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경궁 통명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817호 ||<|2> ← || '''818호''' ||<|2> → || 819호 || || [[창덕궁 선원전]] || '''창경궁 통명전''' || [[덕수궁 중화전]] 및 [[덕수궁 중화문|중화문]] ||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8호}}}]]''' || ||<-2> {{{#fff {{{+1 '''창경궁 통명전'''}}}[br]{{{-1 昌慶宮 通明殿}}}}}}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경궁 통명전,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br][[창경궁로]] 185 (와룡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84년 창건, 1834년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 통명전.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통명전_전경.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통명전_근경.jpg|width=100%]]}}} || || {{{#gold ''' 통명전[* [[http://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3&file_name=img_changgyeong_story_bg_12_00.jpg|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창경궁 이야기]][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139&ccbaKdcd=12&ccbaAsno=0818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135&ccbaKdcd=12&ccbaAsno=08180000&ccbaCtcd=11|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 || [clearfix] [목차] [clearfix] == 개요 == [[창경궁]]의 침전이다. 사실 [[창경궁]]은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족|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 이름 ==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인조]] 대의 [[문신]]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은 《통명전 상량문》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숙종(조선)|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의 [[집]]으로 풀이했다. [[현판]]은 [[건물]] 외부와 [[대청]] 한가운데에 2개가 걸려있으며 모두 [[순조]]가 직접 썼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통명전.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서 묘사한 통명전. 1834년(순조 34년) 복구하기 이전에 그렸기 때문에 터만 남아있다. '''}}} || 1484년([[성종(조선)|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고,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했는데 이 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정조(조선)|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에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잔치|연회]]같은 [[행사]]를 할 수 있게 월대를 굉장히 큰 규모로 만들었으며 월대 위엔 박석을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3개[* 그 중 왕이 다니는 가운데 계단의 길이가 더 길다.], 그리고 동, 서에 각각 3단의 계단을 2개씩 배치했다. 이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이어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의 뼈대를 만들었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잡상의 수는 3개이다. [[대한제국]] 시기 촬영한 [[사진]]을 보면 측면에 [[마루|가퇴]]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창호는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정(井)’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온돌방 쪽 툇간으로 드는 두 짝씩의 창호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띠살을 쓰고 있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천장]]은 전체적으로 우물 반자[*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로 막은 뒤 청판에 [[모란]]을 그려넣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1칸, 측면 2칸을 [[온돌|온돌방]]을 두었으며 앞, 뒷면의 협칸은 [[마루|툇마루]]로, 측면의 협칸은 [[온돌]] 쪽방으로 구성했고 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으로. 툇마루의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했다. [[일제강점기]]에 통명전을 [[창경원]] [[박물관]] 진열실로 쓰면서 온돌을 뜯어내고 [[방]], [[마루]] 구분 없이 [[공간]]을 다 터서 크게 훼손되었으나 1980년대 이후 실내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통명전_내부.jpg|width=100%]]}}} || || {{{#gold ''' 통명전 내부 전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136&ccbaKdcd=12&ccbaAsno=081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 통명전 내부.png|width=100%]]}}} || || {{{#gold ''' 왼쪽은 통명전 대청, 오른쪽은 통명전의 천장과 실내 현판.[br]순조의 친필이라 오른쪽 끄트머리에 어필(御筆)이라 적혀있다. '''}}} || [[시각|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통명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왕자|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집|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만화카페|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 《한경지략》[* [[조선시대|조선 후기]] [[정조(조선)|정조]] 시기에 [[한성부]]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 저자는 수헌거사로 알려져있는데 [[실학|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본예로 추정하고 있다.]에 “통명전에는 원래 [[청기와|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정조(조선)|정조]] 때 [[화재]]로 탔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때 건물이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물론 고려 때 지은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청기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청기와를 많이 쓴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 지은 것이며 무엇보다 옮긴 [[전각]]의 이름이 청와전(靑瓦殿), 즉 뜻 자체가 ‘[[청기와]] [[집]]’이기 때문이다. * 1633년(인조 11년) 재건 당시 통명전 뿐 아니라 주변 [[건물]]도 [[인경궁]]에서 헐어다 지은 듯 하다. 