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황족]][[분류:537년 출생]][[분류:560년 사망]][[분류:익사한 인물]]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형양헌왕(衡陽獻王)[br]{{{+1 陳擬 | 진의}}}''' || || '''작위''' ||형양군왕(衡陽郡王) || || '''시호''' ||헌(獻) || || '''성''' ||진(陳) || || '''이름''' ||의(擬) || || '''자''' ||경업(敬業) || || '''생몰''' ||537년 ~ 560년 || || '''부친''' ||[[무제(남진)|무제 진패선]]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진(남조)|남진]]의 종실로 자는 경업(敬業).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의 아들이었다. == 생애 == 진패선이 교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리비|이분]]을 토벌할 때 진창은 [[장요아]]와 함께 [[심각(남진)|심각]]을 따라 오흥군으로 돌아갔다. 뒤에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할 때 진창은 장요아, 진천과 함께 후경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후경이 토벌된 뒤에야 풀려나 장성국세자(長城國世子), 오흥태수가 되었다. 진패선은 [[사철(남진)|사철]]과 [[채경력]]에게 진창의 보좌를 명했으며, 또한 두지위를 통해 진창에게 경서를 가르쳤다. 진창은 이후 진천의 동생 진욱과 함께 강릉으로 향했고, [[효원제]]로부터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 그리고 강릉이 [[서위]]에 함락된 뒤 진창은 진욱과 함께 서위로 끌려갔다. 557년, [[진(남조)|남진]]이 들어선 뒤 진패선은 [[북주]]에 자주 사신을 보내 진창과 진욱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주에서는 진패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주에서 진창의 송환을 받아들인 것은 559년 진패선이 죽은 이후였는데, 당시 왕림이 장강 중류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제때 귀국하지 못하고 안륙(安陸)에 머물렀다가 560년에 출발하였다. 한편 [[문제(남진)|문제 진천]]은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진창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상주제군사(都督湘州諸軍事), 표기장군(驃騎將軍), 상주목(湘州牧)으로 삼고 형양군왕(衡陽郡王)에 봉한 뒤 식읍 5,000호를 내렸다. 그런데 진창이 진천에게 전한 서신의 내용이 불손해서 진천은 [[후안도]]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자가 곧 돌아오니, 나는 번왕이 되어 노후를 보낼 곳을 찾아야겠소. 그러자 후안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로부터 천자를 대신한 적이 있었습니까? 소신은 삼가 감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후 진창은 국경을 넘던 도중 장강에서 배가 뒤집혀서 익사했다. 진천의 관이 건강으로 돌아오자, 진천은 곡을 하며 장례를 지냈으며, 진창을 시중(侍中), 가황월(假黃鉞),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태재(太宰), 양주목(揚州牧)으로 추증하고 헌(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진창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진천은 자신의 7남인 진백신(陳伯信)을 진창의 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