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덕궁 돈화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문)]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정문)]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201~4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382호 ||<|2> ← || '''383호''' ||<|2> → || 384호 || ||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 '''창덕궁 돈화문''' || [[창경궁 홍화문]]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383호}}}]]''' || ||<-2> {{{#fff {{{+1 '''창덕궁 돈화문'''}}}[br]{{{-1 昌德宮 敦化門}}}}}}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돈화문,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12년 창건, 1608년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onwhamun.jpg|width=100%]]}}} || || {{{#gold '''돈화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정문,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이다. == 이름 == '돈화(敦化)' 뜻은 '(백성을) 도탑게(화목하게) 하고 교화시킨다'이다. 유교경전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萬物竝育而不相害 >만물은 함께 커도 서로 해치지 않으며 > >道竝行而不相悖 >도(道)는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아서 > >小德川流 大德'''敦化''' >작은 덕은 시내처럼 흐르고 큰 덕은 '''두텁게 감화시키니''' >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이것이야말로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 >---- >《[[중용]]》 30장 中.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돈화문.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돈화문 '''}}} || [[태종(조선)|태종]] 때에 창덕궁 내부 전각들을 다 지은 후에야 궁궐 경계를 확정하여 [[1412년]]([[태종(조선)|태종]] 12년)에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에 창덕궁 전체가 불에 탔으나 궁의 외곽에 있는 돈화문도 같이 탔는 지는 모른다. 대부분 자료에서는 저 때 화재를 입었다가 1608년([[선조(조선)|선조]] 41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다만,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09_002|1598년 5월 9일 자 《선조실록》 기사에]] 돈화문을 활용한 내용이 있으므로 남은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건물 양식이 조선 전기와는 꽤 달라서 어느 쪽이 맞다고 확인하긴 힘들다.[* 저 실록에 나온 돈화문이 중층 정식 건물이 아닌, 임시로 세운 문을 일컬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반소(半燒)되고 남은 문이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임란 이후 여러 번 수리를 했다는 것이다. == 구조 == * [[경복궁 광화문]]이 돌로 쌓은 [[성문(건축)|성문]] 형식을 갖춘데 반해 돈화문은 [[나무]]로 만든 일반적인 [[한옥]] 대문 형식으로 만들어져 방어력이 광화문보다 훨씬 약하다. *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우진각이고 [[처마]]는 겹처마,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다포이다. 정면 5칸 중 양끝 두 칸이 막혀있는데, 이는 황제국의 문틀은 5개, 제후국의 문틀은 3개를 조성할 수 있는 규율에 따라 칸수는 황제국의 궁궐 문처럼 5칸이지만 실제 문으로 사용하는 칸은 3칸으로 재치있게 절충한 결과이다. * 원래는 장대석(長台石) [[기단]]과 층계가 있었다. 이는 19세기 초에 그린 〈[[동궐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순종(대한제국)|순종]] 즉위 후 차량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본 제국|일제]]가 도로 표면 높이에 맞춰 묻어버렸다. 이후 약 90년 동안 돈화문 바로 앞까지 도로가 깔려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대대적인 창덕궁 복원사업에 맞춰 월대를 발굴했다. 그럼에도 월대와 돈화문 앞을 지나는 [[율곡로(서울)|율곡로]]의 높이가 달라서 월대 앞에 1.5m 높이의 옹벽을 두었고, 이때문에 월대 앞이 막혀있어 관람 동선의 불편 및 위엄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9년에 창덕궁 관리소와 서울시 도시기반시설본부에서 협업하여 율곡로 높이를 월대 계단 높이에 맞춰 낮추고 막힌 월대를 트는 공사를 계속 진행하여 2020년 11월에 드디어 완공했다. 월대가 탁 트일 때까지 약 1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 건축 양식 자체는 예전 왕조의 건축 유물 및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유사한 양식이 보인다. [[고려|고려왕조]]의 본궐이 있던 [[만월대]]의 유적을 보면 궁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은 돈화문과 똑같이 천자국 제도인 5칸으로 세워졌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고려도경]]》에 따르면 저 네 대문이 모두 3문 형식이었다 하니 돈화문과 똑같이 5칸으로 세우되 3문만 이용한듯 하다. 즉 돈화문은 유서깊은 건축양식의 전형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 여담 == * [[광해군]] 시기 인왕산 자락에 지었던 [[인경궁]]의 정문인 '명화문(明化門)'이 돈화문을 본따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경궁 자체가 공중분해되면서 현재엔 전하지 않는다. * [[이괄의 난]] 진압 후 난을 진압한 심기원, 신경진, 장만 등이 이괄 군에게 왕으로 추대받은 왕족 [[흥안군|흥안군 이제]]를 이곳에서 죽였다. * 〈[[동궐도]]〉를 보면 돈화문 지붕 모양이 우진각이 아니라 팔작이다. 화공의 단순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저렇게 그린 건지는 모른다. [[창경궁 홍화문]]도 동궐도에 같은 오류가 나타나 있다. [[분류:창덕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