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조선|[[파일:조선 중기 왕 용보.png|width=25]]]] '''창덕궁 신선원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선원전)]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선원전)] ---- }}} ||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신선원전'''}}}[br]{{{-1 昌德宮 新璿源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신선원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921년]] {{{-1 (덕수궁에서 이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신_선원전.jpg|width=100%]]}}} || || {{{#gold ''' 신선원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3884&ccbaKdcd=13&ccbaAsno=012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선원전 현판.png|width=100%]]}}} || || {{{#gold ''' 신선원전 현판 '''}}} ||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4HsJTeGVj0)]}}}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C0SzhGL6Qlg)]}}}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 || {{{#gold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작한 〈어진의 봉안처 - 선원전〉 영상 '''}}} || [[창덕궁]] 서북쪽에 있는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 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다. 이름 '선원(璿源)'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으로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http://www.rfo.co.kr/seonwon_info.htm|#]][*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이다.][*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 여기서 말하는 왕실 역사의 시작은, [[추존]]받아 엄연히 [[조선시대]] 당시 법적으로 [[임금]]이었던 [[이안사|목조 이안사]]부터를 말한다.]),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건물]]이 '''[[조선시대]] [[창덕궁]]'''에서 쓰인 적은 없다. 현재는 비공개 구역이다. == 역사 == 원래의 창덕궁 선원전 역사에 대해서는 [[창덕궁 선원전#s-2|창덕궁 선원전 문서]] 참조. [[덕수궁]]에 살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본 제국|일제]]는 1920년에 [[덕수궁 선원전]] [[부지]]를 민간에 매각했고, 1921년 3월에 선원전 건물을 [[창덕궁]] 서북쪽 옛 [[창덕궁 대보단|대보단]]과 옛 [[훈련도감]]의 북영 자리로 옮겨 지은 뒤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c_11403022_002|#]] 그래서 '새로운 선원전'이란 뜻의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불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대보단.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대보단 '''}}} || [[창덕궁 대보단|대보단]]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 [[명나라]] [[황제]][* 초대 황제 [[홍무제]]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고려 천자--[[만력제]], 그리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게 제사를 지내려 만든 제단이다. 일제가 대보단을 허물고 굳이 선원전을 옮겨 지은 것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한국 황실을 능멸하고 [[일본]]의 종주권을 보다 확실하게 심는 효과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건립 직후 [[창덕궁 선원전|옛 창덕궁 선원전]]에서 [[태조(조선)|태조]], [[숙종(조선)|숙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순조]], [[효명세자|문조]], [[헌종(조선)|헌종]]의, [[영희전]]에서 [[세조(조선)|세조]], [[정원대원군|원종]]의, 그리고 천한각에서 [[철종(조선)|철종]],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어진]]을 옮겨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나중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초상화도 모셔 총 12점의 어진을 봉안했다. 신선원전에 있던 어진은 [[6.25 전쟁]] 때 화를 피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안타깝게도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그 중에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95|#]] == 구조 == * 장대석을 4단으로 쌓은 [[기단]] 앞에 [[태극|삼태극]] 무늬의 소맷돌을 둔 3칸 반짜리 [[계단]]을 앞면에 3세트, 소맷돌 없는 3칸 반 짜리 계단을 양 측면에 하나씩 놓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기단 앞엔 박석을 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정면 14칸, 측면 4칸, 무려 총 56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5개의 [[잡상]]을 놓았다. * 바깥 면의 경우, 동, 서 양 측면과 남쪽의 [[마루|툇간]] 부분은 전부 창방 위에 교창을 두고 띠살문으로 마감했다. 남면은 툇간을 제외하고 전부 툇마루를 밖으로 통하게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으며 툇마루 안쪽의 문 역시 띠살 무늬의 사분합문으로 되어있다. 