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3> {{{#ffd700 {{{+1 '''창경궁 빈양문'''}}}[br]{{{-1 昌慶宮 賓陽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경궁 빈양문,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종로구)|와룡동]]) || ||<-2> {{{#ffd700 '''건축시기'''}}} || [[1616년]] {{{-1 (창건 추정)}}} [br][[1833년]] {{{-1 (재건)}}}[br][[1986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 빈양문.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 빈양문 2.png|width=100%]]}}} || || {{{#gold ''' 빈양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8&detail_code=8&gung_number=3#|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경궁 명정전]]의 [[문|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s-6|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閤門) 역할을 했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 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합문(閤門)|#]] 빈양문은 [[외전]] 일대와[* [[정전#s-6|정전]]인 [[창경궁 명정전|명정전]]과 [[편전]]인 [[창경궁 문정전|문정전]] 구역.] [[내전]] 구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합문을 두기 적절한 장소였다. [[창경궁 명정전|명정전]]의 서쪽[* [[창경궁 명정전|명정전]]은 동향했기에 뒷면은 서쪽이 된다.]에 있으며 남쪽으로 [[창경궁 숭문당|숭문당]]과 붙어있다. ‘빈양(賓陽)’ 뜻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이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빈양문.png|width=100%]]}}} || || {{{#gold '''〈동궐도〉 빈양문 '''}}} || 정확한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기록]]에서 빈양문이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광해군]] 8년)인 것을 보아 이 무렵 진행했던 창경궁 중건 공사 때 처음 지은 듯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05003_004|#]]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불탄 것을 1633년(인조 11년)에 재건했다. 이후 주로 임금이 [[창경궁 명정전|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http://sillok.history.go.kr/id/kua_13002030_001|#]], [[장례]] 때 망곡례[* 望哭禮. 시신이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곡하는 예식.]를 행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ua_10708027_001|#]], 발인할 때 재궁(梓宮)[* [[왕실]]에서 쓰는 [[관(장례)|관]]을 말한다.]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06015_001|#]][[http://sillok.history.go.kr/id/ksa_11412015_001|#]]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4017_003|#]] 그 후 1830년([[순조]] 30년)에 다시 불탄 것을 3년 뒤에 복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3008001_001|#]]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 때 같이 철거했다. [[8.15 광복]] 후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1984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가 높이 솟은 형태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문]](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 [[판]]으로 마감했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으로 입혔다. 바닥엔 [[벽돌|전돌]]을 깔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빈양문 복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빈양문 복도2.png|width=100%]]}}} || || {{{#gold ''' 빈양문과 명정전을 잇는 복도 '''}}} |||| {{{#gold ''' 문정전까지 이어진 빈양문의 복도 '''}}} || [[창경궁 명정전|명정전]] 뒷면에 가설된 툇마루까지 [[복도|복도각]]을 연결하여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행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복도는 [[창경궁 문정전|문정전]] 뒷면까지 이어진다. == 여담 == * 합문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현직 [[관료]]가 아니면 합문이 어딘지를 잘 몰랐다. 이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조선)|정조]]가 [[창경궁]]에 머물 때 한 신입 [[사관(역사)|사관]]이 [[창덕궁]]의 합문인 [[창덕궁 협양문|협양문]]에서 [[왕]]을 기다렸다. 하지만 임금이 거기서 나올 리 없었고, 뒤늦게야 정조가 [[창경궁]]에 있는 것을 안 사관은 빈양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건너갔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5025_002|#]][[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협양문(協陽門)|#]] == 매체에서 == * 빈양문 본채가 나온 적은 별로 없다. 대신 [[복도|복도각]]이 자주 등장했다. 특이하게 [[고려]]나 [[신라]] [[왕궁]]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용의 눈물]]》에서 [[개성시|개성]]의 [[수창궁]] 일부로,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월성|서라벌 궁궐]]으로 등장했던 것. 지나가는 배경으로 나왔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협양문, version=12)] [[분류:창경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