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창덕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 [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보경당'''}}}[br]{{{-1 昌德宮 寶慶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405년]] {{{-1 (창건)}}}[br][[1908년]] 이후 {{{-1 (철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보경당.jpg|width=100%]]}}} || || {{{#gold '''〈동궐도〉 보경당. 서쪽, 북쪽에 장독이 있는 건물이 보경당이다.[br]아래 푸른 지붕은 [[창덕궁 선정전|{{{#gold '''선정전'''}}}]].'''}}} || [목차] == 개요 == [[창덕궁]] 내전 영역에 속했던 건물. [[창덕궁 선정전|선정전]] 북서쪽에 있었으며, 동쪽으로 태화당(泰和堂), 재덕당(在德堂)이 행각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놓여있던 형태였다. == 역사 == [[태종(조선)|태종]] 때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서별실(西別室)로 지었고, [[세조(조선)|세조]] 때 비로소 공식적인 당호를 부여받았다.[* 세조실록 세조 7년(1461) 12월 19일 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712019_003|#]] ] 세조는 재위 13년(1467) 9월 28일 보경당에서 [[영의정]] [[최항(조선)|최항]], [[좌찬성]] [[홍윤성]], [[형조판서]] [[서거정]]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었고, 같은 해 11월 11일에는 [[정희왕후]]의 탄신일을 맞아 보경당에서 잔치를 열었다.[* 세조실록 세조 13년(1467) 11월 11일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311011_001|#]] ] 보경당은 왕이 신하를 접견하거나 경연을 여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세조를 따라 [[예종(조선)|예종]], [[성종(조선)|성종]], [[연산군]]도 보경당을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했는데, [[성종(조선)|성종]] 재위 연간에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이곳으로 신하들을 부르고 일을 처결했다. 또한, 정희왕후가 승하했을 때는 성종이 보경당을 거려청(居廬廳)[* 잠시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 주변에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공간. ]으로 잠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연산군]]은 보경당을 화려하게 꾸미느라 화계(花階) 공사를 일으켜 대간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동궐도]]〉의 보경당에서는 화려한 화계와 너른 마당은 보이지 않는다.[* 연산군도 만만찮게 궁궐 공사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폐위되면서 차츰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오히려 〈[[동궐도]]〉의 보경당은 담장 너머 [[옹기]]가 줄지어 서있다. 보경당 안쪽 뜰에도 옹기가 가득해서 정치와 거리가 먼 왕실 내 생활 공간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보경당은 [[후궁]]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대표적인 예로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이곳에서 영조를 [[출산]]했다. 영조 49년(1773) 영조는 자신의 나이 80세를 기념하여 직접 쓴 편액을 보경당에 걸게 했다. >어필(御筆)로, '탄생당 팔십서(誕生堂八十書)' 여섯 글자를 써서, 호조 판서 [[채제공]]에게 명하여 보경당(寶慶堂)에 현판(懸板)을 걸게 했다. >---- >《[[영조실록]]》 영조 49년(1773) 10월 11일. 그런데 영조뿐만이 아니라 [[경종(조선)|경종]]도 잠시 보경당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숙종 16년(1690) [[숙종(조선)|숙종]]은 [[희빈 장씨]]의 몸에서 얻은 [[경종(조선)|원자]]를 왕세자로 세우면서 책례 장소를 정할 때, 숙종이 "지금 원자가 보경당(寶慶堂)에 있으니"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숙종실록 숙종 16년(1690) 5월 20일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605020_001|#]] ][* 그렇지만 보경당이 좁고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경종의 왕세자 책례는 [[창덕궁 희정당]]에서 행했다.]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는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조실록, 순조 22년(1822) 12월 26일 5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212026_005|#]] ] 그 이후, 더 이상 실록에서 보경당의 쓰임새에 대한 중요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순종]] 초기(1900년대 초반)에 제작한 〈동궐도형〉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현재는 빈 터로 남았다. == 구조 == *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 표현하는 보경당의 모습은 다르다. 〈동궐도형〉을 기준으로 정면 6칸, 측면 3칸, 그리고 서측 툇간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그 옆에 방이 1칸 있고, 2칸의 대청마루와 그 동측에 다시 방 2칸이 있다. == 여담 == * 《[[중종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와 전비(田非)의 재산이 보경당에 있어서 사람을 시켜 뒤지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