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78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달성군 출신 인물]][[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중추원]] [목차] == 개요 == 진희규(秦喜葵, [[1878년]] [[9월 3일]] ~ [[1959년]] [[11월 25일]])는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경제인으로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 상동이며 경상북도 달성군(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이다. == 가계 == 배우자 농서 이씨 이준수(李俊秀)의 딸 사이에 슬하 5남 3녀를 두었으며, 그 중 셋째 딸 진말홍(秦末洪)이 서울은행장, 제일은행장을 지낸 금융인 이보형(李寶衡)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고, 또 그 중 안흥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지낸 금융인인 둘째 아들 이재응(李在應)이 이윤자(李倫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고, 또또 그 중 배우인 둘째 아들 [[이서진]](李瑞鎭)을 두었으므로 진희규의 사위는 이보형이며, 외손자는 이재응이며, 진외증손자는 이서진이다. == 활동 사항 == 진희규는 한일 병합 이전인 [[1902년]] 내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28일]]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계림 농림 주식회사(鷄林農林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0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 이사(취체역), 1920년 경일 은행(慶一銀行) 이사, 1920년 대구 주조 주식회사(大邱酒造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8년]] 경상 합동 은행(慶尙合同銀行)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여 대주주를 역임했으며,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대구 상공 은행(大邱商工銀行)이라는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그 직위를 역임했다. 1924년에는 수성 공립 보통학교 학부형 장학회 회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다. 또한 동년에 달성군수성 수리 조합 조합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으며, [[1927년]] [[1월 20일]]부터 [[1938년]] 6월까지 달성 동부 금융 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진희규는 경상북도 고령(高靈)·달성(達城)·경산(慶山)·칠곡(漆谷) 등지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진희규는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선사례’를 통해 "금반(今般) 경상북도 평의원에 임명되었음은 도민(道民) 첨위(僉位)의 애원해 온 바 금후 일층 도치(道治)에 전력코자 자(玆)에 감히 감사의 뜻을 표하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32년 조선 유교회 명리원(明理院) 의정(議正)이 되었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그 직위로 활동하면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3월 18일]] 박창수 참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 특위]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진희규는 195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상훈과 추모 == 진희규는 [[1938년]] [[8월 4일]] 대구 공립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설립비 1000원을 기부하여 표창과 포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16일]] 칙령 188호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7월 1일 조선총독부 시정 25년 기념 박물관 건설비로 1000원을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표창과 포장을 받았다. == 참고 자료 == [[한국어 위키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풍기진씨세보 고성이씨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