또한 각 분합문 [[기둥]] 사이의 하단부에 흰 칠을 하고 파란 선을 그었다. 북면은 [[기단]] 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벽돌|전돌]]로 마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선원전 태극기 환풍구.png|width=100%]]}}} || || {{{#gold ''' 신선원전 태극기 환풍구 '''}}} || 정면(남면)의 주춧돌과 댓돌 사이에 있는 환풍구의 모양이 [[태극기]] 형태이다. 아마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처음 지은 [[경운궁 선원전]] 건물이어서인 듯 하다. 다만 가운데 원의 무늬가 태극 대신 '[[卍]]' 자인데 이유는 알 수 없다. 뒷면(북면)의 벽체 하단부에도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환풍구가 있는데 그건 평범한(?) 사각형 형태이다. * 내부는, 정면 기준 앞쪽 2칸은 전부 한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양 측면의 [[벽]]은 막혀있으며 흰 [[벽지]]를 발랐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몄다. 정면 기준 양 끝 가장자리 칸을 제외하고 가운데 12칸에 [[어진]]을 모시는 감실을 마련했다. * 감실은 마치 실제 [[왕]]을 모시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감실 테두리마다 낙양각과 그 위에 [[사각형]]의 [[틀]]을 놓고 아름다운 무늬를 투각[* 조각 기법의 중 하나로 재료의 면을 도려내거나 깎아서 원하는 무늬를 나타내는 것.]하여 장식했으며 감실 내부엔 당가[* 唐家. 옥좌 위에 다는 집의 모형.]를 설치하고 동, 서, 북 3면에 일월오악도를 두른 뒤 가운데에 '[[卍]]' 자가 여러 개 새겨진 [[용상]]을 놓고 그 앞에 답장[* 踏掌. --[[답장|이거]] 말고-- 발을 올려 둘 수 있는 가구.]을 두었다. 당가 안쪽 [[천장]]에는 두 마리의 [[용]] [[조각]]을 걸어놓았고 천장에 붙인 [[고리]]에 [[어진]]을 걸게 했다. 그리고 앞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감실 뒤쪽으로는 [[모란]] [[그림]]을 부착시켰다.[br][br]각 감실의 [[기둥]] 하단부엔 정면 툇마루의 사분합문 기둥처럼 흰 칠을 하고 파란 선을 그었으며 창방과 상인방 사이는 [[벽]]으로 만들어 흰 [[벽지]]를 발랐다. == 부속 건물 == === 진설청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진설청'''}}}[br]{{{-1 昌德宮 陳設廳}}}}}}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북진설청,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921년]] {{{-1 (창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선원전 진실청.png|width=100%]]}}} || || {{{#gold ''' 진실 '''}}} || [clearfix] ---- 진설청은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음식]], [[차|다]][[한과|과]] 등을 준비하고 차려놓는 작은 [[건물]]이다. 신선원전 구역의 진설청은 본채를 기준으로 동, 서, 서북쪽에 각각 1채 씩 총 3채가 있었다. 동, 서 진설청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으로 정면은 전부 문으로 되어있고 뒷면은 사고석과 [[벽돌]]로 하단을 쌓고 그 위에 [[벽]]을 두었다. 측면은, [[문]]을 둔 넓은 칸과 뒷면과 같은 모양의 좁은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서북 진설청 역시 맞배 지붕에 민도리 양식인 것은 동, 서 진설청과 같으나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으로 남쪽 측면이 전부 [[문]], 북쪽 측면은 전부 [[벽]]이다. 뒷면의 경우 남쪽 방향 1칸에 문이 달려있고 그 북쪽으로 2칸은, 문선 가운데에 [[창문]]을 설치했으며 나머지 부분을 벽으로 마감했다. === 재실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재실'''}}}[br]{{{-1 昌德宮 齋室}}}}}}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재실,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921년]] {{{-1 (창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선원전 재실.png|width=100%]]}}} || || {{{#gold ''' 재실 '''}}} || [clearfix] ---- [[제사]]를 준비하고 제관(祭官)이 머무르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를 두지 않고 소로 위에 바로 창방을 두었다. 합각은 [[벽돌]]로 마감했으며 [[용두]]와 취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 칸은 하단에 [[암석|돌]] [[기둥]]이 있는 [[누각|누]] [[마루]]로 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2칸은 [[온돌|온돌방]], 2칸은 [[대청]],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문은 대청 앞, 뒷면의 툇마루 안쪽에 두었다. 바깥 면의 [[창문]]과 [[문]]은 전부 정(井)자 살이며 오른쪽 측면 가운데 칸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전부 [[벽]]으로 마감했다. === 수복방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수복방'''}}}[br]{{{-1 昌德宮 守僕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수복방,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921년]] {{{-1 (창건)}}} || [clearfix] ---- [[제사]]를 준비하던 하급 관원들이 머물던 곳이다. 맞배지붕 형식으로 평방과 [[공포]]없이 창방과 서까래가 바로 만나는 구조이다. 