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백제의 제후 및 비정통 국왕)] ||<-3><:><#00A6A9>'''{{{#gold {{{+1 辰爾王[br]진이왕}}}}}}''' || ||<:><#00A6A9>'''{{{#gold 성씨}}}'''||||<(> 부여(扶餘) || ||<:><#00A6A9>'''{{{#gold 휘}}}'''||||<(> 진이(辰爾) / 지인(智仁) || ||<:><#00A6A9>'''{{{#gold 사성 성씨}}}'''||||<(> 스가노 아손(菅野朝臣) || ||<:><#00A6A9>'''{{{#gold 생몰연도}}}'''||<:> 음력 ||? ~ ? || ||<:><#00A6A9>'''{{{#gold 섭정기간}}}'''||<:> 음력 ||600년 || [목차] == 개요 == [[백제]]의 왕족으로 16대 [[진사왕]]의 5대손이다.[* [[진사왕]] - [[진손왕]](辰孫王) - 태아랑왕(太阿郞王) - 해양군(亥陽君) - 오정군(午定君) - 진이왕(辰爾王)] [[토요타(성씨)|토요타]]씨 족보에서는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즉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링크]] 《[[일본서기]]》에서 그가 [[고구려]]의 상표문을 해독한 일화가 실려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생애 == [[진손왕]]이 왜국으로 망명한 이후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천황을 근시(近侍)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그의 세 형제는 모두 부여씨가 아닌 스가노 아손(菅野朝臣)씨로 기록되었다. 572년 고구려에서 보내온 외교문서의 내용이 난해하여 왜왕이 그것을 손수 대신에게 주면서 여러 후비토(史)를 불러 모아 해독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3일 안에 모두 해독하지 못했고, 진이왕만이 훌륭하게 해독하여 왜왕과 대신 모두로부터 크게 찬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왜왕이 거처하는 전중(殿中)에 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고구려의 외교문서 중에 글자를 까마귀 깃에 써서 보낸 것이 있었으나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까마귀 깃을 밥김에 쐰 다음 흰 비단 위에 박으니 글자가 또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조정에서 다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그의 박식함과 기지를 잘 보여주는 사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미마츠(三松)씨 족보에 의하면 [[비다츠 덴노]] 치세(572~585)에 백제왕신사([[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소재)를 세우고 그의 조상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 >初代 百済國大祖 [[동명성왕|都慕大王]][* 세대 차이를 봤을 때 진짜 [[동명성왕]] 추모가 아니라 《석일본기》에서 훈이 '''토무'''루('''トム'''ル)인 [[침류왕]]일 가능성이 있다.]、第二代 [[전지왕|直支王]](전지왕)、第三代 [[아신왕|阿美王]](아신왕)、第四代 [[전지왕|腆支王]](전지왕)、第五代 [[구이신왕|久爾辛王]](구이신왕)、第六代 [[비유왕|毘有王]](비유왕)、第七代 [[개로왕|蓋圖王]](개로왕)、第八代 [[문주왕|文園王]](문주왕)、第九代 [[삼근왕|三斥王]](삼근왕)、第十代 [[동성왕|東城王]](동성왕)、第十一代 [[무령왕|武寧王]](무령왕)、第十二代 [[성왕(백제)|聖王]](성왕)、第十三代 [[위덕왕|威徳王]](위덕왕)、第十四代 [[혜왕|惠王]](혜왕)、第十五代 [[법왕(백제)|法王]](법왕)、'''第十六代 [[진이왕|辰爾王]](진이왕)'''、第十七代 [[무왕(백제)|武王]](무왕)、第十八代 [[의자왕|義慈王]](의자왕)、第十九代 [[부여풍|豊璋王]](부여풍)、第廿代 [[부여선광|禅廣]](부여선광) >---- >'''[[토요타(성씨)|토요타]]씨 족보''' 《[[삼국사기]]》에는 [[무왕(백제)|무왕]]이 [[법왕(백제)|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백제)|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 5개월 또는 6개월 설도 있다.]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 왕 또는 왕자를 뜻한다. 이 용이 법왕을 은유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했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 기록했고, 한때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가 [[무왕(백제)|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군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분류:몰년 미상]][[분류:백제의 왕자]] [include(틀:포크됨2, title=진이왕, d=2022-07-09 03:2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