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목차] [clearfix] == 개요 == {{{+1 昌城宮}}} [[조선시대]]의 궁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부마]] 황인점이 살았던 곳이다. 정식 이름은 '창성위궁(昌城尉宮)'. '창성(昌城)'은 황인점의 본관지인 [[창원시|창원(昌原)]]에서 따온 이름이다.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종로구)|효자로]] 57 일대에 있었다. 규모는 대략 4,300㎡(1,300평)이다. == 역사 == ===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 === [[화유옹주]]는 [[영조]]가 [[후궁]] 귀인 조씨 사이에서 47세에 얻은 10째 딸(...)로 다른 딸들보다도 훨씬 귀하고 예쁘게 여겼다. 14살 되던 해에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 황인점과 혼인했고 황인점은 '창성위(昌城尉)'로 봉해졌다. 영조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순화방의 [[궁]]을 하사하여 화유옹주 부부가 살게했다. 이 궁은 ‘창성위궁(昌城尉宮)’이라 불렸고 약칭인 창성궁으로 널리 알려진다. 조선의 [[부마]]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에, 부마 황인점은 [[영조]] 때까지 할 일 없이 지내다가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화유옹주가 죽는다. 이후 [[정조(조선)|정조]]는 창성위 황인점을 매년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중국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신단.]로 [[청나라]]에 보낸다. 당시 조선은 책력을 구하기 위해 매년 말이면 선물을 듬뿍 싣고 동지사를 보내 책력을 얻어 와야 했다. 그러면서 황인점은 여러 차례 청나라를 드나들었는데, 그 때문에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1783년(정조 7년) 황인점이 동지 겸 사은정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 베드로|이승훈]]이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를 몰랐다 하여 정사(正使)로서 책임을 물은 것이다. [* 이 때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돌아오면서''' 천주교 교리 서적 등을 가져왔다. [[세례명]]은 [[베드로]].] 이후 황인점은 삭탈관직 되고 그 충격 때문인지 1년 뒤 1802년(순조 2년)에 사망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40204003808_0.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692-2-17418.jpg|width=100%]]}}} || || {{{#gold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의 합장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유물들.[br]조선 후기 사대부 생활 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황인점이 청나라에서 들인 물품들도 있다.'''}}} || {{{#gold '''황인점의 파직에 영향을 준 조선인 최초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gold 이승훈}}}]]'''}}} || === 이후 === 이후로도 황인점의 후손이 살다가 [[왕실]] 소유로 넘어갔다. 특정한 주인이 없는 궁은 [[내명부]]의 소유가 되었기에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에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창성궁을 소유했다.[* [[명성황후]]의 사망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죽을 때까지 정실부인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후궁]]들 중 가장 으뜸 서열이던 순헌황귀비가 사실상 [[황후]]에 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일제]]는 [[황실]]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했다. 저 당시 대한제국의 내정을 [[통감부]]가 담당했기 때문에 국유화는 사실상 일제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 [[순헌황귀비 엄씨]]의 양동생 엄준원이 정동에 있는 달성위궁[*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 [[정신옹주]]의 남편 서경주의 집]에서 [[사립학교]] 건립을 준비했다. 이에 순헌황귀비는 엄준원에게 자신의 소유인 창성궁을 하사하여[* 그러나 창성궁'''만'''으로는 규모가 작아, 주변의 주택을 구입 ·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했다.], 이 곳에서 1906년(광무 10년) 여메례를 학감으로 하여 [[진명여학교]]가 개교되었다. 순헌황귀비와 그녀의 친정 [[영월 엄씨|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 외에 [[숙명여학교]](1906)와 [[양정학교]](1905)도 설립했다. [[진명여학교]] 설립에 들었던 모든 비용은 [[순헌황귀비]]의 경선궁과 [[영친왕]]궁 소속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 · 전답 · 임야 등을 제공하여 마련했다. 불과 1년 후인 1907년([[융희]] 원년)에 [[일본 제국|일제]]가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으니, 이때 순헌황귀비의 용단이 없었다면 창성궁은 일제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2 14-17-56.jpg|width=100%]]}}} || || {{{#gold '''창성궁에 위치했던 진명여학교 구 교사(校舍)'''}}} || [[진명여학교]]는 이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진명여자[[보통학교]]로 나뉘었다. 진명여자보통학교는 폐교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51년에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진명여자중학교와 3년제 [[진명여자고등학교]]로 나뉘었다. 그러다 진명여중은 1987년 폐교되고, [[진명여고]]만이 1989년 8월 [[양천구]] [[목동(서울)|목동]]으로 이전해 오늘까지 내려온다. 옛 [[진명여학교]] 자리에는 ‘진명여중고교 터’라는 표지석(자하문로16길 21 맞은편)이 2019년 11월에 세워졌지만, ‘창성궁의 옛터’임을 나타내는 설명은 없어 창성궁이 어디였는지는 찾기 어렵다. 오직 ‘창성동’이라는 동명과 ‘진명길’이라는 길 이름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도로명 변경으로 진명길은 ‘자하문로16길’이 되었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