남북축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온돌|온돌방]] 1칸, [[대청]] 2칸, 온돌방 2칸이 있으며 이후로는 하단에 판문, 위에 [[창문]]과 [[벽]]을 둔 모양의 칸 하나와 온돌방 2칸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 의효전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의효전'''}}}[br]{{{-1 昌德宮 懿孝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의효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868년]] {{{-1 (창건)}}}[br][[1896년]] {{{-1 (덕수궁 이건)}}}[br][[1921년]] {{{-1 (창덕궁 이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donga.com/-19057_0.20271100.jpg|width=100%]]}}} || || {{{#gold ''' 의효전 '''}}} || [clearfix] ---- 신선원전의 동남쪽에 있는 [[건물]]이다. 원래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년) [[경복궁]]에 처음 세워져 혼전으로 쓰이던[*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 조씨(조 대비)]]와[[http://sillok.history.go.kr/id/kza_12704018_002|#]] [[명성황후|명성황후 민씨]]의 혼전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210015_002|#]]] 문경전(文慶殿)이란 전각이었다. 1904년([[광무]] 8년) 당시 [[태자|황태자]]였던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순명효황후 민씨]]의 혼전이 되면서 의효전이 되었고,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 경소전(景昭殿)으로 옮겨 지었다. 보통 혼전이 되면서 생긴 이름은 [[상례]]가 끝나면 사라지고 원래 이름대로 돌아가나 순명효황후는 순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계속 [[위패]]를 의효전에 모시면서 그대로 이름이 굳어졌다.[* [[임금]]의 생전에 [[황후]],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기존에 모시던 곳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죽음|승하]] 후 1920년 경에 일제가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즉, [[경복궁]], [[경운궁]], [[창덕궁]] 3궁이나 거친 수난을 겪은(...) 건물'''.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2년 뒤인 [[1928년]] [[종묘]]에 부묘되면서 [[순명효황후]]의 위패 역시 종묘로 가게 되어 그제서야 의효전의 [[현판]]을 내렸다. 이후 잊히면서 한동안은 이름마저 '의'''로'''전(懿'''老'''殿)'으로 잘못 알려졌다. '효(孝)'를 비슷한 모양의 '로(老)'로 오독한 것. [[2007년]]에 와서야 문헌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실체를 확인했다. 의효전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기단]] 3벌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정면(남면)으로 나름 넓은 월대를 두었는데 기단보다는 조금 낮고 월대 앞에 2칸 반짜리 소맷돌 없는 [[계단]]을 3세트 씩 놓고 좌, 우 양 측면에도 같은 계단을 각각 하나씩 놓았다. 정, 측면 각각 3칸 총 9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올렸다. 창호는 전부 정(井)자 살이며 중방과 교창 없이 [[문]]과 상방이 바로 붙어있다. 내부는 한 칸으로 통해 있다. === 몽답정[*A 원래 창덕궁 영역이 아니었으나 현재 신선원전 권역에 있으므로 편의상 부속 건물로 기재한다.]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몽답정'''}}}[br]{{{-1 昌德宮 夢踏亭}}}}}}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몽답정,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몽답정.png|width=100%]]}}} || || {{{#gold ''' 몽답정 '''}}} || [clearfix] ---- 의효전의 서쪽에 있는 [[정자]]로 이름은 '꿈길(夢)을 밟고(踏) 간다'는 뜻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숙종(조선)|숙종]]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했다하여 몽답정이라 했다.'고 적혀있으나 《[[영조실록]]》에서는 '훈장(訓將) 김성응이 북영에 작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내([[영조]])가 [[창덕궁 대보단|대보단]]에서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이라 내려주었으니 이를 걸게하라'고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후 [[정조(조선)|정조]]도 북영에 거동할 때 이 곳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906020_001|#]]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초익공 양식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쌓고 취두, [[용두]],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앞쪽의 2열은 [[암석|돌]] [[기둥]]을 세운 [[누각|누]] 형태이며 뒷쪽은 경사지에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몽답정(夢踏亭)|#]] [[현판]]은 달려있지 않다. 그리고 건물 앞 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연꽃]]이 있어서 경치가 빼어났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총 12칸으로 동, 서, 남쪽의 툇간에는 [[벽|외벽]]과 [[창문]]을 두지 않았고 난간을 둘렀으며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4칸은 사방에 분합문을 달아 실내 공간으로 만들었다. 실내 공간 중 서북쪽의 방 1칸을 [[온돌]]로 두었고 나머지 3칸은 [[마루]]이며 마루 공간들은 구분 없이 통해 있다. 그래서 북면(뒷면)에서 볼 때 다른 칸은 중방 위에 교창이 있지만, 온돌방의 중방 위는 [[벽]]이다. === 괘궁정[*A 원래 창덕궁 영역이 아니었으나 현재 신선원전 권역에 있으므로 편의상 부속 건물로 기재한다.]