군]]으로, 깐깐하고 엄격한 면이 많던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2세기 당시 최고의 인재풀을 가진 [[원로원]]이 콤모두스의 자질을 높게 평가했던 부분을 생각해보면, 천계제와는 본질부터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케이스였다. 콤모두스는 아버지 생전부터 어머니처럼 따른 큰 누나 [[루킬라]]가 재위 2년 만에,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콤모두스 아내가 아우구스타가 되면 사라질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콜로세움]]에서 별 이유없이 암살될 뻔 했다. 다행히 암살범이 [[중2병]] 대사를 외치며 뜸을 들여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 충격으로 병석에 누웠는데, 얼마 되지 않아 최측근이 근위대장에게 암살되고 본인까지 2번이나 별 다른 이유 없이 암살 위협을 겪은 탓에 정신분열, [[대인기피증]], [[환청]] 등에 시달리더니 완전히 망가지게 됐다. 어떻게 보면, 콤모두스를 여러 번 접견한데다 이 황제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동년배의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처럼 실제 콤모두스는 [[인간말종]]이자 로마사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이라는 평과 달리 천성 자체가 착하고 누나에게 암살 음모를 겪은 이후 그 후유증으로 망가진 불우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 [[5세기|약 1,200년 전]]에도 천계제처럼 공구를 좋아한 황제 [[후폐제(유송)]]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인간과 비교해 보면 차라리 진퉁 예술인인 천계제가 백만 배 나았다. 적어도 천계제는 나무만 썰고 깎았지만 [[토막살인|이 인간은 '''사람을 썰고 깎아내어 가구로 만들었다.''']] *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아버지 주상락이 독살당하는 바람에, 황제가 되지 못 했다. 그리고 명나라는 황제가 된 [[주상순]]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더 빨리 몰락한다. 이 와중에 일가족을 이끌고 탈출해 조선에 귀순하여 정착한다. * [[미식가]]였다. 연꽃국을 좋아했고 조개구이, 새우튀김, 상어 지느러미 요리, 제비집 요리를 즐겨 먹었다. 닭고기와 돼지고기도 좋아해서 자주 먹었으며 술도 좋아해 60~70여 종을 마셨다. * 사냥과 승마, 무술도 좋아했다. * 그의 집권 기간인 1626년 5월 30일 명나라의 수도 북경 왕공창(王恭廠) 지역에서 이상한 대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희종실록(熹宗實錄), 명나라 조정이 출간한 공식 문서인 천변저초(天變邸抄), 명나라 사람 황욱(黃煜)이 남긴 책인 벽혈록(碧血錄),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주이준(朱彝尊) ^^(1629년 ~ 1709년)^^이 쓴 책인 일하구문(日下舊聞) 등에 모두 언급되었는데 그 내용이 마치 [[외계인]]과 [[UFO]]가 나타난 것과도 흡사하다. [[http://todayhumor.com/?mystery_8978|#]] * 조선에서는 명나라 멸망에 대해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이라고 평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되지만, 만력(萬曆)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으로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천계제 저거 일부러 [[암군]] 짓만 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저능아 같은 못난 놈인데 그런 놈 붙들고 욕하면 뭐하고 원망해 봐야 뭐하겠냐.'''"라는 의미다.] 다만 이 황제 제위 말년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명 조정에서는 광해군 정권을 명에 협조적인 정권으로 보았고 그에 관한 잘못된 풍문이 도는 바람에 반정 세력들이 책봉받는 데 애를 먹었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 동안 책봉 고명을 받지 못 했다. * 반면 [[청나라]]에서는 [[만력제]]와 동급의 [[암군]]으로 여겼는데, 이 황제 대에 명나라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환관 [[위충현]]이 구천구백세를 떠들며 나라를 말아먹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태창제가 제위 얼마 되지도 않아 죽었고 환관의 전횡은 결국 황제가 제대로 결단하면 막을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책임질 사람이 만력제 빼면 천계제 밖에 없기도 했고.[* "지난해에 황제가 칙지를 내리기를 짐이 탕산(湯山)에 행차하여 명나라의 여러 능(陵)에 제사를 지냈는데, 여러 능들이 많이 무너진 것을 보고 개탄하였다. 명나라 중엽 이후로 국사가 폐이(廢弛)하였고, 말년에는 유구(流寇)가 소요를 일으켜도 지킬 사람이 없어서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 국가가 하나로 통일이 된 지 이미 1백여 년이 되었으니, 전 왕조의 능침(陵寢)을 수리해야 하겠다. 명나라 세종(世宗)에 대해서는 일찍이 윤전가(尹銓嘉)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나 다만 명나라가 숭정(崇禎) 때 망하지 않고 만력(萬曆)과 천계(天啓) 때에 망하였기 때문에 역대의 제왕 사당 안에는 그 위패(位牌)를 없앴지만 능침에는 그냥 제사를 지내었다. 세종이 비록 재초(齋醮)에 뜻이 빠지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만력과 천계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그 능침에도 일체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공명 정대하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리하는 등의 공력(工力)에 있어서는 비록 백만의 내탕고 금을 풀게 되더라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이부 상서 유용(劉), 예부 상서 덕보(德保), 공부 상서 김간(金簡), 시랑 조문식(曺文植) 덕성(德成)을 파견하여 완공하게 하라. 지방관이 마음을 다하여 수호하여 땔나무를 하거나 짐승을 기르지 못하게 엄히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고적(考績)하는 법은, 3년에 1고(考)하게 되었는데, 그 조목은 여섯이었습니다. 첫째는 신중히 하지 않은 것, 둘째는 무능한 사람은 모두 파직할 것, 셋째는 재력(材力)이 미치지 못한 것, 넷째는 경망한 사람은 모두 등급을 내릴 것, 다섯째는 병이 난 것, 여섯째는 늙은 사람을 모두 벼슬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적할 때 이름을 점검하며 예를 행하면 연로한 사람은 흔히 수염에 물들인다고 합니다."][* 근데 천계제는 재위기간도 짧았기에 만력제와 동급의 암군이라는 건 천계제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이다.] * 뜻밖에도 먼 훗날 [[한반도]]에 생긴 [[전남대학교]]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전남대에서 꽤 유명한 포토스팟인 전남대 홍매가 그 주인공. 1621년에 월봉 고부천 선생이 명나라에 특사로 방문해 천계제를 알현했는데 그때 천계제가 그에게 홍매 한그루를 하사했고 그는 이것을 자신의 고향인 창평에 심고 대명매라 이름 붙였는데 그 대명매의 후계목이 바로 전남대 홍매인 것.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의 황자)] ---- [include(틀:명사)] [[분류:명나라/황제]][[분류:1605년 출생]][[분류:1627년 사망]][[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