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3> {{{#ffd700 {{{+1 '''창경궁 집복헌'''}}}[br]{{{-1 昌慶宮 集福軒}}}}}}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경궁 집복헌,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종로구)|와룡동]])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br][[1730년]] {{{-1 (중수)}}}[br][[1833년]] {{{-1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집복헌.png|width=100%]]}}} || || {{{#gold ''' 집복헌[* [[https://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3&file_name=img_changgyeong_story_bg_15_00.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 개요 == [[창경궁]]의 [[집|주거 건물]]이다. [[창경궁 양화당|양화당]]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창경궁 영춘헌|영춘헌]]과 붙어있다. ‘집복(集福)’은 ‘복(福)을 모은다(集)’는 뜻이다. == 역사 == 원래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모여있던 영역이었으므로, 집복헌 역시 후궁의 거처였던 듯 하다.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 상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영조]] 때이다. 1730년(영조 6년) 4월에 집복헌과 건극당의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을 찾아내어 내전 영역 전체를 수리했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4001_001|#]] --첫 등장 치고는 섬뜩하다.-- 1735년([[영조]] 11년)에는 [[사도세자]]가[[http://sillok.history.go.kr/id/kua_11101021_001|#]], 1790년([[정조(조선)|정조]] 14년)에는 [[순조]]가[[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6018_001|#]] , 1793년(정조 17년)에는 [[숙선옹주]]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즉위하기 전 [[순조]]와 관련한 기록이 많다. 이곳에서 [[돌잔치]]도 열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6018_001|#]], [[원자(왕족)|원자]]일 때는 [[사부]]와 함께 [[경전|경서]]를 읽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4021_001|#]] 그리고 [[세자]]가 된 이후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행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2002_001|#]] [[세자빈]]의 첫 간택도 여기서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2026_002|#]] [[순조]] 즉위 후엔 딱히 두드러진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820년(순조 20년)에는 집복헌을 [[수리]]하기 위해 길한 날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아 이 때 [[보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http://sjw.history.go.kr/id/SJW-H20070130-01300|#]] 1830년([[순조]] 30년)에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승정원일기]]》에 가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신하]]를 만났다는 내용의 기사만 드문드문 보인다.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1894년([[고종(대한제국)|고종]] 31년) 5월 23일 자 《[[승정원일기]]》의 [[기사]]이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1_05A_23A_00390|#]]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헐렸지만 집복헌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집복헌.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집복헌 '''}}} || 1830년(순조 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에 나와 있다. *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면서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별개 건물이던 [[창경궁 영춘헌|영춘헌]]과 합쳐져 두 전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집복헌이 더 컸는데 이 때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 [[기단]]은 장대석 1벌로 깔고 정면에는 [[계단]] 없이 댓돌만 두었다. 그리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없이 창방과 서까래가 바로 만나는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단청]]은 긋기단청으로 칠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집복헌 내부구조.png|width=100%]]}}} || || {{{#gold ''' 집복헌 내부 구조도 '''}}} || 평면도와 각 칸의 구성은 윗 그림을 참조. 오른쪽 붉은 사각형 안이 [[창경궁 영춘헌|영춘헌]]과 겹치는 부분이다. * 벽체의 경우, [[온돌|온돌방]] 쪽은 전부 문선을 두고 가운데 [[창문]]을 낸 뒤 나머지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대청]]의 바깥 면은 [[창문]]으로 되어있다. 다만, 남쪽의 대청 2칸은 앞, 뒤로 [[문]]이 설치되어있어 출입할 수 있게 두었다. 가운데 마당에서 볼 때 북쪽에 있는 툇마루의 바깥 면은 창, 문, 벽 없이 바깥과 뚫려있어 [[현관]] 기능을 할 수 있게 했다. * 창호는 전부 띠살이다. [[대청]]과 [[온돌|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설치했다. 분합문은 위, 아래에 [[한지]]가 발라져있고 중간에 화려한 '아(亞)'자 살 창이 있는 모습이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경궁 영춘헌, version=5)] [[분류:창경궁]][[분류:사도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