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괘궁정'''}}}[br]{{{-1 昌德宮 挂弓亭}}}}}}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괘궁정,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괘궁정.png|width=100%]]}}} || || {{{#gold ''' 괘궁정 '''}}} || [clearfix] ---- 신선원전의 서남쪽, 몽답정의 북쪽에 위치한 [[정자]]이다. 앞서 언급했듯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북영이 있었던 곳으로 [[활]]을 쏘던 [[장소]]였기에 이름이 '활(弓)을 건다(挂)'는 뜻의 괘궁정이 되었다. 건립 연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기단 옆 [[바위]]에 괘궁암(挂弓岩)이란 [[글자]]가 있고 그 옆에 [[기유|기유년]](己酉年)이라고 새겨져있는데 [[순조]] 때 그린 《[[동궐도]]》와 [[헌종(조선)|헌종]] 때 편찬 된 《궁궐지》에 나와있지 않다는 근거로 전문가들은 기유년을 1849년(헌종 15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뒤에 소개할 [[에피소드|일화]]라든지, 1769년([[영조]] 45년) 문인 윤기가 북영을 둘러보고 [[몽답정]]에 올라 쓴 시에 괘궁정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여기서 말하는 기유년은 1729년(영조 5년)으로 여겨진다. 왜 1729년이냐면, 북영의 역사는 1679년([[숙종(조선)|숙종]] 5년)에 시작되었는데[* 정확히는 경기 속오군[* 조선 후기 양인 ·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조직된 혼성군.] 중에서 --쌈 잘할 거 같은--건장한 군사를 뽑아 장초보(壯抄保)를 편성하여 겨울철 3개월 간 북영에서 경비서게 한 것이 시초.] 1679년과 1769년 사이에 기유년은 1729년 딱 한 해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건립 연도로 기유년을 새긴 게 맞다면 1729년에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동궐도》와 《궁궐지》에 나오지 않은 것은 여기가 원래 [[궁궐]]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그리거나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51|#]] [[정조(조선)|정조]] 시기 [[규장각]]에서 근무하던 [[정약용]]이 정조의 명으로 여기서 [[활]]을 쐈는데 실력이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아]] 정조가 이 곳에 정약용을 가두고(...) 열흘 간 계속 활쏘기 연습만 시켰다고 한다. --악덕 상사--[[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uri98th&logNo=220727291843|#]] 1칸 짜리 작은 [[정자]]로 사모지붕으로 되어있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 [[탑]] 모양의 [[장식]] [[기와]]. 주로 6각형, 8각형 형태의 [[건물]](거의 대부분 [[정자]])에 얹는다.]을 얹어 [[장식]]했다. 정면 앞쪽의 1열은 [[암석|돌]] [[기둥]]을 세운 [[누각|누]] 형태이며 뒷쪽은 경사지에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벽]]과 [[창문]], [[문]] 하나 없이 트여있는 구조로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있는데 네 마리의 [[학]]을 아름답게 그려넣었다. 동, 서, 남쪽 면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북쪽 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없다. 현재 [[현판]]은 달려있지 않다. == 여담 == * 앞서 말했듯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 신선원전을 보려면 바로 옆에 있는 [[중앙중학교(서울)|중앙중학교]] [[운동장]] 동쪽(관람객 기준 왼쪽)의 철망 너머로 봐야 한다. 단, 2016년 1월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御眞)과 진전(眞殿)' 특별전을 할 때 이해를 돕기 위해 1월 한 달 간 4회에 걸쳐 잠시나마 개방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유 관람은 아니었고, 회 당 인원이 40명으로 제한 된 단체 관람 형식이었으며 사전 신청을 해야 했었다.[[http://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088938|#]] * 1998년 8월에 [[호우]]로 신선원전의 뒷 [[담|담장]] 3m가 무너졌다. 물론 현재는 복구한 상태.[[https://news.v.daum.net/v/19980810161800842?f=o|#]] * 2013년 7월 29일 낮 12시 30분 경 이 곳에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포획 작전 1시간 여 만에 사살당했다. 이 멧돼지는 전날 오후 신선원전 옆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도 출몰했었다고 한다.[[https://news.v.daum.net/v/20130729174509099?f=o|#]] * 몇몇 [[기업]]에서 사회공헌 차원으로 신선원전 [[청소]]를 하는 [[봉사]]를 했었다. 2009년에는 [[현대건설]]에서[[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218139005|#]] 2017년에는 [[라이언 게임즈]]의 임직원들과 아프리카 프릭스 프로게임단이 이 곳을 청소했다.[[https://news.g-enews.com/view.php?ud=2017110118222683089bdce8ae77_1&md=20171101182335_R|#]]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xDyAt6jLL8)]}}} || || {{{#gold ''' JTBC 〈차이나는 클라스〉 35회 예고편 '''}}} || 2017년 11월 8일 방송 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35회에서 해당 [[프로그램]] 역사 상 최초의 야외 수업 현장으로 창덕궁 후원과 함께 나왔다. 강연자는 [[유홍준]]. 이 날 동행한 [[방송인]]은 [[홍진경]], [[오상진]], [[딘딘]], [[지숙]], [[다니엘 린데만]]이었다.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