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창의궁'''}}}}}}'''[br]'''{{{#ffd700 '''彰義宮'''}}}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의궁 터.png|width=100%]]}}} || ||<-3> {{{#gold '''위성사진으로 본 창의궁 터 현재 자리'''}}}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의궁터,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한성부]] 북부 순화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일대[* 구 [[지번주소]]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일대.])}}} || ||<-2> {{{#ffd700 '''설립시기'''}}} || 1712년 || ||<-2> {{{#ffd700 '''해체시기'''}}} || 1907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35 1 창의궁 배치도.jpg|width=100%]]}}} || || {{{#gold '''창의궁 배치도'''}}}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궁|별궁]]. [[영조]]가 연잉군이던 시절 살던 잠저(潛邸)로서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태어난 [[집]]이며, 말년의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 곳은 [[효종(조선)|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는데 [[숙종(조선)|숙종]]이 매입해 4남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준 것이다. 숙종은 건물 한 채의 이름을 양성헌(養性軒)이라 짓고 [[시]]까지 지어 [[현판]]으로 걸어 아들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높은 [[누각]] 넓기도 한 것이, 임금수레 전에도 왔다네. [[경희궁 광명전|광명전]][* [[경희궁]]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한 전각이다.] 바로 저긴 것이, 때때로 올라가 마음 위로 하리라.] 1721년([[경종(조선)|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살면서 기존의 연잉군 사저는 동궁 소속 궁가가 되었고, 이름도 근처의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이란 속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에서 딴 '창의궁(彰義宮)'으로 바뀌었다. 영조는 즉위 후 창의궁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란 [[현판]]을 걸었다. 《건구공궁 소지(小識)》에 따르면 건구(乾九)는 《[[주역]]》에서 온 말로, 승천하지 않고 숨어있는 [[용]], 잠룡을 뜻한다. 즉, [[왕]]이 되기 전의 자신을 투영해 쓴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건구고궁.jpg|width=100%]]}}} || || {{{#gold ''''건구고궁(乾九古宮)' 현판[* [[https://www.gogung.go.kr/searchView.do?pageIndex=1&cultureSeq=00019464SF&searchRelicDiv4=&searchGubun=ALL1&searchText=%EA%B1%B4%EA%B5%AC%EA%B3%A0%EA%B6%81|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영조]]로 즉위 후, [[한성부]] 좌윤[* 현재의 [[서울특별시 부시장]] 격.] 홍석보의 주청에 따라 왕의 잠저 당시 [[호적]]을 따로 떼어다 이 곳에 보관했다. 그리고 장보각(藏譜閣)을 짓고 [[영조]]의 [[어진|초상화]] 2본과 어필 및 서찰 등을 모시기도 했다. 옛 집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한 영조는 어머니 사당인 [[칠궁|육상궁]]을 참배하고 나서 종종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여기서 하룻밤 자고 온 적이 많았고, 1754년(영조 30년)에는 이 곳에 일찍 죽은 아들 [[효장세자]]와 손자 [[의소세손]]의 [[사당]]을 두기도 했다. [[정조(조선)|정조]]도 [[사도세자]]의 [[초상화]]를 이곳에 수용하면서 주기적으로 참배하였고 가끔 머물면서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순조]] 때는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사당도 두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존재하다가 1908년([[융희]] 2년) [[일본 제국|일제]]에게 헐려 사라졌다. 그리고 창의궁 자리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세워졌다. [[8.15 광복]]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뒤 재분할되어 주택가가 들어서있다. == 기타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E001733962_STD.jpg|width=100%]]}}} || || {{{#gold '''창의궁 터 근처의 백송'''}}} || 창의궁 터 부근 통의동에 백송이 있었다. [[높이]]는 16m였고 한 때 [[한국]]에서 제일 오래 된 백송이었으며 나이는 600여 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분석한 결과 1690년 경에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건 설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거의 안자랐다고 한다. 1990년 7월 17일에 [[집중호우]]를 동반한 강한 [[바람]]에 쓰러졌다. [[청와대]]와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특별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라도 일단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고 [[경찰관]]을 3교대 근무로 배치하여 보호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나는 듯 했으나 [[나무]]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등 훼손하여 회생불가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결국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 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가 현재는 밑동만 남아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의궁 비석.jpg|width=100%]]}}} || || {{{#gold '''창의궁 터 알림표지석'''}}} || 창의궁 근처 적선방에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그의 [[남편]] 월성위 김한신이 살았던 월성위궁이 있었다. 월성위궁이 곧 창의궁이라는 설도 있으나 [[왕실]] [[사당]]으로 쭉 기능했다는 창의궁 관련 [[기록]]을 보아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한신 일가에서는 창의궁 = 월성위궁이라 주장하고 있어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른다고 봐야 한다.[* 아닐 가능성이 높다. 창의궁은 순화방이었고, 월성위궁은 적선방이다. 서로 행정구역이 달랐다. ] 이 김한신이 바로 [[김정희|추사 김정희]]의 [[증조|증조할아버지]]이다.[* 단, 친증조부손 관계가 아닌 [[양자(가족)|양자]] 관계로 이어진 것.] 그래서 [[책]]이나 답사 등에서 통의동 - 창의궁을 설명할 때 십중팔구 김정희가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언급된다. * 일설에 따르면 1860년대 후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경복궁 흥복전|흥복전]]을 세웠다고 한다. * 창의궁 바로 건넛골목인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70번지에서 조선시대 왕비의 도장이 발견되었다.[[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37930|#]] * 더 많은 다른 자료는 [[http://blog.daum.net/aroma-may/11807409|이 곳 참조.]]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