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집상전'''}}}[br]{{{-1 昌德宮 集祥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대조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667년]] {{{-1 (창건)}}}[br][[1833년]] {{{-1 (소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에서 묘사한 집상전.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서 묘사한 집상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대전]]이자 중궁전이던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의 동북쪽에 있었다. 현재는 없다. == 역사 == 1667년([[현종(조선)|현종]] 8년) 현종이 [[태후|대비]]인 어머니 [[인선왕후|인선왕후 장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811011_003|#]] 인선왕후가 머물던 [[창경궁 통명전]]에 여러 변괴가 일어나자 현종은 대비전을 새로 지어 [[어머니]]를 모시려 했으나 이미 [[효종(조선)|효종]] 시절 대비전을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반대했다. 결국 대조전 뒤뜰의 옛 집상당(集祥堂)을 수리한 뒤 ‘전(殿)’으로 격상시켜 [[태후|대비]]를 모신 것이 집상전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나 규모가 좁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희궁|경덕궁]][* 지금의 [[경희궁]].]의 집희전(集禧殿)을 옮겨 새로 세운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집상전이다. 이후 [[숙종(조선)|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 [[명성황후|명성황후 민씨]]가 아니다. [[한자]]도 [[명성왕후]]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으로 다르다.]도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영조]] 시기엔 [[선조(조선)|선조]]의 허리띠[* 옥대자(玉帶子)라고 한다.]를 보관하기도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303014_001|#]] [[1833년]]([[순조]] 33년) [[창덕궁]] [[내전]] [[화재]] 때 불탔다. 이후 복구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헌종(조선)|헌종]] 연간에 발간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지금은 없는 [[전각]]’으로 소개한다.] 사실 [[18세기]] 들어서는 [[대비]]들도 이 곳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18세기]]부터 1833년까지 [[조선/왕사|조선 왕실]]의 [[대비]]는 총 4명이었다. [[인원왕후]]는 [[창덕궁 경복전]], [[선의왕후 어씨|선의왕후]]는 [[창경궁 저승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는 [[창덕궁 수정전]], [[효의왕후]]는 [[창경궁 자경전]]에서 주로 거주했다.], [[물건|물품]]들을 보관하는 정도로만 쓰였기에 딱히 다시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 구조 == *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온돌방]]을 놓았다. 방은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고 대청과 방을 툇간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앞 면에 [[마루|쪽마루]]를 덧달고 난간을 둘러 실내에선 물론 실외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할 수 있게 했으며, 덧댄 마루는 [[암석|돌]] [[기둥]]이 받치고 있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 《[[동궐도]]》를 보면 가운데 [[대청]] 앞에 있는 월대를 2단으로 설치했고 [[지붕]]은 솟을지붕 형식으로 만들어 건물의 특색을 뽐내었다. 이를 보아 전체적으로 대조전과 많이 비슷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조전과 연결시켜 지은 거라서 대비전이라 해도 대조전과 구역이 따로 나뉘진 않았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대조전, version=93, paragraph=5.7.1)] [[분류:창덕궁]] [[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