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선평문'''}}}[br]{{{-1 昌德宮 宣平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선평문,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405년]] {{{-1 (창건 추정)}}}[br][[1608년]] {{{-1 (중건)}}}[br] [[1647년]] {{{-1 (중건)}}} [br][[1835년]] {{{-1 (중건)}}}[br] [[1920년]] {{{-1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선평문.png|width=100%]]}}} || || {{{#gold ''' 선평문[* [[http://www.k-heritage.tv/brd/board/256/L/CATEGORY/615/menu/254?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615&bbIdx=4879&brdType=R&tab=|사진 출처]]]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 대조전]]의 [[정문]]이다. '선평(宣平)' 뜻은 '화평(平)을 세상에 펼친다(宣)'이다. == 역사 ==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의 [[정문]]임으로 대조전과 같이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에 창건한 듯하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복구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다. 이후 [[순조]] 때 다시 불탄 것을 [[헌종(조선)|헌종]] 때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 내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20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저 때 [[경복궁 양의문]][* [[경복궁]]의 중궁전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의 정문.] 건물을 헐어 옮겨다 지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 구조 == === 조선시대 선평문의 모습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선평문.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선평문 '''}}} ||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따르면 [[창덕궁 희정당|희정당]] 행각과 [[복도]]를 통해 붙어있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총 1칸으로, 용마루는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용두를 올렸다. * 〈동궐도형〉을 보면, 희정당과 연결되는 복도각 안에도 [[문]]이 있었다. 선평문에서 복도로 접어드는 문 승복문(承福門)과 희정당 행각 쪽으로 붙어있는 승명문(承明門)이었다. 복도각 가장자리에는 [[창문|창호]]가 달려있었다. === 1920년 재건 이후 선평문의 모습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이다. 칸 수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문 앞에 7개의 [[계단]]을 두었다. [[초석|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문|문짝]]과 측면의 [[벽]]은 초록색 나무판이다. 문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으로 칠했다. * [[왕]]이 다니는 가운데 칸을 양 옆 칸과 다르게 만들었다. 넓이도 더 넓고 문의 높이도 더 높다. 문짝도 가운데 칸은 6판이나 양 옆은 4판이다. * 각 칸의 인방 위에 풍혈을 뚫은 궁판을 올렸다. 좌, 우 칸의 경우, 위, 아래 7개 씩 총 14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으나[* 윗 궁판의 경우, 6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가운데 칸의 경우, 풍혈 10개 뚫린 궁판 하나를 올렸다. 궁판들 위에 홍살을 놓았으며 가운데 칸 궁판에 현판을 걸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근대화]] 이후 지은 흔적이 보인다. 문 안쪽 부분([[창덕궁 대조전|대조전]] 쪽)의 전체 칸 도리와 바깥 부분([[창덕궁 희정당|희정당]] 쪽) 가운데 칸 도리에 [[전등]]이 달려있다.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