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중문)]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진선문'''}}}[br]{{{-1 昌德宮 進善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진선문,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405년]] {{{-1 (창건)}}}[br][[1608년]] {{{-1 (중건)}}} [br] [[1999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진선문.jpg|width=100%]]}}} || || {{{#gold '''진선문[* [[http://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2&file_name=img_changdeok_story_bg_04_00.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중문]]이다. [[정문]]인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을 지나 [[창덕궁 금천교|금천교]]를 건너면 있다. == 이름 == '진선(進善)' 뜻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한 말(善)을 아뢰다(進)' 이고 다른 하나는 '훌륭한 사람(善)을 추천한다(進)'이다. 즉, '훌륭한 인재들을 모으고, 이들이 임금에게 선한 말을 아뢰어 좋은 정치를 하기 바란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eyXoQALO58s4WcWueQu0YAwkL4TJzKgyCO6qufkUau1a04pbJdafEjhsaqtgMXw8.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08321§ionId=ocp&pageIndex=12&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2|#]] == 역사 ==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진선문 남쪽에 5칸 짜리 문을 세워 돈화문이라 했다는 기록이나[[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5022_002|#]] 금천교를 짓고 진선문 석교라고 한 것을 보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3018_002|#]] 1411년([[태종(조선)|태종]] 11년) 이전에 지은 듯 하다.[* 금천교는 1411년, 돈화문은 1412년에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했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일어난 몇 차례의 [[창덕궁]] 화재 때도 무난했던 듯 하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융희]] 2년) [[탁지부|탁지부건축사무소]]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시행할 때 [[자동차]]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헐었다. 광복 이후인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99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원래 [[현판]] 글씨는 동래군 정난종(東萊君 鄭蘭宗)이 쓴 것이었다. 현재 글씨는 1999년 [[복원]]할 때 [[서예|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 [[경복궁 흥례문]]과 [[경복궁 유화문|유화문]] 및 [[창덕궁 숙장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 구조 == *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이다. [[초석|주춧돌]]과 [[기둥]]은 둥글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두었다. [[단청]]은 모루단청[*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으로 칠해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정문 마당.png|width=100%]]}}} || || {{{#gold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 마당'''}}} || 진선문을 들어서면 좌측(북쪽)에 [[창덕궁 인정문|인정문]]이, 정면(동쪽)에 [[창덕궁 숙장문|숙장문]]이 있다. 이 [[문]]들은 서로 행각을 통해 붙어있으며 잇는 행각이 [[사다리꼴]] 모양을 만들어 마당을 이룬다. 이 마당도 [[창덕궁 인정전|인정전]] 마당처럼 [[국가]] [[행사]]나 [[정치]]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주로 무게 있고 좀 더 근엄한 예제(禮制)를 열었다면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의 마당에서는 좀 더 [[일상]]에 밀착한 [[국사]]를 펼쳤다. 대표적으로 [[임금]]이 [[죄인]]을 심문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많이 활용한 예가 있다. 물론 엄숙한 행사를 아예 거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금의 즉위식을 주로 이 마당에서 열었다. * 행각엔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등 [[궁]]을 지키는 관청과 전설사(典設司), 상서원(尙瑞院) 등 [[왕실]]과 [[국가]] [[행사]]와 관련 된 관청들 및 부속실들이 있었다. 이 역시 순종 이어 때 사라졌고 1999년에 복원했는데 [[조선시대]]와는 달리 내부를 복원하진 못하고 비었다. 단, 내병조는 내부도 [[복원]]하여 현재 [[창덕궁]] 관리소에서 사무실로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궁을 지키는 건 똑같다.-- == 여담 == * 그 유명한 [[신문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백성이 두드리면 [[왕]]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한 것인데,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 안으로 들어와서''' 쳐야하는 문제 때문에(...) 잘 쓰이지 않다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 이후 1771년([[영조]] 47년)에 부활하여 다시 진선문과 [[경희궁]]의 중문인 [[경희궁 건명문|건명문]]에 설치했다. 그러나 이미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신문고는 여전히 별 쓰임새가 없었다. 결국 [[순조]]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복원 문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고적도보 창덕궁 진선문 전경.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고적도보 창덕궁 진선문 정면.jpg|width=100%]]}}} || || {{{#gold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전경'''}}} || {{{#gold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정면'''}}} || [[조선시대]]에 제작한 《[[동궐도]]》 및 《동궐도형》과 [[20세기]] 초 진선문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진선문과 [[창덕궁 금천교|금천교]]는 일직선 상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축이 틀어져있어 딴 자리에 [[복원]]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 자리에 복원했다.''' 진선문 [[복원]] [[공사]] 당시에 다행히 기초 [[유구]]가 상당히 잘 남아있었고 이를 토대로 그 자리 그대로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진선문의 위치는 '''옛날 자리가 맞다.''' 그러면 왜 틀어진 걸까. 바로 '''[[창덕궁 금천교|금천교]]가 [[조선시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덕궁]]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살면서 [[자동차]]가 다녔고 차량 이동의 편의상 금천교를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https://news.v.daum.net/v/20011107102735172?f=o|#]] 금천교 이건과 거의 동시에 진선문을 헐었다가 약 90여 년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해놓고 보니까 서로 축이 틀어진 것이다.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