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백제의 제후 및 비정통 국왕)] ||<-3><:><#00A6A9>'''{{{#gold {{{+1 辰爾王[br]진이왕}}}}}}''' || ||<:><#00A6A9>'''{{{#gold 성씨}}}'''||||<(> 부여(扶餘) || ||<:><#00A6A9>'''{{{#gold 생몰연도}}}'''||<:> 음력 ||? ~ ? || ||<:><#00A6A9>'''{{{#gold 섭정기간}}}'''||<:> 음력 ||600년 || [목차] == 개요 == [[백제]]의 왕족으로 [[토요타(성씨)|토요타]]씨 족보에서는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즉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링크]] ==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 >初代 百済國大祖 [[동명성왕|都慕大王]][* 세대 차이를 봤을 때 진짜 [[동명성왕]] 추모가 아니라 《석일본기》에서 훈이 '''토무'''루('''トム'''ル)인 [[침류왕]]일 가능성이 있다.]、第二代 [[진사왕|直支王]](전지왕)、第三代 [[아신왕|阿美王]](아신왕)、第四代 [[전지왕|腆支王]](전지왕)、第五代 [[구이신왕|久爾辛王]](구이신왕)、第六代 [[비유왕|毘有王]](비유왕)、第七代 [[개로왕|蓋圖王]](개로왕)、第八代 [[문주왕|文園王]](문주왕)、第九代 [[삼근왕|三斥王]](삼근왕)、第十代 [[동성왕|東城王]](동성왕)、第十一代 [[무령왕|武寧王]](무령왕)、第十二代 [[성왕(백제)|聖王]](성왕)、第十三代 [[위덕왕|威徳王]](위덕왕)、第十四代 [[혜왕|惠王]](혜왕)、第十五代 [[법왕(백제)|法王]](법왕)、'''第十六代 [[진이왕|辰爾王]](진이왕)'''、第十七代 [[무왕(백제)|武王]](무왕)、第十八代 [[의자왕|義慈王]](의자왕)、第十九代 [[부여풍|豊璋王]](부여풍)、第廿代 [[부여선광|禅廣]](부여선광) >---- >'''[[토요타(성씨)|토요타]]씨 족보''' 《[[삼국사기]]》에는 [[무왕(백제)|무왕]]이 [[법왕(백제)|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백제)|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 5개월 또는 6개월 설도 있다.]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 왕 또는 왕자를 뜻한다. 이 용이 법왕을 은유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했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 기록했고, 한때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가 [[무왕(백제)|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백제)|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분류:몰년 미상]][[분류:백제의 왕자]]