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한서)] 蔡琰 177년?~? [[파일:external/vignette1.wikia.nocookie.net/Cai_Wenji_Illustration.png|width=250]] [목차] == 개요 == [[후한]] 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여성이며 [[자(이름)|자]]는 소희(昭姬)인데[* 출처: 후한서 동사처전 주석 열녀후전.] 보통 '채문희'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원래 자의 昭가 [[사마소]]의 이름과 같아서 후대에 [[피휘]]를 위해 문희(文姬)로 고친 것이다. 연주 진류군 어현 사람으로 [[채옹]]의 딸, [[위중도]], [[유표(흉노)|유표]], [[동사(후한)|동사]]의 아내, [[채정희]]의 자매, [[양호(삼국지)|양호]], [[양휘유]]의 이모다. == [[삼국지(정사)|정사]] == 채염은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대학자 채옹의 딸이었고 아버지 유전자 덕분인지 똑똑하고, 변설에 뛰어났다. 채염은 음악에도 정통하여 거문고의 끊어진 현을 맞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채옹이 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다가 현이 하나 끊어졌는데 딸 채염이 두번째 현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채옹은 우연히 맞춘 것이라며 다른 줄을 끊고 채염에게 끊어진 줄이 어디인지 물었고, 채염은 4현이라고 답하며 이번에도 맞추었다.[* 후한서 동사처전 주석 유동전.] 당시 채염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다.[* 태평어람 인용 채염별전.] 채염은 하동군의 [[위중도]]에게 시집갔다. 채염이 위중도와 결혼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세였다.[* 채백개녀부(蔡伯喈女賦).] 위중도가 요절하자 둘 사이에 자식도 없어서 채염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낙양에서 살았다. 192년, 아버지 채옹이 동탁의 죽음에 탄식했다는 이유만으로 [[왕윤]]에게 죽임을 당했다.[* 동탁전 주석 후한서.] [[삼보의 난]]을 겪으며 이각, 곽사가 싸우는 동안 아버지 채옹의 저술도 많이 사라졌다. 195년, [[흉노]]가 동탁의 잔당들을 격퇴하기 위해 낙양에 쳐들어왔고 채염은 흉노의 병사에게 납치되어 남흉노 좌현왕(左賢王) [[유표(흉노)|유표]]에게 바쳐졌다. 채염은 유표의 첩으로 12년간 지내면서 아이 둘을 낳았다. [[조조]]는 채옹과 친분이 있었고 채옹의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흉노족에 사신을 보내 거액을 지불하고 교섭하여 채염을 도로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채염의 아이들은 결국 데려오지 못하고 그녀 혼자 돌아오게 되었다.[* 채염의 아이들은 흉노 입장에서 보면 흉노의 왕족들이라 채염만 보낸 것이다.] >이 몸은 자유로이 풀려났으나 다시 자식을 버려야하는 처지가 되었구나. (중략) 차마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구나. 아이가 앞에 와 내 목을 껴안으며 물었다. >"어머니 어찌 가시려 하세요? 사람들 말이 어머니가 떠나야만 한다 하던데 다시 돌아오실 날이 있을까요? 어머니는 항상 어질기가 그지 없으셨는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저희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나요? 우리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마음에 두고 다시 생각해주지 않나요?" >이를 보니 오장육부가 내려앉는 듯하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미칠 것 같으니 큰 소리로 울며 손을 매만져보니 떠나려는 마음이 또 다시 망설여진다. >---- >비분시 채염은 둔전도위 [[동사(후한)|동사]]와 재혼했다. 어느 날, 채염의 새 남편 동사가 법을 어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채염은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조조]]에게 달려갔다. 조조는 당시 몰려온 손님들에게 채옹의 딸이라며 채염을 보였고, 채염이 맨발에 머리를 풀고 땅에 조아려 명석하고 비통하게 말하니 거기 사람들이 모두 숙연할 정도였다. 조조가 채염에게 딱하지만 이미 사형 집행의 문서를 보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으나 채염이 조조의 기병을 언급하니 조조가 감동하여 사자를 달려보내 동사의 사형 집행을 멈추게 했다. 당시 새벽이라 추워서 조조가 채염에게 두건과 신발을 선물하며 채옹의 저술에 대해 물었다. 채염은 아버지에게 약 4000권을 받았으나 모두 잃었고 약 400편을 암송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조는 채염에게 10명의 관인을 보내 채옹의 저술을 복원토록 했지만 채염은 남녀유별을 들어 관인들을 거절하고 종이와 붓만 받아 혼자서 채옹의 저술 약 400편을 복원해 조조에게 보냈고 400여편 중 오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후한서 동사처전.] 이후 채염은 흉노로 납치되었던 고난을 회상하며 시 두 편을 지었다. 시 하나는 비분시, 또 하나는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으로 두 시 모두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단, 호가십팔박은 명작이긴 하나 채염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또한 채옹의 필법은 최원(崔瑗)과 채염에게 전해졌고, 채염은 채옹의 필법을 [[종요]]에게 전했다. 종요의 필법은 [[위부인]]에게 전해졌고 위부인이 제자인 [[왕희지]]에게 전해 후대의 많은 능서가에게 퍼졌다.[* 법서요록(法書要錄) 인용 전수필법인명(傳授筆法人名).] 과거 채옹은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8자의 은어를 적어놓았었는데, 어느 날, 조조와 양수가 함께 조아비 옆을 지나게 되면서 채옹이 적어놓은 은어를 보았다. 양수는 채옹의 글이 의미하는 뜻을 바로 깨달았으나 조조는 30리를 더 가서야 깨달았다.[* 세설신어 첩오편.]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한중으로 출정하는 도중에 채염의 집에 방문해서 조아비의 탁본을 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세설신어에서는 이 일화 중 채염이 나오지 않고 조조와 양수 두 사람이 조아비를 직접 본 것으로 나온다. 사실 탁본은 당나라 이후에 발명된 것이라 삼국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물건이다. 한편 채염의 자매 [[채정희]]는 [[양신(조위)|양신]]과 결혼해서 양호, 양휘유를 낳아서 채염은 양호와 양휘유의 이모가 되었다. 채염의 [[휘]]에 쓰이는 글자 염(琰)이 나중에 [[황제]]가 되는 [[사마염]]과 겹쳤기 때문에 [[피휘]]하여 휘 대신 [[자(이름)|자]]로 주로 불렸다. 채염의 본래 [[자(이름)|자]]는 소희(昭姬)였지만 이건 추존황제 [[사마소]]와 겹쳐서 이것도 [[피휘]]를 하고보니 문희(文姬)가 되었고 후세에는 자가 문희(文姬)라고 알려졌다. 단, 채염의 자에 쓰이는 글자는 사마소의 이름 글자와 분명히 겹치지만, 채염의 이름 글자는 옥 염(琰)을 쓰고 사마염의 이름 글자는 불꽃 염(炎)을 쓴다. 채염처럼 이름에 옥 염(琰)을 쓰는 [[최염]]은 후세에도 최염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사마염 때문에 피휘를 했을 가능성은 낮다. == [[삼국지연의|연의]] == 조조가 [[유비]]와 한중에서 싸우기 위해 친정하는 도중 채염의 집에 방문해서 조아비에 적힌 채옹의 글귀를 보게되었다. 조조와 [[양수(삼국지)|양수]]가 채옹의 글귀를 해석하면서 양수는 또 조조 앞에서 잘난체를 하게되어 죽음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되어버렸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채염/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조위의 인물]][[분류:중국사/여성]][[분류:진류 채씨]][[분류:177년 출생]][[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