《창경궁수리소의궤》에 의하면 통명전의 서책방은 인경궁 함인당(涵仁堂)의 [[대청]] 앞 툇간과 헌잠당(獻箴堂)의 [[온돌]]을 옮겨서 조성했으며 동행각 역시 인경궁 함인당의 서온돌과 진연청(盡筵廳)의 북월랑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지당(池塘)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통명전_연지.jpg|width=100%]]}}} || ||<-3> {{{#gold ''' 통명전 지당[*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138&ccbaKdcd=12&ccbaAsno=081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명전 지당 上.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명전 지당 下1.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명전 지당 수로.png|width=100%]]}}} || || {{{#gold ''' 통명전 지당의 윗 부분 '''}}} || {{{#gold ''' 통명전 지당의 아랫 부분 '''}}} || {{{#gold ''' 통명전 지당 수로 '''}}} || 통명전 서쪽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물]]의 발원지는 통명전 서북쪽에 있는 [[샘|샘물]]로, 이 물이 [[암석|돌]]로 만든 직선으로 된 물길을 따라 흐르다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 때 그냥 떨어지게 하지 않고 입수구를 [[봉황]] [[부리]] 모양을 한 석조물로 만들어 물이 곡선을 그으면서 마치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한껏 운치를 더했다. 연못 가장자리에 하엽동자와 꽃봉오리를 세심하게 조각한 난간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사이에 돌 난간을 둘렀다. 연못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서 돌 [[교량|다리]]를 만들어 가로지를 수 있게 했으며 연못 북쪽 한 가운데엔 괴석을 2개 놓고, 남쪽엔 앙련대석(仰蓮臺石)을 새긴 돌 기둥 하나를 놓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전던지지 말라는 안내판.png|width=100%]]}}} || || {{{#gold ''' 동전던지지 말라는 안내판 '''}}} || [[동전]]을 던져 이 기둥 위에 놓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지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서 동전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연못]]으로 떨어진 게 대다수. 하지만 계속 던지면 이 기둥이 손상될 우려가 있어 현재는 동전 던지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창경궁]] 창건 당시 통명전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실록]]에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 여기서 골때리는 일화 하나가 있다. [[성종(조선)|성종]]이 [[연못]]에 [[구리(원소)|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암석|돌]]로 바꿨는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604126_001|#]] --결과적으로 [[돈지랄]]-- 현재 [[암석|돌]] [[교량|다리]] 서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높은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창덕궁]]으로 가는 [[창덕궁 · 창경궁 함양문|함양문]]이 나온다. == 열천(洌泉)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명전 열천2.jpg|width=100%]]}}} || || {{{#gold ''' 통명전 열천 '''}}} || 통명전 뒤뜰에 있는 [[샘]]이다. 이름은 열천(洌泉)으로, 1757년([[영조]] 33년) 5월에 영조가 직접 지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5029_001|#]]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이가) 굉장히 시리도록 차가운 샘’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비(날씨)|비]]나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렸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이 샘물은 마실 수 없다. == 여담 == * [[숙종(조선)|숙종]] 시기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었다는 곳이 바로 이 통명전 일대이다. 결국 이 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통명전은 숙종과 장희빈의 오작교 역할을 해준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만수전이 화재에 불타고 승하할때까지 잠시 살았던 처소이기도 하다.] * [[봄|늦봄]]에서 [[가을|초가을]] 사이에 통명전 대청을 개방하여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온돌|온돌방]]은 들어갈 수 없지만 문짝은 열어둬서 대청에서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여름엔 굉장히 시원해 창경궁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인기]]가 있다. 단,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비매너적인 [[행동]]은 삼가자. * [[2010년대]] 들어 통명전에서 [[전통]][[음악]]을 비롯한 여러 [[공연]]을 꽤 하고 있다.[[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5&seq_800=0010340981|#]] [[조선시대]] 때에도 [[잔치]]가 많이 열렸었으니 어찌보면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봐도 좋을 듯. 공연 외에도 [[궁궐]]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이 곳에서 진행하고 있다.[[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17_0011371827&cID=10701&pID=10700|#]] * 2015년 10월, [[LG생활건강]]이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통명전의 보존관리를 후원하는 문화재지킴이에 대한 [[MOU]]을 체결했다. [[http://www.weekly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41253|#]] == 대중매체에서 ==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많이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했는데 제대로 나올 땐 실제와 비슷하게 왕비나 대비가 머무는 곳으로 고증이 잘 지켜진 편이었다. 희한하게 시대 배경이 [[개성시|개경]] 궁궐일 때에도 나왔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수창궁]] 전각으로, 〈[[태조 왕건]]〉에서는 [[태봉국 철원성|철원 황궁]]의 일부로 등장했다.(...) 그리고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아관파천]] 이후의 [[덕수궁 함녕전|경운궁 함녕전]]으로 나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킹덤 통명전.jpg|width=100%]]}}} || || {{{#gold ''' 통명전이 등장한 〈킹덤〉 장면 '''}}} ||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한국 드라마)|킹덤]]〉 1회 때 [[세자]]([[주지훈]] 분)가 [[석고대죄]]하는 중궁전의 배경이 바로 여기이다. 〈킹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영향으로, 창경궁을 들른 외국인 관광객들이 특히 이곳을 많이 찾는다. * 1998년 [[MBC]] 〈[[대왕의 길]]〉에서 낙선당 화재사건 당시 영조([[박근형]] 분)에게 갈굼당한 [[사도세자]]([[임호]] 분)가 [[우물]]에 뛰어드는 장면을 바로 통명전 열천에서 촬영했다. 자세한 것은 [[창경궁 낙선당#s-3.1]] 문서 참조. * [[작가]] 까다롭스키가 2020년 3월부터에 연재하는 [[웹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서태후]]가 [[조선]]으로 파천했을 때 머무는 처소로 나왔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10, paragraph=3, title2=창경궁, version2=229, paragraph2=4.3.)] [[분류:창경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