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홍문관'''}}}[br]{{{-1 昌德宮 弘文館}}}}}}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홍문관,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시기 미상[br][[2004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홍문관.png|width=100%]]}}} || || {{{#gold ''' 홍문관[* [[https://twitter.com/chlove_u/status/793674855308681216/photo/3|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L3ZTZr49M4)] }}}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s-5.2.2|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홍문관 [[청사]]이다. 홍문관은 궁중의 문서 처리와 관리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기관이다. [[사헌부]] ·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릴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홍문관]] 문서 참조. == 현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홍문관 현판.png|width=100%]]}}} || || {{{#gold ''' 왼쪽은 1699년에 만든 홍문관 현판,[* [[http://www.gogung.go.kr/imgView.do?title=%25EC%2598%25A5%25EB%258B%25B9&cultureSeq=107LJE&imgSeq=3|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오른쪽은 현재 홍문관 현판이다.[*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aj2um4L2SD6rpinOTFdaZrjD1vOzdMPLGXLtaKhpRjI66DYh432qelGUP0z1TKWw.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29255§ionId=ocp&pageIndex=12&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2|사진 출처 - 문화재청.]]] '''}}} || ‘옥당(玉堂)’으로 써두었다.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뜻은 '옥같은 집', '옥같이 귀한 인재들이 일하는 집'이다.[* 후술하겠지만, [[세종(조선)|세종]] 때 자문, 학술기관이었던 [[집현전]]을 새로 개편한 게 홍문관이다. 그래서 역으로 집현전을 옥당을 직역한 'Jade Hall'로 번역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세종대왕(문명 5)|문명]]〉이 대표적인 예[[http://tulip319.blog.me/30115391503|#]].] 조선시대 옥당에 걸었던 [[현판]]이 2개 남아있다. 하나는 [[임진|임진년]][* 어느 임진년인지는 모른다.] 9월에 이원영(李元英)이 [[전서|전서체]]로 쓴 것으로 세로로 긴 모습이고[[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aj2um4L2SD6rpinOTFdaZrjD1vOzdMPLGXLtaKhpRjI66DYh432qelGUP0z1TKWw.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29255§ionId=ocp&pageIndex=12&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2|#]], 다른 하나는 1699년([[숙종(조선)|숙종]] 25년) [[설날|새해 첫날]]에 홍문관 응교[* 應敎. 홍문관과 예문관에 있던 정4품직.]였던 응자 김진규(應紫 金鎭圭. 1658 ~ 1716)가 쓴 것으로 가로로 긴 형태이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83XXYM107LJE|#]] 이 현판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현재 현판은 2000년대에 [[복원]]하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서예|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 [[경복궁 흥례문]]과 [[경복궁 유화문|유화문]] 및 [[창덕궁 진선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홍문관.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홍문관 '''}}} || 1463년([[세조(조선)|세조]] 9년)에 세조가 [[집현전]]을 대신할 문서 보관 기관으로 처음 만들었고, [[성종(조선)|성종]]이 자문 및 학술 연구 기관으로 재편했다. 그때 홍문관 청사도 지은 듯 하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광해군]] 때 재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일본 제국|일제]]는 [[홍문관]] 기구를 폐지했고[* 이후 홍문관 업무는 [[규장각]]에서 담당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건물마저 헐었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에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형 홍문관.png|width=100%]]}}} || || {{{#gold ''' 《동궐도형》의 홍문관. 초록색 원 안이다. '''}}}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벽돌|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기둥]]과 [[주춧돌]]은 사각이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4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홍문관 내부 구조.png|width=100%]]}}} || || {{{#gold ''' 홍문관 내부 구조 '''}}}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실내 구조는 윗 그림 참조. * 정면 [[온돌|온돌방]] 외면에는 띠살[[문]]을 달았고 하단부에는 머름을 달았다. 측면 외면은 툇간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로 [[벽]]을 둔 형태이다. 뒷면 외면은 가운데 3칸의 경우, 가운데에 문선을 두고 그 안에 초록색 [[나무]]판으로 만든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하고 하단에 머름을 설치한 모습이다. 뒷면 양 가장자리 칸은 중인방 위에 문선을 두고 그 안에 [[창문]]을 설치했으며 나머지는 [[벽]]을 둔 형태이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집현전, version=99, paragraph=1, title2=홍문관, version2=41)]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