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3> {{{#ffd700 {{{+1 '''창경궁 영춘헌'''}}}[br]{{{-1 昌慶宮 迎春軒}}}}}}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경궁 영춘헌,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종로구)|와룡동]])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br][[1833년]] {{{-1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춘헌.png|width=100%]]}}} || || {{{#gold ''' 영춘헌[* [[https://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3&file_name=img_changgyeong_story_bg_14_00.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경궁]]의 [[집|주거 건물]]이다. [[창경궁 양화당|양화당]]의 동쪽에 있으며 [[창경궁 집복헌|집복헌]]과 붙어 있다. ‘영춘(迎春)’은 ‘[[봄]](春)을 맞는다(迎)’는 뜻이다. [[현판]]은 봉조하[* 奉朝賀. [[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남공철이 썼다. == 역사 == 원래 이 일대에 [[후궁]] 처소가 모여있었으므로, 영춘헌도 본래는 후궁 거처였던 듯 하다. 창건 연대는 모르나 [[기록]] 상 처음 나타나는 것은 [[정조(조선)|정조]] 때이다. 정조는 [[창경궁]] 옛 홍문관에 감인소란 이름을 붙이고 즐겨읽는 [[책]]들을 그 곳에서 편찬, [[인쇄]]했다. 그리고 감인소 근처에 있는 영춘헌에 주로 머무르며 이곳을 [[서재]]와 집무실로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12025_002|#]] 1796년([[정조(조선)|정조]] 20년) 6월에는 정리당상(整理堂上) 이시수가 [[건물]]을 고쳐지을 것을 청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6016_001|#]] [[임금]]이 거주하는 [[건물]]의 규모가 협소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영춘헌에 주로 머물던 [[정조(조선)|정조]]는 1800년(정조 24년) 6월에 이곳에서 [[죽음|승하]]했다. 이 때 [[영조]]의 [[왕비|계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예순왕대비]](정순왕후)가 영춘헌을 빈전으로 쓰려 했으나 좁다는 이유로 대신 [[창경궁 환경전|환경전]]을 빈전으로 정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6029_004|#]] 1830년([[순조]] 30년) 8월에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다시 지었다. 이 때 [[창덕궁 중희당]] 근처에 있던 연영합(延英閤) 일대에 있던 천지장남궁(天地長男宮)을 헐어 지었다고 한다. 재건 이후 [[정조(조선)|정조]]를 닮고 싶었던 후대 [[임금]]들도 영춘헌을 많이 활용했다. [[헌종(조선)|헌종]]은 이곳에서 [[국사]]를 돌보고 [[경전|경서]] 강독을 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xa_11201024_001|#]][[http://sillok.history.go.kr/id/kxa_11111004_001|#]] 아플 때도 영춘헌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1504013_001|#]] [[고종(대한제국)|고종]]도 헌종처럼 영춘헌에서 경서를 읽고 [[정사]]를 보았으며 [[신하]]들을 만났다.[[http://sjw.history.go.kr/id/SJW-K14040040-02000|#]]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 [[기록]]은 1894년(고종 31년) 4월 8일 《[[승정원일기]]》 기사이다. [[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1_04A_08A_00160|#]]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었다. 그러나 영춘헌은 무사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동궐도]]〉의 모습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영춘헌.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영춘헌. 1830년(순조 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다. '''}}} || 〈[[동궐도]]〉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의 아담한 규모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정면 가장자리에는 [[마루|쪽마루]]를 덧대었다. 계단은 정면 앞에 총 2벌이 놓여있다. 외부는, 정면과 남쪽 측면(정면 쪽)의 경우 전부 [[문]]으로 두었으며, 북쪽 측면은 [[벽]]으로 마감하고 가운데에 [[창문]]을 두었다. 건물의 서쪽에는 남북으로 긴 [[나무]] [[판]][[담|장]]과 솟을대문 2칸을 두었고, 나머지 남쪽과 동쪽에도 [[담]]과 문, 행각을 두어 다른 전각들과 영역을 구분했다. === 1833년 ~ 현재 === * [[화재]] 이후 예전 모습과 다르게 지었다. 규모도 정면 7칸, 측면 2칸의 총 14칸으로 늘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13칸을 덧대었으며 또한 과거에는 별개 건물이던 [[집복헌]]과 합쳐졌다. 원래 집복헌이 더 컸는데 이 때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쩌리가 된 집복헌-- * [[기단]]은 장대석 3벌로 깔고 정면에는 4단 짜리 [[계단]] 2개를 두었다. 그리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고 [[용두]]를 올렸다. [[단청]]은 긋기단청으로 칠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춘헌 내부구조.png|width=100%]]}}} || || {{{#gold ''' 영춘헌 내부 구조 '''}}} || 각 칸의 구성은 아랫 그림을 참조. 노란 색 바탕에 [[방]]이라고 적힌 칸이 [[온돌|온돌방]]이다. 아래 붉은 사각형 안이 영춘헌 본채이고 나머지는 덧댄 부분이다. 제일 서쪽 칸들은 [[창경궁 집복헌|집복헌]]과 겹친다. * 바깥 면을 보면, 본채 [[대청]] 2칸과 대청 동쪽의 [[온돌|온돌방]] 1칸의 경우, 툇마루를 야외와 통하게 했다. 그리고 [[대청]] 칸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온돌방 쪽은 전부 문선을 두고 가운데 [[창문]]을 낸 뒤 나머지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며 마루방의 바깥 면은 [[창문]]이다. 동북쪽에 있는 [[부엌]] 칸은 [[나무]] 판문을 달고 그 위에 [[벽]]을 둔 형태이다. 창호는 띠살이다. * [[아궁이]]가 [[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다. == 여담 == [[분류:창경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