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빈청 | 비궁당'''}}}[br]{{{-1 昌德宮 賓廳 | 匪躬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동궐마루,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시기 미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빈청.jpg|width=100%]]}}} || || {{{#gold ''' 빈청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빈청이다. [[창덕궁 숙장문|숙장문]]의 동남쪽에 있다. == 이름과 용도 == 빈청은 삼정승[*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정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및 [[비변사]] [[당상관]]들이 평상시에, 아니면 [[임금]]을 뵙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회의]]하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특정 [[건물]]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빈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지고 오직 창덕궁 빈청만 지금까지 있다. 《궁궐지》에서는 이곳을 '비궁당(匪躬堂)'으로 소개했으나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이름 없이 그냥 빈청으로 나온다. 일단, 이 문서 이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덕궁 빈청'이다. ‘비궁(匪躬)’의 뜻은 '[[희생|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로, 《[[주역]]》에서 유래한 말이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관료]]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의 이름으로 알맞다. == 역사 == 《[[성종실록]]》의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12007_001|이 기사]]에서 [[서거정|달성군 서거정]]이 이 건물에 대해 쓴 ‘비궁당기(匪躬堂記)’를 언급한다. 이로 보아 최소 [[성종(조선)|성종]] 시기에는 존재한 듯 하다. 확실한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모르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시기에 [[창덕궁]]을 중건할 때 같이 복구한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에 당시 [[섭정]] 중이던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비변사]]가 폐지됨에 따라 비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본 제국|일제]]가 [[자동차]]를 보관하는 어차고(御車庫)로 바꾸었다. 변형 시기는 정확히 모르나 1908년([[융희]] 2년) 제작된 《동궐도형》에 빈청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바뀐 듯하다. [[순종(대한제국)|순종]] [[죽음|승하]] 후에는 벽면마다 [[유리]][[창문]]이 설치된 [[자동차]] 전시실로 변했다. 내부에는 초헌, 연(輦)과 여(轝) 같은 [[가마]]와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탔던 승용차인 1918년식 [[캐딜락]]([[미국]] [[GM]]사 제작) 및 1914년식 다임러([[독일]] [[다임러]]사 제작)가 보관 · 전시되어 있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자동차들이 옮겨진 뒤 빈 공간으로 남았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카페]]가 들어섰다. 이름은 ‘동궐마루’. [[커피]]와 [[차|다]][[과자|과]], [[기념품]]을 판매한다. [[문화재청]]이 영업을 허가한 이유는 관람객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일제]]가 차고로 전락시킨 것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복원은 안하고]] 카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010년과 2012년, 2014년의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그 때마다 당시 문화재청장들이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말했지만 전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2020년 현재까지 영업한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839|#]] == 구조 == * 정면 5칸, 측면 3칸의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이다. 네모난 [[암석|돌]] [[기둥]]을 놓고 그 위에 사각 목조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팔작과 맞배 형태가 섞였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식이다. 다만, 양쪽 가장자리 칸은 아예 공포가 없는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으로 칠해 절제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각 칸의 가장자리 부분에는 낙양각을 설치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빈청.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빈청 '''}}} || [[조선시대|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를 보면 [[담]]과 [[문]]을 둘러 영역을 구분한 모습이었다. [[구한말|말기]]에 그린 《동궐도형》을 보면 양 가장자리 칸이 [[온돌|온돌방]]이고, 가운데의 3칸은 [[대청]]이었다. 그리고 앞면과 뒷면의 가장자리 부분은 툇간으로 두었다. == 여담 == * 빈청에 있던 [[온돌]]을 [[숙종(조선)|숙종]]이 없애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구들장에 앉아 [[왕]]을 --[[뒷담]]--비판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http://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35&detail_code=8&gung_number=2|#]] 그래도 후대에 그린 《동궐도형》에 온돌방이 있는 것을 보아 없앴더라도 바로 복구했을 것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version=504, paragraph=4.8)]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